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진보 운동 재구성의 몇몇 쟁점들: 발리바르의 관점을 중심으로
이 글은 진보평론 봄호에 실릴 글입니다. 여기 게시하는 글은 각주를 모두 생략하고 있는데, 이 글은 각주가 본문보다 더 중요한 글입니다. 게다가 이 글이 속해 있는 특집기획에는 푸코, 아감벤, 네그리, 랑시에르 등의 한국사회와의 관련성을 탐구하는 쫄깃한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꼭 구매해주시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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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진보 운동 재구성의 몇몇 쟁점들: 발리바르의 관점을 중심으로
최원(건국대 HK연구교수)
이 글은 프랑스의 철학자(따라서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를 논하는 글이지만 그의 이론 전반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특히 한국의 진보운동들이 마주하고 있는 몇몇 곤란한 문제들을 고민하는 데에 발리바르의 논의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밝히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쯤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세 가지 문제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한국의 진보운동들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지점 가운데 하나는 시민운동(또는 이른바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운동을 위시한) 민중운동 사이의 분열과 대립이다. 1987년에 발발한 거대한 봉기인 6월 민주항쟁과, 마찬가지로 거대했던 7·8·9 노동자 대파업에서 시작된 두 흐름은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지속적인 상호반목을 경험하였으며 2000년대에는 몇몇 결정적인 시기에 대중들의 투쟁대오를 분열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예컨대 ‘깃발논쟁’이라는 것을 살펴보자. 2002년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압사당한 미선이, 효순이 사건 당시 ‘앙마’라는 이름의 한 누리꾼이 시민들에게 투쟁을 호소함으로써 일어났던 싸움에서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른바 운동권)은 집회에서 ‘깃발을 내릴 것인가 올릴 것인가’를 가지고 대립했으며, 이 논쟁은 이들의 슬로건 및 전술상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압축하면서 투쟁이 대중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았다. 그 이후 노무현 전(前)대통령에 대한 국회탄핵(2004년)에 분노하여 대중들이 거리에 나섰을 때에도 민중운동진영은 그들과 실천적으로 결합할 길을 찾을 수 없었으며 집회 주변이나 온라인상의 토론게시판에 남아 자신들의 정치적 무기력을 곱씹어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국회의 다수파를 점한 세력이 자신의 권력지분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또는 거기에 반하여 “합법적” 쿠데타를 감행했던 것으로, 당시 민중운동 진영의 일부가 애써 그렇게 간주하려 했듯이 단순히 노무현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에 머물러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구세력의 그와 같은 반민주적 폭거에 시민들이 어떻게 올바르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2007년에 이명박 정권이 한미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광우병의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려들자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엄청난 규모의 촛불시위에서도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간의 갈등은 촛불시위를 유령처럼 쫓아다니면서 괴롭혔고, 양진영 모두 대중들의 의지를 하나로 담아낼 단일한 정치적 슬로건을 찾지 못함에 따라 결국 촛불이 사그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시민운동은 운동권이 자신들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려 한다고 비난했고, 민중운동은 촛불이 중산층 운동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면서 대중들로부터 유리되거나 효과적이지 못한 돌출적 실천을 보이곤 했다). 그러나 작년 말에 진행된 철도 민영화 반대 노동자 파업투쟁은 종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줬는데, 한 대학생의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하의 자보 게시를 계기로 대자보 투쟁이 대학과 일반시민 사이에서 일파만파로 번져나가면서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서로 정세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비록 12월 28일 민주노총 총파업 직후 철도노조 지도부가 싸움을 너무 빨리 접음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은 현실화되지 못한 채 불발로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그 새로운 가능성은 많은 사람들을 가슴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분열의 역사를 다소 장황하게 반추한 까닭은 이 분열이 결국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각각에게 어떤 실패를 몰고 온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운동은 시민운동과 분리됨으로써 자신의 투쟁을 보편적인 정치적 의제로 제시하는 데에 실패했으며(물론 대다수 정규직 노동조합들의 “밥그릇 싸움”의 경제주의적 경향은 민중운동의 이러한 시민-정치성의 탈각경향과 나란히 심화됐다), 또 반대로 시민운동은 민중운동과 분리됨으로써 자신의 급진성을 잃어버리고 민주화운동 자체가 형해화 되면서 한국사회의 대중들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결과를 맞이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두 번째 문제는 폭력이라는 질문과 관련된다. 그것은 진보운동들이 거리, 공장, 학교,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이러저러한 투쟁을 조직할 때마다 지배자들에 의해 악용되는 이슈일 뿐만 아니라(이러한 악용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2009년에 일어난 용산참사와 그 재판과정일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전통이, 자신의 봉기적 실천이 목표하는 바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 목표에서 다시 무한히 멀어지도록 만든 폭력 문제와 이론적·실천적으로 대결하지 못함에 따라(그 결과가 역사적 사회주의국가들에서 제도화된 극단적 폭력으로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이제 가감 없이 인정하자) 대중들이 더 이상 봉기적 수단에 의한 사회변혁을 포기하게 되는 총체적 사기저하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이기도 하다. 게다가 저항적 실천에서의 폭력이라는 문제는 앞서 언급한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간의 끊임없는 불화의 대상이기도 하다. 시민운동(특히 중간 계급화된 시민운동)은 비폭력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며, 반대로 민중운동은 대항폭력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면서 소모적인 논쟁 속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결해 왔다(두 진영이 예외적으로 어떤 수렴과 협조 하에 실천할 수 있었던 투쟁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투쟁 및 희망버스와 같이 대항폭력 일체를 포기하고 목숨을 건 무기한 고공농성이라는 수단을 동원한 경우에나 가능했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양진영의 대립이 폭력이라는 쟁점에 의해 과잉결정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마지막으로(그러나 이는 한국 사회 진보운동의 마지막 문제가 아니라 이 글에서 다룰 문제의 마지막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우리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야기한 정세적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무능력이야말로 현재 대중들의 우경화를 낳고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특히 “일베”(일간베스트)와 같은 네오파시스트적 청년 대중운동의 등장은 가히 충격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들의 우경화가 단지 50대 이상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386세대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세대를 관통하는 전반적인 경향성을 띠기 시작했음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다수의 청년은 안정된 부유층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불안한 계층에 속해있다는 점에서 진보운동들이 견지해온 고전적인 또는 전형적인 계급분석의 틀을 상당히 벗어나며, 이에 따라 진보운동들은 그들 앞에서 이론적으로 점점 더 무장해제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하지만 과거 20세기 초에도 이러한 소외되고 불안한 청년층이야말로 파시즘운동에 가장 광범위하게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는 결코 일시적인 일탈현상 쯤으로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발리바르는 위와 같은 세 가지 문제에 대해 우리가 사고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몇몇 중요한 이론적 수단을 제공하는 (유일한 철학자는 아니더라도) 매우 드문 철학자이다. 우리는 첫 번째 문제를 위해 그의 시민권에 대한 사유에 준거할 수 있으며, 두 번째는 그가 제안하는 반폭력(anti-violence)의 정치에 준거할 수 있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가 이론화하는 ‘씨테(cité)에 대한 권리’(또는 입국거주권)에 준거할 수 있다.
시민권 언어의 급진적 재전유를 위하여
맑스가 「유대인 문제」라는 글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비판한 이래 맑스주의는 시민권의 정치와 매우 강한 긴장 관계를 형성해왔다. 발리바르 또한 그의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와 함께 맑스주의의 틀 내에서의 맑스주의의 개조라는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던 초기에는 시민권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정이 급변하게 된 계기는 1978년에 그가 알튀세르와 국가 및 당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마련되었다. 그 후 약 20년 동안 발리바르는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이론적 틀을 기획하게 되는데, 그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대중들의 공포: 맑스 전과 후의 정치와 철학』(1997)이다. 이 저서의 출간 직후 가졌던 장-프랑수아 슈브리에 등과 가진 대담에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와의 논쟁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국가, 정치, 시민권, 그리고 민족성에 대한 시민권의 관계가 맑스주의 이론에게는 미래의 대상들이 아니라, 아예 접근 불가능한 대상들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거스르면서까지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대상들은 단지 잠정적인 맹목점들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맑스주의 이론화에 있어서의 절대적 한계들입니다. 많이 비난되는 맑스주의의 경제적 환원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맑스주의의 아나키즘적 요소 때문입니다. 저는 아나키스트가 아닙니다. 반대로, 저는 맑스가 너무 지나치게 아나키스트였다고 생각하고, 맑스 이후의 맑스주의자들이 국가의 사멸이라는 꿈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바쿠닌보다 자기가 더 아나키스트적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바쿠닌이 “국가를 타도하자!”고 외치며 국가를 말로만 와해했던 반면, 맑스는 계급투쟁을 활용하면서, 국가를 현실에서 와해하려는 목표를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두 다 알고 있지요. 국가의 사멸이라는 담론은 전능한 국가를 옹호하는 실천을 출현시켰습니다. 저는, 국가는 사실 사회적인 기정사실(a social given)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라고 말하고 싶고, 국가는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된 작용의 산물―풀란차스가 설명했듯이 하나의 응축, 결정화라는 의미에서―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또는 그것을 확정하게 된 것)은 발리바르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중대한 결함을 발견하고 거기에 결정적인 이론적 정정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배이데올로기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피지배자들의 것, 곧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승인과 저항·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에 기반한 “피지배자들의 상상의 특정한 보편화”라는 점을 밝힌 데에 있다. 이러한 그의 테제가 알튀세르에게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다. 알튀세르 자신도 1962년에 쓴 「‘피콜로’,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의 한 각주에서 “[이데올로기적] 통일성은 달성된 통일성인 만큼이나 욕망되거나 거부된 통일성”이라고 말하면서 “이데올로기는 본질상 끊임없이,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투쟁의 소음과 격동이 희미하거나 날카롭게 메아리치는 경합과 투쟁의 장소”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또한 이데올로기 자체 내에 있는 대중들의 “거부”(발리바르의 용어로는 “저항·반역”)의 계기를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계급투쟁에 대한 이러한 정식화는 맑스가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제시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유일하게 긍정적인) 정식, 곧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갈등을 인식하고 싸워 해결하는 형태”라는 정식을 특권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 자신과 알튀세르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가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최종심에서 피지배자들의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지배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는 지배성, 다시 말해 보편성의 계기를 설명하는 데에 실패한다(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광범위하게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발리바르는 동어반복적 자명성에 사로잡혀 있는 이러한 맑스주의적 정식을 전도시킴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가 역설적으로 피지배자들의 것임을 밝히고, 더 나아가 바로 이로부터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가능성을 명확하게 이론화하는 데에 성공한다. 피지배자들의 반역은 지배이데올로기 밖에서 자신들만의 특수한 이데올로기를 따로 생산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이데올로기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따라서 ‘위로부터’ 들려오지만 본래는 자기 자신이 보낸 이상적 메시지(정의, 자유, 평등, 노동, 행복 따위)를 곧이곧대로 지금 그 자리에서 실현하려고 집단적으로 시도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 맥락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지배이데올로기를 피지배자들의 것이라고 말하게 되면, “부르주아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민권과 국가도 최종심에서는 지배계급의 것이 아니며 그 안에는 반역과 봉기의 근원적인 계기가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달리 말하면, 모든 국가와 헌정은 자기 자신을 정초하고 출현시킨 봉기적 계기에 대한 다양한 저항의 수단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이 저항에 다소간 성공할 때에만 헌정은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다), 그러한 봉기적 계기는 그것을 푸닥거리하여 몰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모든 국가와 헌정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유령적인 것으로 부단히 되돌아오게 된다. 더욱이 이러한 필연성은 단지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수준에서만 단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수준에서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민권의 언어를 비판하는 맑스(와 맑스주의자들) 자신에 의해서조차 은밀하게 자신의 실천 속으로 재도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인민 중의 인민”으로 규정하고「국제 노동자 협회 규약」에서 “노동자들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일”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프랑스혁명이 창립한 인민주권의 원리(따라서 정치의 자율성의 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것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실제로 많은 역사적 봉기들은 헌정 안에 기입되어 있는 원칙에 반해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그 원칙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쥔 대중들에 의해 일어났는데, 이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것으로, 가깝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에서 대중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내용을 외치며 일어났던 사례를 떠올릴 수 있으며, 조금 멀게는 1980년 광주항쟁에서 대중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자신의 반역적 실천의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발리바르는 봉기와 구성(constitution)의 변증법에 따라 헌정 자체에 기입되어 있는 봉기의 원리를 단순히 확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행정, 공적 권력, 공공질서 같은 관념들을 원문 안에 필수적인 것으로 포함하고 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따라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까지 말한다. 「선언」은 그렇게 해서 국가주의적인 것과 무정부주의적인 것을 동시에 피해 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시민들의 존재를 통제하는 제도들 자체에 대해 시민들이 행사하는 아래로부터의 통제에 국가의 모든 기능을 종속”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발리바르는 이것을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실행적인 정의”라고 말한다). 물론 맑스가 말했듯이 국가는 지배계급의 도구로서 기능하는 경향을 갖지만, 국가구조와 계급적 기능의 접합은 맑스가 생각하듯이 결코 합리적이거나 기능적이지 않으며, 항상 역사적 세력관계에 의존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계급적 갈등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생산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듦으로써 (민주정을 포함한) 모든 정체/국가를 영속적으로 민주화하는 것 또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해) 민주주의를 무한정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역으로 시민권은 항상 아직 미완의 것으로 남게 되며, 역사적 투쟁의 결과를 반영하면서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전진과 후퇴 뿐 아니라 질적 변형들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사고될 수 있다. 실제로 시민권은 근대 역사를 통해 정치적 권리(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적 권리(노동권을 비롯한)를 그 속에 포함하는 것으로 변화해 왔으며, 지금 다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진행 속에서, 향방을 쉽게 점칠 수 없는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발리바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지난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진보운동들이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분열로 인해 겪어온 부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권의 언어를 (특히 민중운동진영이) 급진적으로 재전유함으로써 그 양자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여겨진다.
비폭력과 대항폭력의 이항대립을 넘어
국가나 지배자들의 폭력에 저항하는 실천들은 이제까지 (적어도 표면적으로) 두 개의 거대한 입장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해 왔는데, 그 하나가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의 입장이라고 한다면(이는 모든 폭력을 종식시키는 폭력이라는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인 정식화에서 절정에 달한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폭력은 어느 쪽에서 사용하든 그 자체로 부당하며 따라서 단순하게 거부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비폭력(non-violence)의 입장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폭력에 관해 ‘전부 아니면 전무’를 주장하는 이러한 이항대립을 해체하면서 제3의 입장을 제안하는데, 그것이 바로 반폭력(anti-violence)의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권력과 폭력에 저항하는 투쟁 속에서 모든 종류의 폭력을 기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장해제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극단적 폭력’(그것이 권력의 것이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것이든 간에)을 제어하거나 제한함으로써 정치의 공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는 문제설정이다. 이러한 발리바르의 입장은 이미 90년대 말부터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지금껏 국내의 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면이 많고(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종종 대항폭력과 비폭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속에서 다시금 분해되는 양상을 보여 왔던 것 같다. 그것은 기껏해야 법리적인 논리에서 발견되는 ‘정당방위’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되면서, 대항폭력적 행위를 어떤 경우에 제한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법적, 도덕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 환원되어왔다. 여기서는 발리바르가 논하는 반폭력의 정치의 모든 면을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이 어떤 면에서 대항폭력과 비폭력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데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전쟁(및 내전), 계급투쟁, 정치가 맺는 관계에 대해 맑스주의가 사고한 바를 추적하면서 그 안에서 (대항폭력이 아닌) 반폭력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검토하는 발리바르의 논의(특히 「전쟁과 맑스주의」에서 전개된 논의)를 간략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맑스(그리고 엥겔스)의 1848년 텍스트인 『공산주의 선언』은 계급투쟁을, 비가시적이고 잠재적인 전쟁상태에서 가시적이고 공개적인 전쟁상태로, 그리고 마침내 부르주아지의 폭력적인 전복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행하는 내전과 등치시킨다.
『선언』은 모든 계급투쟁을 “정치적 투쟁”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모순적으로 “정치의 종언”(정치 영역의 소멸)이라는 종말론적 전망 속에 기입함으로써 계급투쟁이나 혁명을 궁극적으로 비정치적인 것으로 표상하는데, 이러한 맑스의 사고야말로 그 이후 혁명적 대항폭력을 정당화하는 담론들이 주로 준거하는 것으로 그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그것은 1918~21년의 레닌에게서 다시 부활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구사회와 신사회 간의 목숨을 건 투쟁의 장기이행으로 규정하는 데에 활용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비국가, 비정치로 표상되듯이, 여기서 이행기의 계급전쟁은 비전쟁으로 표상되는데, 정작 맑스 자신은 1848년 이후 수차례에 걸쳐 일어난 실제 내전을 경험하면서 이러한 종말목적론적인 치환의 도식을 일단 기각하고 정치경제학 비판의 작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1914~17년의 레닌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쟁과 정치, 그리고 계급투쟁을 접합시키는 놀라운 인식과 실천을 전개한 바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반전투쟁이 실패로 돌아가 조직이 와해된 상태에서 레닌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의 연구에 몰두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하라’는 제2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마침내 찾아내는데, 그것은 바로 제국주의 전쟁이 장기간에 걸쳐 진행될 경우 그것이 불러올 끔찍함의 경험에서 비롯될 정치적 결과를 계산함으로써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레닌은, 전쟁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전쟁이 진행될수록 거기에 동원된 인민대중들은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전쟁초기와 달리 점점 더 극심한 피로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따라서 국민군대 그 자체에 사회주의자들이 침투하여 불만에 찬 대중을 조직하고 그들을 국가에 대한 반대세력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한 것이다. 이는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방어전쟁의 내부로부터 준비되는 반격’이라는 도식을 완전히 독창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레닌은 그 논리적 필연성을 ‘절대전쟁(또는 제한 없는 전쟁)은 시간 속에서 유지 불가능한 것으로 된다’는 사실로부터 이끌어냈다. 레닌은 바로 이러한 실천을 통해 제국주의전쟁이라는 극단적 폭력을 멈추고 정치의 공간을 다시 열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레닌만이 유일하게 이 일에 성공했다).
다른 한편 마오쩌뚱은 전쟁과 정치를 명확히 관련시키는 클라우제비츠의 테제, 곧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라는 테제를 완벽하게 복원해내면서도 그것을 ‘대중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클라우제비츠식 정치 개념과는 매우 다르게 변형하는 데에 성공하는데, 이는 바로 “파르티잔의 장기전(protracted war of partisans)”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가공함으로써 달성된다. 마오의 핵심적인 생각은, 제국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지배계급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은 그렇지 못하다는 최초의 상황에 의해 후자에게 강제되는 방어 전략이 종국에 가서는 오히려 역전되어 ‘약자들’의 손에 의한 ‘강자들’의 실제적 파괴를 이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 때 장기간 지속되는 전쟁 기간은 농민대중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피난처를 구했던 혁명적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세포핵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시간을 의미했으며, 이는 이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삼중의 결과를 동시에 달성하도록 허락했다. 먼저 그것은 이들이 침략군의 분견대와 국지적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로 스스로를 무장할 수 있게 허용할 것이고, 둘째, 전쟁 무대를 전국적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이들이 전쟁의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셋째, 그것은 인민 안에 있는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적들로부터 분리하여 피지배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는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도록 헤게모니를 이동시킬 것이다.
이러한 레닌과 마오의 실천에서 공히 드러나는 것은 우선 전쟁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 속에 대중들이 들어와 있는) ‘과정’으로 사고했다는 것이다. 비폭력과 대항폭력의 논리는 주로 폭력이 행사되는 사건 또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서, 적대하고 있는 상대편이 살인적 폭력을 가해올 때 거기에 대해 총을 쏴서라도 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논의가 조직되지만(이러한 차원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폭력은 부당하지만 정당방위에 사용된 폭력은 예외적으로 정당하다는 것, 아니면 정당방위를 위해서도 폭력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발리바르가 분석하는 레닌과 마오의 사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오히려 폭력이 하나의 과정이며 따라서 최초의 세력관계는 시간 속에서 변증법적인 전도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고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실 극단적 폭력을 동원한 지배계급의 공격에 대한 방어 전쟁이 성공한 사례들은 대부분 무대의 중앙을 단번에 장악했던 사례가 아니라 대중 속으로 숨어 들어가 그 속에서 작업하는 지난한 게릴라전의 형태(물론 이 형태는 조건에 따라 변형 가능하다)를 띠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리 코뮌의 경우(또 우리의 광주항쟁의 경우)는 오히려 이러한 과정의 조직화 없이 막 바로 무대 중앙을 장악하려고 했기 때문에 비극적으로 실패한 사례가 아니었을까? 물론 상황이나 정세는 언제나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성을 우리가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맑스 자신도 파리 코뮌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것을 무리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반대했지만, 봉기가 막상 일어나자 그것을 옹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실천에 뛰어들었고, 그 실패의 비극적 결과를 감당하지 못해 노년에 우울증을 앓으며 느린 죽음(slow death)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레닌이 1917년 혁명 이후 다시 「공산주의 선언」의 폭력에 대한 종말론적 도식으로 복귀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또 마오가 혁명 이후 민족주의, 국가주의, 관료주의(이른바 ‘국가-당’)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과정으로서의 방어전쟁의 변증법이라는 관점도 그 전쟁을 지도하는 인민의 내재적 권력(곧 혁명정당)이 결정적으로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국가가 되어야만 한다는 곤란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은 권력 장악을 자제하는 것에서 찾아질 수 있지만, 그것은 발리바르에 따르면 주체가 주권의 편과 봉기의 편 사이에서 영속적으로 동요하는 분열된 주체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곤란으로 이어진다(물론 이 방법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인민의 저항을 국가권력장악의 기획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려고 했던 멕시코의 사바티스타라는 실제 사례가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반폭력의 정치는 자신의 아포리아들을 해결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맑스주의 내에서 전개된 폭력에 대한 사유를 분석함으로써 이 문제가 어떤 방향에서 계속 고민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지시해주고 있다. 특히 (주권자에 의한 ‘예외상태’를 창출함으로써 인민 또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예방적 대항-혁명’을 추구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칼 슈미트적 개념과 대립하는 그람시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고, 곧 기동전에 대한 진지전의 우위라는 사고는 우리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는데, 왜냐하면 진지전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예외상태에 비견되는) 기동전에서의 승리를 준비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배계급의 폭력의 도착을 제어할 수 있는 헤게모니적 대항권력을 대중 속에서 구축해 내고, 또 이를 통해 기동전이라는 내전이 발발했을 때조차 그 속으로 ‘전쟁’이 아닌 ‘정치’를 다시 도입할 수 있는 대중적 역량을 축적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에 대한 발리바르의 제언은 우리가 정치적 실천들을 조직할 때 부딪히곤 하는 폭력의 딜레마들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길들을 알려주고 있다.
부상하는 네오파시즘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지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다시 꺼내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망설이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자체가 민주주의를 극단적으로 파괴해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전혀 떨어질 기색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 인종주의적이고 여성혐오적이며 소수자들에게 공격적인 극우 논리로(그리고 행동으로) 전에 없이 청년 대중들을 동원하는 일베와 같은 현상은 확실히 어떤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너무 성급하게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꺼내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 우리는 발리바르가 프랑스의 국민전선 및 그 지지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확고한 상황도 존재하지만, 특히 이행적인 상황들도 존재한다. 누구도 본성상 파시스트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마치 그것이 본질적인 것처럼―누가 파시스트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누가 파시스트가 되는가 또는 특히 누가 파시스트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파시즘으로 나아가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발리바르의 이러한 경고가 (프랑스나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일반적 사정을 가지고 있는 까닭은 바로 네오파시즘의 부상이라는 작금의 현상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초민족적 자본들이 민족국가들의 통제를 벗어나 활동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초민족적인 기관들(IMF, 세계은행 따위) 및 그 테크노크라트들을 통해 관철시키게 되자 이는 두 가지 무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왔다. 그 중 하나는 시장의 발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프롤레티리아화(곧 불안정 노동자화)에 대해 종래의 민주적 조직을 통해서 아무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대중의 무능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회재생산의 새로운 틀에 맞게 규제도구를 작동시키지 못하는 (민족)국가들의 무능력(지배계급의 무능력)이다. 발리바르는 이 두 가지 무능력의 폭발적 결합이야말로 불안전증후군을 만들어내면서 현재의 상황을 위험스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이는 레닌이 말했던 혁명적 상황에 대한 규정과 정확히 반대의 것을 이루기 때문이다. 레닌은 혁명적 상황을 가리켜 “위쪽의 사람들이 더는 통치할 수 없고, 아래쪽의 사람들은 더는 이전과 같이 통치되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현재의 상황은 위쪽의 사람들은 이전처럼 통치할 수밖에 없고, 아래쪽 사람들은 더는 이전처럼 저항하거나 싸울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시민들에 대해서 무한히 강력한 존재로 군림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초과하는 초민족적 자본의 권력(시민들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실제 권력)에 의해 무기력화 되어 있는 상황이며, 동시에 시민들은 자신의 정치 행위가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다시 말해서 경쟁하는 정치세력 가운데 어느 쪽에 투표를 해도 뚜렷한 정책적 차이를 가져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따라서 정확히 권력의 공백이라는 상황인데, 발리바르는 “정치에서 공백에 대한 집합적 불안”이야말로 “파멸적”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무기력에 더해지는 국가의 무기력이라는 이중의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시민들은 자신들이 희생자나 전형적인 불쌍한 사람들의 편에 서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모종의 타자를 그러한 희생자의 자리에 세우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불안감을 씻으려고 든다. 그러한 희생자의 자리에 어떤 타자가 들어오는가는 선험적으로 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 종북 세력이거나 전라도 출신일 수 있고, 내일 여성일 수 있다면 그 다음날에는 동성애자들이거나 이주자들(외국인들)일 수 있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율도 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는 것 같은데, 왜냐하면 박대통령이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텅 빈 공백으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대중들은 그 공백을 어떻게 해서든 가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배경으로 부상하는 네오파시즘에 대해 어떻게 맞설 것인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의 국제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는 더욱 더 곤혹스러운 질문이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발리바르가 제안하는 관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씨테에 대한 권리(droit de cité)”이다. 지면 관계 상 여기서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정치체이자 영토인) 씨테에 대한 권리―또는 권리들을 가지고 입국하여 머물 수 있는 권리―는 민족국가들의 경계선(곧 국경)을 철폐하자는 것이 아니라(만일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대중들의 불안은 훨씬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질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민주화하자는 것으로, 그것은 자본의 초민족적인 운동을 통제하기 위한 대중들의 연대를 지역적 차원으로부터 민족적 차원, 그리고 초민족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사람들이 어느 곳에 있든 간에(곧 외국에 있든 본국에 있든 간에) 그들의 민족적 소속과 관계없이 누려야 마땅한 기본권을 각각의 지역에서 서로를 마주치는 사람들의 협상을 통해 스스로 규정하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이동만큼이나 인간의 이동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만 불안전 속에 놓여 있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동일성에 한사코 매달리는 것을 멈추고 복수의 동일성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낼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국제주의를 통해서 네오파시즘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열어내자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