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테제와 맑스주의의 위기
이 글은 2008년에 있었던 '사회진보연대'에서의 논쟁에서 제가 썼던 글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래 올렸던 발리바르의 인터뷰와 함께 읽어보실 만한 글입니다.
4월 테제와 맑스주의의 위기
- 임필수 씨에게 답함 -
임필수 씨는 <최원 씨 게시판 글의 문제점>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러시아혁명에서 레닌의 혁명적 기여는 바로 <4월 테제>였다. (이는 <국가와 혁명>으로 이론화된다.) <4월 테제>는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볼세비키 일부에 반대하여 이중권력 상황에서 소비에트(평의회)와 공장위원회를 지지함으로써 혁명운동의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다. (“코뮨의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주장은 농노해방이 시기상조라는 농노소유자들의 주장과 같다.”) 그러나 훗날 레닌과 볼세비키는 소비에트를 당에 종속시키고, 공장위원회의 권력을 점진적으로 제한하면서 엄격한 생산관리라는 관점에서 노동조합을 통한 국가의 노동력관리라는 접근법에 가까워지면서, 노동자 자주관리의 이상과 멀어져갔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레닌이 4월 테제로부터 멀어져 가면서 혁명운동이 약화되고, 결국 ‘레닌주의’라는 이름의 스탈린주의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좌익적 비판이다. 문제가 이러한데, 마치 레닌의 4월테제가 무정부주의였고, 그것이 가장 문제였다는 식의 주장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비판적 재인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엉뚱하다 못해 심난하게 황당한 주장이다.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의 혁명적 기여가 <4월 테제>였다는 것은 나로서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임필수씨가 러시아혁명의 실패 이유를 레닌과 볼세비키가 <4월 테제>에서 멀어져 간 데에서, 즉 ‘소비에트를 당에 종속’시키고 ‘노동자 자주관리의 이상과 멀어져’ 간 데에서 찾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질문이 빠져있다. 왜 <4월 테제>를 쓴 레닌은 그렇게 자신의 입장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는가? 왜 평의회는 당 또는 국가(또는 당-국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는가? 레닌의 불철저함이나 실수 때문이었는가? 레닌이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스탈린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다른 실패들은 어떠한가? 사실 모택동의 문화 대혁명도 평의회 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고, 그것도 중국 공산당을 (임필수씨가 말하듯이 “사령부를 포격하라!”고 외치며) 겨냥한 강력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최종적으로 당-국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왜?
이에 대해 평의회 운동이 당-국가에 종속되었으므로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보다시피 동어반복일 뿐이다. 이는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설명에의 시도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봐야한다. 이런 식으로 혁명 실패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은(설명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당에 종속되지 않은, 국가에 종속되지 않은, 당-국가에 더욱 철저히 대립하는 평의회 운동의 ‘순수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불모적 답변으로 이어질 뿐이고, 이러한 답변은 사실 질문 자체에서 이미 예상된 허구적 답변만을 반복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확히 이데올로기적 봉합으로 기능한다.
<4월 테제>를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거기에는 ‘소비에트가 혁명정부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는 주장과 나란히, ‘소비에트 내에서 볼세비키는 여전히 다수파가 아니며 대중은 아직 혁명이 요청하는 정치의식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볼세비키는 대중이 역사적 경험을 통해 스스로 이 수준에 도달하도록 소비에트 안에서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펼쳐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볼세비즘 또는 전위주의는 <4월 테제>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평의회로의 권력이양의 주장과 함께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 임필수 씨는 ‘그것이 레닌의 잘못이었으며, 이 결점을 (모든 종류의 의식성에 반대하고 완전한 노동대중의 자생성에 입각하여 혁명운동을 사고하려고 한) 판네쿠크로 보완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즉 그는 방금 전에 내가 말한 이데올로기적 봉합을 시도하면서, ‘평의회 운동의 당으로부터의 더 많은 순수성을 회복하라’는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닌은 그렇게 나이브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이 점이 바로 레닌의 <4월 테제>의 혁명적 기여다. 레닌은 정확히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4월 테제>에서 볼세비즘과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양의 주장은 하나의 필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일종의 ‘이율배반’과 같은 것이 여기에서 작동하고 있는데, 완전히 대립되는 두 가지가 둘 다 틀리거나 둘 다 맞을 수는 있지만, 둘 중 하나만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 될 수 없다. 후진적 대중의 자생성만으로도 혁명에 미달하고, 전위의 의식성만으로도 혁명에 미달한다. 만일 이 둘 중 하나만으로 성공적 혁명을 우리가 달성할 수 있다면, 맑스주의의 위기라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거대한 조크(joke)가 될 것인가? <4월 테제>를 반으로 자르고 좋은 반쪽만 우리가 가져올 수 있다면, 우리는 마침내 혁명 성공의 (‘사실적’은 아니라고 해도) ‘논리적 보증’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다시는 맑스주의의 위기 따위로 골머리를 썩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1970년대 말에 ‘맑스주의의 위기’가 최종적이며 총체적인 위기라고 말했던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20세기에 가장 실없는 말을 했던 맑스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4월 테제>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 해보자. 왜 우리가 <4월 테제>의 좋은 반쪽만을 취해올 수 없는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설명해보자. <4월 테제>는 혁명이 요청하는 정치의식의 수준에 대중이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그것의 지표를 볼세비키가 소비에트 안에서 다수파가 아니라는 데에서 발견한다. 즉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분파들의 실존이다. 볼세비키 내의 분파들이 아니라, 당 내의 분파들이 아니라, 소비에트 내의 분파들, 또는 대중 내의 분파들 말이다. 문제는 이 분파들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혁명적 주체가 현실적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4월 테제>가 강조하는 볼세비키의 임무는 바로 소비에트 내에서 타 분파들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대중 앞에 폭로함으로써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과연 볼세비키만이 정말 그 당시 혁명적이었을까?’가 아니다. 그 질문은 흥미롭지만, 그 보다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즉, 대중은 자생적으로 다양한 분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볼세비즘 없이 어떻게 이 분파들을 극복하고 그들을 하나의 단일한 혁명적 주체로 통일-구성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거대한 딜레마에 대해서 평의회주의는 결코 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평의회주의는 대중은 자생적으로 혁명적임을, 대중은 이미 혁명적 주체임을 가정하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을 평의회주의는 자신의 전제로 만들고 출발한다.
다시 한 번 묻자. <4월 테제>는 왜 스스로를 배반했는가? 왜 레닌은 자신의 <테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 이것이 적어도 가능한 진정한 설명이다 - 대중이 혁명적 주체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은 (볼세비키들의 활동 자체를 포함하여) 오직 정세의 효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대중들은, 오직 정세적으로만 분파를 극복하고 하나의 단일한 ‘혁명적 주체’가 될 수 있을 뿐이며, 이 때문에 대중은 결코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의 주체’로서만 출현할 수 있다.
맑스가 말했듯이, 혁명적 정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차이를 잊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헤겔의 테제, ‘내가 곧 우리고 우리가 곧 나다’를 원용하여 다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지나가는 김에, 이 테제에 대한 윤소영교수의 해석은 완전히 잘못됐다는 점을 지적하자). 즉 그 테제는 혁명적 정세 속에서 대중이 수행적으로 주체로 구성되는 순간, 분파들 간의 입장차가 갑자기 더 이상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 순간, 양립불가능한 다양한 입장을 가진 자들이 하나로 모이는 순간, 심지어 그들이 자신의 입장과 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무정부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하질 않나 국가주의자들이 평의회적 실천을 하질 않나 하는 바로 그 순간을 가리킨다. 나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사라져버리는 시간. 즉 “절대적 공동체”의 시간, 혁명의 시간, 그것이 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혁명의 시간은 안타깝게도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떠난다. 혁명을, 돌이킬 수 없이, 떠난다. 그리고 정세와 함께, 정세 속에서만 주체가 될 수 있는 혁명적 대중도 떠난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다.
<4월 테제>는 왜 스스로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는가?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혁명에 안 좋은 내외의 조건들...그러나 더욱 근원적으로, 더욱 이론적으로, 그것은 대중들이 다시 분파들로 갈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포스트-혁명의 시간에, 어떻게 혁명적 주체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평의회주의자들은 정세의 효과로서 나타나는 혁명적 주체로서의 대중을 언제나 존재해온/존재할 역사의 주체로 착각한다. 레닌은 정세의 효과로서 나타나는 혁명적 주체로서의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영속화시키기 위해, 장치들을 동원해 대중들을 제약하고 종속시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러시아 혁명에서만 일어났던 일일까? 사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반복적으로(물론 상이한 조건 하에서지만) 보아왔던 일이 아닌가? 비근한 예로 우리는 전노협이 민주노총으로, 그리고 심지어 지금과 같은 나락으로 떨어져온 과정을 들 수 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이러저러한 사람들을, 이러저러한 분파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혁명적 주체의 분열이란 그 자체 완전히 필연적인 포스트-혁명적 과정의 물질적 전개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대중들의 피로도가 증가하고, 대중들 자체 내에서의 갈등들이 재등장하면, 그들은 분파들로 분열하여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심지어 피를 동반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했던 분파가 개량화되거나 또는 기득권을 쥔 집단으로 변질되고,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이름 자체를 이제 누군가가 차지해버렸기 때문에, 즉 그것이 하나의 ‘지배적 동일성’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그 이름조차 붙여줄 수 없는, 어떻게 이름 붙여야 좋을지 알지 못할, 또 다른 “몫이 없는 자들”의 등장이 이어진다(문화대혁명에 적극 참여한 세력은 심지어 전(前)부르주아지들의 자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혁명을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 대중정치를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
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가 고전적 맑스주의의 틀 내에서는 좀처럼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70년대 말 맑스주의의 위기, 그것도 총체적인 마지막 위기를 선언했다(양자의 차이점은 이 위기를 사고한 방식에 있었고 나는 ‘역자해제’에서 그 점을 문제 삼았지만, 이 점은 일단 차치해 두자). 이 위기가 총체적인 마지막 위기라는 것은 맑스주의가 해체/전화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알튀세르 자신이 말했듯이 심지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까지 변화하지 않는다면,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사실 많이 아팠고, 이 작업을 책임질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이미 그는 70년대 초 마슈레에게 그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고 고백했으며 알다시피 80년에 그는 자신의 아내를 비극적으로 교살함으로써 사회적 발언권을 모두 빼앗긴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작업을 지금까지 해온 것은 발리바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네 번째 공산주의를 사고하기 위해 투여된 그의 이론적 노고가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이러한 의미에서의 네 번째 공산주의는 우리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까지 변한 것이어야 한다. 임필수 씨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임필수 씨와 또 다른 사람들은 자꾸 과거로 돌아간다. 최원 씨는 왜 과거의 모든(sic!) 맑스주의를 해체하려고 하냐고 말하면서 그들은 자꾸 자신들이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돌아가려한다. 알아볼 수 있는 것 가운데 어떤 좋은 것으로. 과거의 어떤 아직 유효한 것으로. <4월 테제>의 그 좋은 반쪽으로.
(쓸 데 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마디 해두자. 나는 ‘모든 맑스주의를 해체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해본 적이 없다. 반대로 나는 맑스의 역사과학 안에는 여전히 해체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 “계급 적대”라는 개념,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개념 등이다. 그러나 나는 이 과학적 개념들을 역사과학 자체 안에서 에워싸고 있는 형이상학적 전제들과 관념들, 특히 사회와 국가의 대당에 기초한 관념들은 모조리 해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맑스주의의 해체라면, 그렇다, 나는 그것을 주장했다.)
어쨌든, 임필수 씨가 과거의 어떤 좋은 것, 어떤 유효한 것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볼 때, 내가 떠올리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윤소영 교수에게서 내가 아주 오래 전에 배운 어떤 이론적 교훈이다. 아직 내가 윤소영 교수를 (나 혼자서지만) 나의 “선생”이라고 생각했을 때 읽은 구절이다. 16년 전에....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응하는 세 번째 잘못된 태도는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간주하면서, 지금까지의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하거나 자신의 이론적 전통만은 ‘위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태도들,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체계’ 속에서 죽은 것과 산 것, 낡은 것과 현재적인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구분하여 사회적 현실의 변화에 따라 역사적 시효를 다한 죽은 것, 낡은 것을 버림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순화하거나 다시 ‘체계화’하려는 태도.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이론적으로 반성하고자 할 때 흔히 드러나는 이러한 태도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실천의 ‘융합’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역사적, 모순적 구성물’임을 보지 않는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전화(transformation)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윤소영, “알튀세르를 다시 읽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다시 생각한다”, [이론] 1호, 43-44쪽, 강조는 인용자)
맑스주의 이론과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실천의 융합의 모순! 이는 바로 <4월 테제>의 바로 그 모순, 그 이율배반이 아닌가! 의식성과 자생성, 이론과 실천! 그것 가운데 좋은 반쪽, 아직 시효 지나지 않은 반쪽을 택함으로써 맑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것은 16년전 윤소영 교수 자신이었다.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지금, ‘평의회맑스주의’를 주장하는 그는 전진했는가, 아니면 후퇴했는가? 그는 맑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했는가(돌파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앞에서 뒷걸음질 쳤는가?
사실 윤소영 교수의 저 구절은 발리바르의 텍스트의 일부를 가지고 오면서 그가 약간의 해설을 가한 것이다. 발리바르의 본래 텍스트로 가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함께 읽을 수 있다.
다른 한 편 우리는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조우와 조합을 부단히 표징하는 비상한 양면성을 재는 데 매여 있다. 노동자운동에 대한 맑스주의의 관계는 ... 노동자운동에 부여된 하나의 경향이 아니라 서로 대립하는 극단의 쌍들을, 요컨대 노동자운동의 ‘이율배반’을 항상 표현한 그러한 요소를 구성하였다. 그 대립쌍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당 형태의 ‘제국주의’, 그러나 또한 당형태에 대한 ‘조합적’, 자주관리적 또는 ‘평의회주의적’ 대안; 개량주의적 내지 선거주의적 진화주의와 혁명적 주의주의; 민족주의 더욱이 사회-민족주의와 국제주의 또는 반식민주의; ‘국가숭배’(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의 지도자[수령]에 대한 숭배)와 ‘대중노선’에 다소간 깊이 연계된 반국가주의(또한 오직 그것만이 진정 역사를 ‘만든다’는 ‘대중의 자연발생성’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숭배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이러한 조건들 속에서(이 테제를 자신의 편의대로 해설하는 일은 각자에게 맡기기로 하자) 맑스주의가, 또는 적어도 맑스주의에 의해 의미부여된 정치적 담론과 실천이 한 세기 동안 극히 모순적인, 곧 혁명적이고 반혁명적인 효과를 산출해 왔다는 점에, 그리고 오늘날 아직도 이 모순이 맑스주의가 세계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특징적이라는 점에 놀랄 필요가 있을까?
(발리바르, [역사유물론의 전화], 민맥, 213쪽, 강조는 인용자)
“오늘날 아직도”! 이러한 모순에 대한 논쟁과 고민은 ‘후위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이 모순은 맑스주의의 위기의 중핵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윤소영 교수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와서 이 맑스주의의 위기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길 진심으로 바란다.
나에게 분명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맑스주의를 관통하는 서로 대립하는 극단의 쌍들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함으로써 우리가 맞닥뜨린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는 이제 대중정치를 더욱 더 복잡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의회라는 조직 형태는 아마도 혁명적 정세 속에서 어떤 제한된 유효성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대안사회에서의 제도들의 조직 및 국가장치의 구성이라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우선 우리는 발리바르가 말하듯이, ‘봉기’와 ‘직접민주주의적 제도형태’를 상대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전자가 대중의 봉기적 행위, 실천으로서의 ‘정치’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라면, 후자는 여전히 제도적인 것으로서 ‘정치적인 것’ 속에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평의회라는 조직형태는 ‘봉기’를 ‘구성’으로 전환시키는 여러 제도형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도 가장 효과적인 것은 분명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평의회라는 직접민주주의적 제도 형태는 구성된-통일된 주체의 자율성과 자기동일성을 긍정(confirm)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러한 동일성을 이질적인 차이들에 개방하는 역할을 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즉 그것은 ‘정치의 타율성’과 특히 ‘타율성의 타율성’을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다).
전에도 지적했듯이, 발리바르가 ‘직접민주주의를 기본으로 대의제민주주의를 활용하자’고 하지 않고 반대로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활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대의(representation)’의 핵심은 사회의 이러저러한 부분들의 정당한 몫을 대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계를 넘어서는 갈등, 즉 (봉기를 넘어서) 다시금 생겨나는 “몫이 없는 자들”을 대의하는 것에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대의를 위한 효과적인 제도 형태와 국가장치의 구성이라는 문제를 마키아벨리의 정리를 이용하여 ‘갈등적 민주주의’라는 관념을 통해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은 그가 시도하는 해방의 정치와 시민인륜의 정치의 결합의 최대 쟁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대중들의 공포]의 ‘역자해제’를 참조하라).
발리바르의 ‘이론적 무정부주의’ 비판은 이러한 고민들의 진정한 출발점을 이룬다. 임필수씨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왜 발리바르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의 입장을 모두 ‘이론적 무정부주의’로 규정짓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에 고질적인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당(opposition)에 대한 비판이 발리바르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가는 정확히 맑스주의의 이론적 공백으로 남았으며(보비오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당황했던 맑스주의자들을 기억하는가), 사회운동과 대중운동은 맑스주의에 의해 언제나 국가 바깥에서, 외재적인 방식으로, 사고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인데, 왜냐하면 (80년대의) 발리바르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의미를 ‘국가와 노동과정의 단락’을 통해 규명하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서 신념과 교통의 체계라는 (경제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정치의 토대와 함께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주지하다시피 맑스에 스피노자를 결합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여기다).
사람들은 곧바로 이렇게 물어올 것이다. ‘아마도... 그러나 알튀세르는 정확히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을 사고하지 않았던가? 왜 알튀세르마저 이론적 무정부주의자로 규정하는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그 장치들에 대한 사고를 전면화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여전히 이데올로기를 경제적인 것 속에 그것의 기능들 중 하나로 기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재생산), 더 나아가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메커니즘에 대한 고전적 맑스주의의 이해와 분명히 단절하지 못했다. 알튀세르가 지배(국가)와 피지배(대중/사회운동)의 관계를 매우 외재적인 방식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알튀세르의 사고 속에 있던 이러한 모순들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고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내재적 변증법을 정식화한 것(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들의 것이라는 테제로 집약되는)은 주지하다시피 발리바르다. 발리바르의 ‘이론적 무정부주의’ 비판은 따라서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 또는 비판의 비판의 문제설정의 잠정적인 귀결점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것은 사회운동(또는 대중운동)과 국가(적 제도)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서도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2008년 4월 27일
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