철학오피스
공산주의라는 쟁점: 바디우와 발리바르 본문
* 이 글은 오래전에 중대 자유인문 캠프 강연을 논문형식으로 옮겨 <문화과학> 지면에 발표했던 글이다. 몇몇 소소한 각주들이 있지만, 각주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최원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이 지젝의 주도로 런던, 뉴욕, 베를린에서 이미 세 차례에 걸쳐 개최된 “공산주의라는 이념(The Idea of Communism)” 컨퍼런스가 작년 9월 24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바디우와 지젝 뿐 아니라 많은 국내외 좌파 학자들이 함께한 이 컨퍼런스는 비록 한국의 레드 콤플렉스를 경계하여 명칭을 “멈춰라, 생각하라! 공통적인 것과 무위의 공동체를 위한 철학 축제”라고 바꿨지만, 그것이 매년 시리즈로 열려온 “공산주의라는 이념” 컨퍼런스에 속해 있는 대회였다는 점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게 필자는 이 컨퍼런스가 열리기 약 1년 전에 국내에서 컨퍼런스에 대한 준비를 주도하고 있던 이택광 교수(경희대)와 만난 사적인 자리에서 이 컨퍼런스가 서울에서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이야기도 하나 전해 들었는데, 그것은 에티엔 발리바르가 이 대회에 참여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조금 의아했지만, 두 번째 열렸던 뉴욕 컨퍼런스에 그가 참여한 바 있었기에 그땐 그가 오더라도 아주 이상한 일까진 아니겠거니 하면서 넘어갔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는 서울 컨퍼런스에 오지 않았다. 왜 오지 않았을까? 필자는 이것이 단지 일정상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데, 이 글은 어쩌면 그가 오지 않은 이유를 필자 나름대로 해명해 보고자 쓴 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컨퍼런스의 기원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적 가설』이라는 바디우의 책자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 바로 “공산주의라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념(idea)이라는 용어는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형상(eidos, 이데아) 개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관념’이라고 옮길 수도 있지만, 또한 그것이 이상적인 것(the ideal)과 맺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념’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하나의 이념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주장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 특히 맑스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을 항상 유물론자로 천명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디우가 어떤 의미에서 공산주의를 이념(관념)이라고 규정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발리바르는 바디우의 이러한 생각에 일단 동의하면서 공산주의를 이념이라고 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당하다고 평가하지만, 동시에 바디우가 말하는 이념의 그 성격을 문제로 삼는다. 먼저 우리는 바디우의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이어서 거기에 대한 발리바르의 문제제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필자가 바디우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기회와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바디우를 조금씩 공부해나가고는 있지만, 그의 논의를 모두 섭렵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필자로선 조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고 또 한편으론 독자들에게 송구스러운 일이 아닌가 우려된다. 사실 이 글의 모태가 된 것은 작년 11월에 중앙대학교 자유인문캠프의 초청으로 필자가 행했던 “공산주의라는 쟁점”이라는 강연이었는데, 주최 측에서 애초에 잡았던 큰 주제가 ‘공산주의’였고(나중에 강연을 했던 또 다른 선생님들과의 조율 과정에서 주제가 ‘국가와 정치’로 바뀌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라는 쟁점을 둘러싼 바디우와 발리바르의 논쟁을 소개하는 강연을 준비했던 것이다. 자유인문캠프에서 처음에 ‘공산주의’를 주제로 잡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서울에서 열렸던 “공산주의라는 이념” 컨퍼런스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바디우의 ‘공산주의적 가설’이 어떤 검토를 요구하는 지적 또는 이론적 정세가 있다는 뜻이고, 필자 또한 그러한 정세에 어느 정도는 부응할 필요를 느낀다. 부족하지만 이 글을 앞으로의 공부와 고민에 대한 하나의 작은 약속으로 여기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1. 바디우의 공산주의라는 이념
바디우는 수학의 집합론을 가지고 존재론을 해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존재와 사건』에서 그는 이러한 해석을 체계화했는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제목의 이 책에서 바디우는, 존재론이야말로 철학의 본령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고 존재론은 오히려 수학의 영역이라는 일견 놀라운 주장을 전개한다. 곧 존재론적 필연성의 법칙을 연구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수학(특히 집합이론)이며, 철학은 오히려 이러한 존재론적 필연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른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 연구해야 할 이 다른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발본적인 우발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사건이라는 것은 동시에 하나의 주체적 방향성(orientation)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수학적 필연성을 벗어나는 것은 주체적인 것이고, 따라서 사건의 우발성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주체에 관련되어 있다(그의 스승 가운데 하나인 루이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 주체를 배제하는 것이라면 사건에 대한 바디우의 이념론/관념론은 주체를 우발성의 적극적이고 본질적인 계기로 파악한다). 사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매우 사르트르적인 것이다(청년시절 바디우는 열렬한 사르트르주의자였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무(Nothingness)’라는 것은 단순히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파괴’를 뜻하는 것인데, 사르트르는 자연에는 실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파괴가 없으며 파괴는 오직 주체 쪽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자연 안에도 산이 무너진다든지 강이 마른다든지 하는 이러저러한 변화(따라서 파괴적으로 보이는 변화)가 있지만, 자연의 인과적 필연성의 작동 그 자체를 중단시키는 파괴는 오직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디우도 자연에는 사건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기존의 필연성의 장 내에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가능성을 도입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주체의 ‘실존적 결단’이라고 말한다. 이 논리가 하이데거적인 사건 개념(Ereignis, 현전-으로의-도래)과 결합함으로써 세련화되는데, 그 세련화의 수단을 이루는 것이 바로 수학의 집합론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집합론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기에(사실 이는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필요한 부분만을 간략하게 살펴볼까 한다.
집합은 기본적으로 현시(presentation), 곧 자신에게 속하는 이러저러한 원소들을 현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집합은 원소들을 무작위로 뽑아 현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질서 또는 구조에 따라 현시한다. 곧 그 집합이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자신에게 속하는 것만을 자신의 원소로 현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집합이 갖는 이러한 포함과 배제의 질서를 바디우는 “상황의 상태(the State of a situation)”라고 명명한다(여기서 ‘상태’에 해당하는 ‘State’라는 말에는 중의적으로 ‘국가’라는 뜻도 들어가 있음에 유의하자). 반면 이 집합의 질서에 의해 현시된 가능성들을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들이 현시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그것을 바디우는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진리가 돌발하며, 철학이 연구해야 할 주제도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이 점에서 바디우의 진리 개념은 ‘드러남’ 또는 ‘탈은폐’로서의 진리라는 하이데거적 진리 개념―aletheia―을 부분적으로 계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수학집합론, 특히 20세기 초에 발전된 제르멜로-프랭켈의 집합론(the Zermelo-Fraenkel set theory)에서는 이러한 사건 개념이 인정되지 않는다. 바디우 식으로 말하자면, 집합론은 오직 존재론적 필연성의 영역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는 우발성의 영역을 출발점에서부터 미리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르멜로-프랭켈의 집합론이 근본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라캉을 비롯한 현대의 많은 이론가들이 주목하는)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역설이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카탈로그들의 카탈로그’를 구성함에 있어 생겨나는 논리적 모순을 일컫는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름의 카탈로그를 만들 수 있다. 예컨대 산에 대한 카탈로그를 만든다면 그 안에는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 등의 원소들이 포함될 것이고, 강에 대한 카탈로그를 만든다면 그 안에는 한강, 두만강, 낙동강, 압록강 등의 원소들이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카탈로그들은 그 안에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산이라는 집합 안에 세상에 있는 모든 산의 이름을 다 써넣을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 단적으로 ‘산’이라는 원소를 써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강이라는 집합도 마찬가지인데, 거기엔 모든 강의 이름을 다 써넣을 수 있지만, ‘강’이라는 원소를 써넣을 수는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카탈로그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카탈로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이러한 카탈로그들의 카탈로그, 다시 말해서 일종의 ‘메타-카탈로그’를 만들려고 시도하게 되면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메타-카탈로그 안에는 ‘산’이라는 카탈로그, ‘강’이라는 카탈로그,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의 카탈로그들이 모두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메타-카탈로그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자기 집합 안에 써넣지 않으면, 그 자신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카탈로그’라는 기준을 만족하게 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도록 강제된다. 그렇다고 만일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원소들 가운데 하나로 목록에 포함시키면, 곧바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카탈로그’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집합에서 배제하도록 강제된다. 이러한 메타적 의미의 집합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이와 같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 생겨나기 때문에 제르멜로-프렝켈의 집합이론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한다. 예컨대, 빨간 것들의 집합(reds)은 {빨간 장미, 빨간 산타클로스의 복장, 빨간 소방차, .... }라고 쓸 수 있지만, 그 집합 자체가 빨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집합이 자신의 이름을 포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라는 관념은 짖지 않는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개라는 관념에는 이러저러한 (짖는) 개들이 포함되지만 (짖지 않는) 개라는 관념 그 자체가 그 안에 포함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디우에 따르면, 제르멜로-프랭켈의 집합이론이 부인하는 것과 달리,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집합이 생겨날 때, 집합론의 필연성 또는 존재의 법칙을 허물고 새로운 필연성을 정초하는 사건이 발발한다. 어떤 집합이 그러하다는 것일까? 가령 빨갛지 않은 것들의 집합(non-reds)이 그러하다. 우리는 이것을 {투명한 꽃병, 푸른 스머프, 하얀 병원응급차, ... }와 같이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위에서 논한 빨간 것들의 집합의 경우와 한 가지 점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빨갛지 않은 것들의 집합이라는 것 또한 집합 그 자체가 빨간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빨갛지 않은 것’이라는 기준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곧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원소란 항상 또한 하나의 부분집합이라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합론에 대한 논의가 도대체 공산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이렇게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이 출현할 때 이를 바디우는 사건 또는 진리사건이라고 부른다. 물론 바디우에게 진리사건은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종류의 진리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정치, 과학, 예술, 사랑(정신분석학의 테마로서의 사랑). 이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진리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대해 논하고 있으므로, 정치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디우가 말하는 정치적 진리사건이란 단적으로 해방적 사건, 봉기적 사건을 지칭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적 진리사건 또한 그것이 진리사건인 한에서 바로 우리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의 출현이라는 역설적 사건으로서 돌발한다.
물론 역사상 일어났던 그 모든 봉기적 사건들이 다 진리사건인 것은 아니다. 바디우는 (필자가 보기에) 사건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진리사건이 역사상 두 번 일어났다고 보는 것 같다. 먼저 고대에 예수 부활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871년에 일어난 파리 코뮌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바디우는 이렇게 발본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적 진리사건은 날짜까지 꼭 집어 확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부활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파리 코뮌의 경우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코뮌의 경우 1871년 3월 18일이 바로 그날인데, 알다시피 파리 코뮌은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5월 21일 정부군의 침탈이 자행될 때까지 지속되었다(28일에 진압이 완료되었고, 수만 명이 학살당한 이 일주일간을 사람들은 ‘피의 일주일’이라고 부른다).
1871년 3월 18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전해인 18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의 술책에 넘어가 (나중에 보불전쟁이라고 불리게 될) 전쟁을 벌이다 70년 9월 2일 스당(Sedan)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이로부터 이틀이 지난 9월 4일에는 파리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제정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들어선다. 하지만 이때 권력을 잡은 것은 민중이 아니라 공화주의 정치가인 피카르드, 티에르 등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민중봉기로 인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프랑스가 이 시점에서 전쟁을 끝냈던 것은 아니다. 계속 전쟁을 수행하다가 프랑스 정부는 1871년 1월 28일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프로이센에 항복하게 되는데, 그 결과 전쟁에 패한 프랑스 공화주의 정부는 프로이센의 굴욕적인 항복조항을 받아들여야 했다. 특히 국민방위군으로 조직되어 있던 인민(이들은 여전히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을 무장해제해야 했으며, 이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특히 대포)를 회수해야 했다. 3월 18일 새벽 3시 정부는 분견대를 파견하여 기습적으로 국민방위군의 대포 3정을 회수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이들은 곧 파리의 여성들에 의해 발각되어 제지를 당하고, 이를 지켜보던 파리의 인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자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심지어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설득당해 정부 편에서 빠져나와 민중 편에 가담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봉기의 시작이다. 정부청사였던 오텔 드 빌(Hôtel de ville)에서 30명 정도 되는 대표자들이 다음 날(19일)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선언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1871년 3월 18일 봉기는 정치사에 있어서 (종래의 혁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출현시키면서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일련의 봉기들의 집합의 이름’이 되었다. 그 집합 안에는 파리 코뮌을 필두로 러시아 혁명, 중국 문화 대혁명과 같은 일련의 혁명이 원소로 포함되는데, 이 후자의 혁명들은 모두 파리 코뮌(1871년 3월 18일)에 스스로 준거함으로써 집합 전체의 이름을 ‘파리 코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파리코뮌 =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 중국 문화대혁명, ...}이라는 (집합론의 필연성을 파괴하는) 비정상적인 집합이 출현한 것인데, 그것의 진리사건적 단절의 핵심은 바로 의회주의와의 완전한 결별, 더 나아가 정치의 그 어떤 대표제적 형태에도 의존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내린 데에 있다. 이 점이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적 가설』의 마지막 장(“공산주의라는 이념”)에서 바디우는 다시 ‘대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거기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이 글의 후반부에 논할 바디우에 대한 발리바르의 비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 지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그 안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불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1) 정치적 요소: 진리 절차, 곧 정치적 사건 자체에 한정된다기보다는 그 사건을 포함하여 그 결과들의 조직화의 뜻을 가지고 있는 진리 절차.
2) 역사적 요소: 인류의 일반적 생성.
3) 주체적 요소(이데올로기): 결단(decision).
먼저 정치적 요소를 살펴볼 것 같으면, 바디우가 여기서 드는 사례는 프랑스혁명(1792~94), 중국의 인민해방전쟁(1927~49),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1902~17), 중국의 문화대혁명(1965~68) 등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모든 진리절차는 그 진리의 대문자 주체(Subject)를 처방하며, 이 대문자 주체는 어떤 개인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이미 우리가 살펴봤듯이, 바디우에게 사건이라는 것은 주체적인 것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개인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대문자 주체란 무엇일까? 비록 『공산주의적 가설』에서 그가 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메타정치』에 나오는 논의가 여기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디우는 그 텍스트에서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에게 있어 과잉결정은 과소결정과 달리 모순들의 응축을 통한 혁명의 발발과 등치되곤 한다)을 논하면서, 그것을 “주체 없는 과정”으로 보고자 했던 알튀세르에 반대하여 그것을 “주체 없는 주체성(subjectivity without a subject)”으로 보자고 제안한 바 있는데, 바디우가 말하는 대문자 주체란 바로 이러한 "주체 없는 주체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곧 그것은 혁명적 실천의 어떤 주체적 방향성과 관련되어 있다.
두 번째 요소는 역사적 요소로, 이것은 위와 같은 진리절차가 인류의 일반적 생성(becoming) 속에 기입되는 사태를 지시한다. 진리절차는 봉기인 한에서 항상 어떤 국지성(locality)을 가지고 있다. 세계 인민의 동시 봉기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반문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봉기는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전파되어 이동하는) 국지성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국지적 진리절차는 또한 반드시 전 인류의 역사 일반 안에 하나의 의미로서 기입되어야만 한다. 주지하다시피 불어에서 역사는 이스투아르(histoire)인데, 이 말은 역사라는 뜻 이외에 이야기/스토리라는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하기, 사건이 종결된 다음에 그 사건의 의미를 들려주는 이야기 만들기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요소는 상징화 작업을 통해 나타나는 것 또는 단적으로 (라캉적 의미에서) 상징적인 것(the symbolic)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상징화 작업을 통해서만 사실들(facts), 곧 역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바의 것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반면 앞서 말한 정치적 요소, 진리절차로서의 정치적 사건은 바디우에게 실재적인 것(the real)이며, 따라서 바디우에게 실재로서의 ‘사건’은 ‘사실’과는 다른 것, 오히려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대립된 이 양자는 곧바로 통일될 수 없으며, 그것들을 매개하는 요소가 필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마지막 요소인 주체적 요소이다.
주체적 요소는 개인이 스스로 정치적 진리의 일부가 되기로 결단(decide)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의 투사(militant)가 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을 바디우는 “합체(incorporation)”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개인이 진리의 육체의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어 그 육체 안으로 통합되는 사태로 규정한다. 이 진리의 육체를 바디우는 또한 성육신(glorious body)과 등치시키는데, 이 말은 알다시피 기독교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신의 육체’를 지시하는 것이다. 개인은 개인주의와 동물성(동물적 욕구)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신의 육체에 합체되고, 그리하여 주체가 된다. 개인이 “새로운 대문자 주체의 능동적 부분”이 되는 것으로서의 “주체화(subjectivation)”는 바디우에 따르면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 세 가지 요소 또는 세 가지 차원(실재, 상징, 상상―RSI)을 하나로 종합하는 것이 바로 이념(idea)이다. 바디우는 이념의 형식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준다. “이념이란 진리절차의 독특성과 역사의 표상/재현 사이의 상호작용의 주체화이다.”
여기서 어떻게 보면 바디우는 라캉적 쉐마뿐만 아니라 칸트적 쉐마를 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칸트는 개념과 직관을 논하면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화/상징화 없는 진리사건은 맹목적이고, 진리사건 없는 역사는 공허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칸트에게 있어서 개념과 직관을 매개함으로써 양자를 종합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초월적 도식으로서의 상상이다. 마찬가지로 바디우에게 있어서도 실재적 진리절차와 역사적 상징화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주체의 상상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바디우는 플라톤주의자이자 칸트주의자라고 여겨지는데, 반면 그는 헤겔주의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바디우는 지젝과 달리 헤겔을 비판하면서, 헤겔에겐 역사가 실재인 반면 자신에게 역사는 상징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라캉적 RSI 쉐마에 대한 바디우적 해석이 올바른 해석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와 상징을 매개하는 상상적인 것(주체적 요소)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해서 부정적이거나 실효성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개인들이 함께 대문자 주체에 합체됨으로써 그것을 구성할 능동적 역량을 갖게 되는 이념의 작동이라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역사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진리는 의미를 갖지 않으며 오직 실존하기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이 실존과 의미를 주체화를 통해 연결한다고 말한다. 주체는 상징화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실재인 진리절차를 상상적으로 역사 속에 투사함으로써 그것을 현시가능(presentable)하게 만든다. 곧 기존의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한 것인양 현시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들의 장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현시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다시 상징적인 것 안에서 현시의 새로운 법칙을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만큼, 새로운 상황의 상태(the State of a situation)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사건이라는 것은 상징화될 수 없는 것, 곧 기존의 상황의 상태 안에서는 현시될 수 없는 것인데, 주체는 상상을 통해 그것을 역사에 투사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상황의 상태 안에서 현시될 수 있는 “사실”인양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새로운 국가(State)의 구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해방적 정치가 (통치자는 바뀌었다 할지라도) 이전과 동일한 국가의 구성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는 혁명적 사건 이후의 국가(상태)는 “비국가(non-State)”로 이행하는 국가, 사멸하는 국가, 사멸을 본질로 하는 국가라고 말한다. 알다시피 이 정식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직접적으로 온 것이며, 바디우가 자신의 책에서 별다른 설명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바디우가 레닌과 결국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완전히 그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디우가 내심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레닌이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나중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어쨌든 이 비국가로 이행하는 국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화의 작업으로 등장하는 것, 상징적으로 구성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징화의 “구심점”으로서의 고유명사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바디우는 이를 “고유명사들의 치명적인 중요성”이라고 표현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봉기 또는 혁명은 “이름 없는 대중들”이 벌이는 것인데, 이러한 해방의 정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고유명사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또한 고유명사를 통해서 서로로부터 구별된다. 바로 혁명적 영웅들의 이름이 그것이다. 스파르타쿠스, 로베스피에르, 레닌, 마오, 체 게바라 등의 이름을 들을 때 우리는 각각 그 이름에 대응하는 혁명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다. 바디우는 이 고유명사들을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계기를 이루는 상징화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서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개인숭배(cult of personality)를 옹호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모든 개인숭배가 잘못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인숭배인가를 물어야지 개인숭배 전체를 기각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스탈린의 개인숭배는 비판해야 하지만 마오의 개인숭배는 비판해선 안 된다. 그러면서 바디우는 개인숭배를 “수없이 많은 대중들의 행동을 고유명사를 가진 일자(the One)를 통해 대표(representation)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이 개인숭배이고, 이것이 없다면 진리사건 또는 진리절차는 맹목적인 것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그것이 역사화/상징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표(representation)라는 관념이 이전과 달리 긍정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디우는 파리 코뮌이 정치의 어떤 대표제적 형태도 거부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진리사건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는 대표라는 관념이 긍정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바디우는 의회주의적 또는 의회적 형태의 대표는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만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대표(의 적어도 어떤 형태)는 옹호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정치철학자가 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극우 정치이론가인) 칼 슈미트이다. 슈미트야말로 의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대표 개념을 옹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양자는 모두 이러한 지도자에 의한 대표를 통해 분할불가능한 공동체(an indivisible community)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주권의 분할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대표를 통해서 공동체의 통일이 달성된다고 말하는 슈미트야 말할 것도 없지만(『헌법이론』), 바디우의 경우에도 진리절차에 참여하는 것은 진리의 육체, 대문자 주체에 합체가 되는 사태를 지시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분할가능성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바디우가 유기체적인 결합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사실 발리바르의 문제제기 전체는 어쩌면 이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해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발리바르 자신이 바디우에 대한 글에서 대표 개념을 장황하게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대표 개념이 그의 문제제기를 좀 더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보인다. (바디우 자신을 포함하여 간혹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발리바르는 확실히 의회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슈미트나 바디우의 대표 개념과는 전혀 다른 대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해서 우리는 발리바르 쪽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발리바르의 문제제기를 세세히 요약해 소개하기보다는 ‘대표’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취하려 한다. 그러면서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공산주의자의 상을 마지막으로 소개해볼까 한다.
2. 발리바르의 문제제기
발리바르는 우선 바디우가 공산주의를 하나의 이념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없는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친다. 그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념에 따라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사실 (자기-변혁을 통한 세계-변혁과 세계-변혁을 통한 자기-변혁으로서의 혁명적 실천이라는 이중의 목적론을 정식화하며) “세계를 변혁하라”고 말한 것은 맑스 자신이었다(포이어바흐에 대한 11번째 테제). 현재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실현하려고 하는 존재로서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이념주의자/관념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이것이 그들의 유물론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념은 비단 공산주의자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념(idea)이란 이상(ideal)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의 이념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몇 가지가 있다.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진, 선, 미, 정의, 자유, 평등과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소유, 민족, 공화, 시장(모든 상품의 완벽한 분배를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시장)과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런데 바디우는 유일하게 공산주의라는 이념만이 이념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과학, 예술, 사랑은 논외로 하고) 정치에 있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정의, 자유, 평등과 같은 것은 모두 공산주의라는 이념 아래에 포섭될 수 있는 하위 범주, 하위 이념이라고 말하고, 소유, 민족, 시장과 같은 것들은 가짜 이념이라고, 시뮬라크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연장선상에서 바디우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아닌 다른 그 모든 이념(특히 시뮬라크르)는 공히 주체를 종속시키는 것, 주체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 타율적이 되게 만드는 것인 반면,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주체를 절대적으로 자율적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산주의라는 이념만이 주체를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의 공산주의적 주체는 절대적 견지에서 봤을 때 하나의 주체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절대적 주체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대목에서 연관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주체화의 문제인데, 도대체 종속 없는 주체화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디우가 자신의 스승/주인(master)라고 공공연하게 내세우는 라캉의 경우나 그의 또 다른 스승인 알튀세르에게 ‘종속 없는 주체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모든 주체화는 대타자에 대한 종속을 통과한다. 왜냐하면 이 두 스승은 모두 “강제된 선택(forced choice)”을 하나의 필수적인 계기로 주체화 과정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의한 호명이라는 것도 그 종속과 주체화의 변증법을 분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바디우가 말할 때, 그것은 어떻게 절대적 자율화로서의 주체화가 될 수 있는가, 다른 이념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라는 이념도 주인 기표(master signifier)에 의한 호명이 아닌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바디우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에 대해 논할 때 그것은 매우 모호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행하는 대문자 주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이라는 것은 단지 역사적 조건들 속으로의 진리의 투사의 특수성이라는 차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공산주의 또한 종속을 핵심적 계기로 포함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우리가 명확히 인정하면 우리는 몇몇 질문들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다른 이념들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것은 어떤 구분되는 자신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의 긍정적 측면은 무엇이고 그것의 부정적 측면 또는 그것의 위험한 측면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공산주의가 선험적으로 특권화된 진리의 자리에 서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두 번째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세계 변혁이 자기 변혁이자 자기 변혁이 세계 변혁이기 때문에) 자기변혁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들의 변혁, 개인들이 서로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들 또는 관개체성의 변혁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바디우가 이것을 사고하기 위해 도입하는 것은 바로 “실존의 강렬함(the intensity of existence)”이라는 관념이며, 더 나아가 그는 그것을 독특성(singularity)과 사실(facts)의 차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바디우의 정의에 따르면, 독특성은 그 실존의 강렬함이 최대치인 장소로서 실재적인 것을 의미하고, 사실이란 그 실존의 강렬함이 최대치가 아닌 장소로서 상징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시 독특성은 더 강한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것과 상대적으로 더 약한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구분되고, 이 가운데 더 강한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독특성만이 사건이 된다고 말한다(여기서 강렬함의 최대치가 어떻게 더 강하거나 더 약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필자의 판단으로 그것은 무한집합이 여전히 크기를 가지며 어떤 무한집합이 다른 무한집합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물론 이러한 강렬함에 대한 바디우의 논의는 한편으로 들뢰즈가 말하는 “강렬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것만이 여기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함축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신도들의 믿음의 강렬함은 공동체적 결집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봉기라는 사건 속에서 출현하는 강렬함은 오히려 이러한 종교적 결집력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설명하면서 거기서 주체들이 하나의 분할불가능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대문자 주체의 성육신(신적 육체) 안으로 그들이 합체됨으로써라고 이야기한다. 바디우 자신은 이것을 명시적으로 논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지만, 이 지점에서 그러한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어떤 모델을 특권화하고 있는가 우리는 물을 수 있고, 여기서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바로 교회라는 모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앞에서 그가 비국가로 전화되는 국가라는 모델을 논했을 때, 그것이 레닌에게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레닌의 것과는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바디우가 생각하는 교회는 제도화된 교회나 배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 다시 말해서 제도적 교회의 부정이자 제도적 교회가 기반하고 있는 본래적 정신으로서의 교회, 부정적이고 정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생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는 종래에 맑스주의가 실현시키려 했지만 역사적으로 실패한 모델들(곧 군대와 국가)과 그것이 갖는 차별점 때문이다. 발리바르 자신이 이 점을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그의 비판은 암묵적으로 프로이트가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행한 집단적 동일시에 대한 분석에 준거하고 있다. 거기에서 프로이트는 집단적 동일시를 통한 공동체 형성의 두 가지 거대한 사례로 군대와 교회를 들고 있다. 군대는 군대의 지휘관 또는 지도자를 통해서 동일시 효과가 발생한다면, 교회는 보이지 않는 신을 그 이상(자아이상)의 자리에 놓는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이 두 가지 모델은 역사적으로 서로 침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교회야말로 전사/투사/밀리턴트라는 말을 발명까진 아니라고 해도 광범위하게 수용했었다), 지도자를 통한 동일시를 현실적으로 생략하지 못한다(사제, 목사 등). 특히 바디우 자신이 개인숭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 쟁점은 바디우에게 매우 곤란한 것이 될 수 있다(따라서 그의 침묵이 설명된다).
결국 발리바르는 바디우가 거꾸로 선 슈미트라고 비판한다. 슈미트는 『의회주의 정치의 위기』라는 책에서 “민족주의의 에너지는 계급갈등의 신화보다 더 크다”라고 말했는데, 바디우는 이를 거꾸로 뒤집어 놓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곧 그에게 “공산주의의 신화는 민족주의의 신화보다 더 크다, 더 강렬하다”고 여겨질 뿐이다. 왜냐하면 바디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사랑 없는 미움, 미움 없는 사랑이 있을까? 사랑과 미움은 서로를 전제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양가성의 효과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기 위해 도입한 기준으로서의 ‘친구와 적의 구분’을 바디우 또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친구에 대한 사랑은 곧 적에 대한 미움과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프로이트 자신이 말하듯이 유대기독교적 전통은 내외적으로 수없이 많은 증오의 실천과 폭력을 자행해 왔다.
바디우가 개인숭배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수많은 이름 없는 대중들의 행동을 고유명사를 가진 일자를 통해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의 대표 개념이 슈미트의 대표 개념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점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슈미트적 정치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도시키고 있을 뿐이다. 슈미트나 바디우의 대표 개념은 대중 안에서 모든 거리를 일소하고 그들을 분할불가능한 하나로 만든다. 반면 발리바르의 대표 개념은 대중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거리로서 정의되어진다. 대표는 따라서 브레히트적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를 정치 안으로 도입하는 필수적인 기제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는 바디우적 공산주의의 상에 대해 어떤 대안적 상을 제시하는가? 발리바르는 공산주의적 정치 또는 공산주의자의 새로운 형상을 모색하기 위해 맑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데, 단 거기에 나타난 공산주의자의 형상에 수정을 가하고 그것을 확장적으로 재정식화한다는 조건 하에서이다. 문제가 되는 맑스의 정식화는 ‘공산주의자들은 기존의 당들과 분리된 자기만의 당을 만들지 않고 기존의 노동자 당들 안에서 가장 단호한 분파로서 활동한다’는 테제를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우선 이러한 테제가 단지 당(또는 정당정치)에만 적용되는 사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다양한 조직들(노조와 평의회 등)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사정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맑스의 테제를 확장한다. 둘째, 발리바르는 공산주의자들이 기존의 조직들 안에서 가장 단호한 분파로서 남아야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조직들에 대해 끊임없이 내부로부터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그 조직들이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자기 정당성을 항상 문제시할 뿐 아니라, 그 조직들이 타 조직과 맺는 관계들(동맹뿐만 아니라 대립의 관계들)까지 문제시하는 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공산주의자는 조직자라기보다는 조직의 활동에 충실하게 참여하면서도 그 조직들을 탈구축하는 탈조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이러한 ‘탈조직’의 일을 효과적인 방식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사실 자신의 조직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조직들(국가적 수준의 조직들까지 포함하여)의 안팎을 넘나드는 자, 곧 여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공산주의자가 세 가지를 바꿀 수 있는 역량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우선 그는 장소를 바꿀 줄 알아야 하고, 언어를 바꿀 줄 알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목청껏 떠들고 다니는 자가 아니다. 공산주의자는 이러저러한 조직들의 경계들을 넘나들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이한 언어들을 서로에게 번역해주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당연히 공산주의자는 (맑스 자신이 말했듯이) 다른 조직들로부터 분리된 자기들만의 조직을 갖지 않으며 하나의 조직에만 속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심지어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그는 복수의 조직들을 넘나들면서 서로의 갈등을 정확히 분석하고 서로의 언어적 차이들을 번역함으로써 갈등 속에서 연대를 생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새로운 공산주의자의 형상은 친구와 적의 상상적 구분, 슈미트적 구분을 따라 정치를 사고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친구와 적의 구분을 해체하는 자이다. 갈등을 단순히 억압하거나 부인하거나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갈등적 구분선을 끊임없이 (데리다적 의미에서) 탈구축(deconstruct)함으로써 말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새로운 형상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을 두 이론가에게서 찾는다. 하나는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를 논한 프레드릭 제임슨으로, 발리바르는 새로운 공산주의자가 정확히 사라지는 매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철학자를 “자신의 개입 속에서 소멸하는 자”로 규정한 알튀세르인데, 발리바르는 이러한 규정을 단지 철학자나 공산주의 철학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 일반의 정의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가 늘 말했듯이, 자신의 개입 속에서 소멸하거나 사라진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개입이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효과적이라는 것은 인정받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알튀세르는 항상 이러한 인정욕망을 천박하다고 여겼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 혁명의 영웅들이 개인숭배되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개입이 완전히 효과적이진 못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우리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공산주의자들은 자기의 이름을 바꾼 채로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있다고. 수없이 많은 헌신적인 인권운동가들, 대중조직, 노조, 정당, 시민단체에서 실천하는 활동가들, 학교에서 활동하는 교육자들, 학생들 등등, 그 모든 자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지칭하지 않는) 새로운 공산주의자들을 본다. 바디우는 공산주의가 드물다고 말한다. 발리바르는 반대로 공산주의가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다만 바디우가 “공산주의라는 이념” 컨퍼런스에서처럼 자기가 공산주의자라고 열심히 떠드는 곳에서만 공산주의자를 발견하려고 들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그에게 드물어 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Badiou, Alain. The Communist Hypothesis. Trans. D. Macey & S. Corcoran. Verso: London. 2010.
------. Meta-Politics. Trans. J. Barker. Verso: London. 2005.
------. Being and Event. Trans. O. Feltham. Continuum: London. 2007.
Balibar, Etienne. « Les Questions du Communisme ». Exposé présenté le 15 octobre 2011 au Colloque international « Communism, A New Beginning ? », organisé par les éditions Verso à Cooper Union, New York. Version française adaptée et corrigée.
------. « Remarques de circonstance sur le communisme ». Actuel Marx. n° 48, septembre 2010, numéro spécial « Communis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