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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범죄적 주체 분석: 인간만이 범죄를 저지른다

marxpino 2020. 3. 22. 11:46

라캉의 범죄적 주체 분석: 인간만이 범죄를 저지른다

 

 

 

최원 (단국대)

 

 

* 이 논문은 <시대와 철학> 2020년 봄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여기 공개하는 판본은 편집 이전의 것이므로 인용이나 논의를 불허합니다.

 

 

 

1. 들어가며

 

 

인간만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말은 일견 뻔한 말(truism)처럼 보인다. 지켜야할 법을 가지고 있는 존재인 인간만이 그 법을 위반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이른바 “천인공로 할 범죄”를 마주할 때,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두 가지 상반된 태도 사이에서 혹자는 모종의 타협을 시도하며,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 이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동물 이상으로서의 인간이 자신 안에 잔존해 있는 동물성에서 기원하는 죄악을 몰아내기 위해, 스스로를 배에 묶는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을 구속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명백히 이는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인간만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훨씬 더 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곧 고유한 의미에서의 범죄는 인간적인 것이며 이른바 “동물적 본능”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의미로.

 

성 바울(Saint Paul)이 “법이 죄를 만든다(The law makes the sin)”고 말했을 때 이 말은 일차적으로 어떤 행동이 죄가 되는 것은 오직 법의 결정을 통해서일 뿐이라는 앞서 살펴본 형식적 의미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주1) 사실 나는 바울이 이 정확한 문구를 말했는지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이는 바울의 정식이다. Jacques Lacan, “Introduction théorique aux fonctions de la psychanalyse en criminologie”, Écrits: Nouvelle édition vol I, Seuil, 1999, 125; 자크 라캉, 「범죄학에서의 정신분석의 기능에 관한 이론적 입문」, 『에크리』, 홍준기 외 옮김, 새물결, 2019, 150. 앞으로 라캉의 『에크리』에서 인용 시 본문에 괄호를 삽입하여, 불어 새 편집본(Écrits: Nouvelle édition) 1권은 Ei, 2권은 Eii로 표시하고 그 쪽수를 적은 뒤, 다시 세미콜론을 찍고 국역본 쪽수를 병기한다. 하지만 국역본의 번역들은 대부분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같은 행위도 그것을 금하는 법이 있을 때에만 죄가 된다. “저는  ‘탐욕하지 말라’고 법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탐욕이 죄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로마서 7:7) 그러나 동시에 바울의 말은 이런 단순한 의미를 넘어가는데, 왜냐하면 바울은 법 그 자체가 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떤 행동을 죄로 규정함으로써 오히려 주체에게 그 죄를 짓도록 유혹할 수 있는 권세를 죄에 부여하는 것이 다름 아닌 법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는 [탐욕하지 말라는] 이 명령을 이용하여 내 안에 온갖 종류의 탐욕의 욕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만일 법이 없다면, 죄는 그런 권세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로마서 7:8) 따라서 바울의 관점에서 법은 죄에 대해,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이 “이중구속”이라고 불렀던 관계를 맺는다. 법은 죄를 짓지 말라는 바로 그 금지의 명령을 통해 죄가 주체를 유혹하는 것을 허락하고, 심지어 거기에 힘을 실어준다. 사실 법이 죄와 맺는 이런 이중구속의 관계는 정신분석에서 개념화된 초자아(surmoi)의 명령의 근본 속성을 이룬다. “너는 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정말로 아버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1950년 5월에 “프랑스어권 정신분석”이라는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범죄학에서의 정신분석의 기능들에 대한 이론적 소개」(이하 「범죄학」)라는 글에서 “법이 죄를 만든다”는 바울의 문구가 “은총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 밖에서 여전히 진실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Ei 125; 150). 그러면서 라캉은 범죄와 법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만드는 “처벌”이라는 세 번째 항을 추가하고, 사회가 처벌을 가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동의”가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세 번째 항으로서의 처벌은 따라서 주체의 “책임”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주체가 책임진다는 것은 범죄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 결과 주어지는 처벌(몇몇 문화권에서는 주체가 직접 자기 자신에게 가하도록 만드는 처벌)을 받기로 동의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동의”, 곧 범죄에 대한 주체의 “고백”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고백에 기초한 처벌을 통해 그를 공동체로 재통합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는 한에서, 라캉은 대화치료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정신분석이 범죄학의 대상을 이루는 진실 찾기(범죄의 진실 뿐 아니라 범죄자의 진실 찾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기여는 한계 없는 것은 아니다. 라캉은 정신분석이 제한 없이 다룰 수 있는 범죄의 카테고리를 “오이디푸스성(œdipisme)”에 속하는 범죄들로 한정하고자 할 뿐 아니라(Ei 134~35; 160), 또한 주체의 범죄적 “성향”에 대한 정신분석이 “과학적 객관화”의 수준(바꿔 말해서, 필연성과 예상가능성의 수준)에 이를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Ei 148; 175).

 

이 글에서 우리는 먼저 “법이 죄를 만든다”는 바울적 테마를 초자아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해석하는 라캉의 독특한 관점을 살펴볼 것이다. 라캉은 상상적 시기로서의 거울단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공격성(aggressivité)이 욕망의 변증법 속에서 극단화되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오이디푸스적 범죄성을 해명한다. 우리는 라캉의 이런 설명을 구체화하기 위해 거기에 린 램지(Lynne Ramsay) 감독의 2011년 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를 관련시켜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라캉이 이런 공격성 및 범죄성에 대해 어떤 치유적 개입을 제안하는지 살펴보고, 또 그것을 간단히 평가해보고자 한다.

 

 

 

2. 초자아와 법의 역설적 관계

 

 

「범죄학」에서 라캉이 대상으로 삼는 범죄는 “초자아의 상징성“을 표현하는 범죄로서, 주체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도록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강제”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들이다.

 

(주2) 따라서 예컨대 단지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는 장 발장적 행위는 라캉이 다루는 범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라캉이 드는 몇몇 사례는 정신분석학을 범죄학에 도입한 프란즈 알렉산더(Franz Alexander)와 휴고 스톱(Hugo Staub)의 선행연구에 등장하는 “신경증자의 살인 시도”, “베를린 경찰에 의해 투옥되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고 …… 학위를 따기보다는 법을 위반함으로써 도둑질을 하고자 했던 어느 의대생의 괴이한 도벽”, “자동차 여행에 사로잡혀 있는 자” 등이다(Ei 130; 155~56). 라캉에 따르면 이런 사례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주체가 그 처벌을 예상하고 심지어 추구한다는 점에서 주체의 “자기 처벌”(autopunition)이라는 성격, 곧 주체가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는 경로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주3) 사실 “자기 처벌의 편집증”이라는 임상적 범주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 바로 라캉이다. Dylan Evans, “Paranoia (paranoïa)”,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Routledge, 1997, 134를 보라.

 

죄책감이 법적 심급으로서의 초자아의 상관항인만큼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범죄(특히 반복적으로 저질러지는 범죄)는 “초자아의 상징성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초자아가 법적 심급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라캉의 논의를 매우 정교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라캉은 초자아를 “자연과 문화의 접점 …… 에서 우리가 발견한 이런 미지의 심급(instance obscure), 별이 빛나는 하늘의 변질될 수 없는 질서에 대한 맞짝으로 칸트의 사유가 상정한 순수 의무라는 이상의 이율배반으로 보이는 맹목적이고 폭군적인 심급”(Ei 136; 162)이라고 묘사한다. 유사한 시기(1948)에 씌어진 「정신분석에서의 공격성」(이하 「공격성」)이라는 논문에서도 라캉은 초자아를 “도덕적 양심의 정당화된 명령들의 뿌리에 놓여 있는 무분별한 압제, 격노의 정념”이라고 말한다(Ei 115; 140). 

 

그러나 곧바로 라캉은 억압(répression)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런 초자아의 기능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기능”과 대립시키는데, 후자의 기능은 정상상태에서 억압이 아닌 승화(sublimation)의 기능이고, “주체의 동일성의 개조 및 …… 부모 중 동일한 성별의 이마고의 입사(introjection)에 의한 두 번째 동일시” 형성의 기능이라고 규정한다(Ei 116; 140). 문제는 이런 두 번째 동일시는 상상적인 첫 번째 동일시와 달리 상징적 성격을 띠며, 부성적인 상징법의 정초로 귀결되는 것이라는 데에 있다(우리는 여기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라캉에게 있어서 법과 초자아의 관계를 좀 더 복잡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의 기술론』이라는 제하에 진행된 첫 번째 세미나(1953~54)에 제시된 라캉의 설명을 읽어보자.

 

 

초자아는 하나의 명령입니다. 상식과 통상적 용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초자아는 법이라는 영역과 개념, 다시 말해 언어 체계의 총체와 긴밀하게 연관[됩니다] …… 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과는 반대로, 우리는 초자아가 갖고 있는 무조건적 명령과 단순한 폭군이라는 무분별하며 맹목적인 성질 또한 강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이 두 개념을 종합할 수 있을까요? 초자아는 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은 법의 오인(la méconnaissance de la loi)이 되기에 이르는 무분별한 법(une loi insensée)이기도 합니다 …… 초자아는 법이자 동시에 법의 파괴입니다.

 

 

 

(주4) 자크 라캉, 『프로이트의 기술론』, 맹정현·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6, 187~88 (번역은 일부 수정, 강조는 인용자).

  

이렇게 초자아는 법이자 동시에 법의 파괴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그것이 법에 대한 오인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듬해에 진행된 두 번째 세미나에서도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초자아의] 검열은 담론 안에서 무엇이든 법에 연결되어 있는 것과 항상 관련됩니다. 법이 이해되지 않은 한에서 말입니다.”

 

(주5) Lacan, The Ego in Freud’s Theory and in the Technique of Psychoanalysis (Seminar Book II, 1954-1955), trans. Sylvana Tomaselli, Norton, 1988, 127 (강조는 인용자).

 

따라서 우리는 라캉의 이론 안에는 법에 대한 오해로서의 초자아의 ‘죄를 만드는 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와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죄를 만들지 않는 법’의 가능성 또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라캉의 사유 안에서 초자아는 어떻게 법과 이런 역설적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인지를 알아보자. 이를 위해서 우리는 거울단계와 그것의 변증법적 발전에 대한 라캉의 설명을 살펴봐야 한다.

 

 

 

3. 나르시시즘적 공격성과 초자아

 

 

주지하다시피 라캉이 이론화한 거울단계는 생후 6~18개월 정도의 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시기를 일컫는다.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거울 앞으로 가서 거울 속 아이의 모습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너야(Thou art that)!”라고 말하고, 이때 만일 아이가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고 거울 속 이미지가 자신의 것임을 깨닫게 되면 아이는 기쁨에 넘쳐 그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Ei 93; 114). 

 

라캉에 따르면, 이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현상이다. 침팬지 등이 자신의 거울 이미지에 대해 처음 얼마간은 다른 동물을 대하듯이 경계심을 보이다가 그것이 허상임을 깨달으면 곧 관심을 잃는 것과 대조적으로 인간의 아이는 기뻐하며 지속적으로(사실은 평생) 자신의 거울 이미지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타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완전한 무기력(Hilflosigkeit)의 상태에 놓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산’으로 말미암아 1년 넘는 기간 동안 아이는 자신의 신체를 “파편화된 신체”(Ei 96; 118)로 경험하다가 마침내 거울 속 자신의 이미지를 알아보게 되면, 그는 자신도 타인들처럼 통합된 신체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거울 속에 있는 아이 자신의 이미지가 바로 라캉이 “이상적 자아”(moi idéal)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이미지가 이상적인 까닭은 바로 그 이미지야말로 아직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아이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이상적 목표를 이루기 때문이다. 반면 라캉이 “자아이상”(idéal du moi)라고 부르는 것은 이 모든 상상적 동일시, 파편화된 신체 이미지들의 조립(assemblage)을 뒤에서 계산하고 연출하고 구조화하는 대타자로서의 어머니, 말하는 존재(parlêtre)로서의 어머니다.

 

(주6) 그의 첫 번째 세미나에서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바꿔 말하면, 주체로 하여금 보는 자의 위치에 있도록 규정하는 것은 바로 상징적 관계입니다. 상상적인 것으로 하여금 다소 높은 단계의 완벽함, 완전함, 근사치에 이를 수 있도록 결정하는 것은 바로 말, 상징적인 것의 기능입니다. 이 그림 속에서는 Ideal-Ich와 Ich-Ideal, 이상적 자아와 자아 이상의 구분이 이루어집니다. 타인과의 모든 관계는 자아 이상이 관장하는 관계들의 놀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적 구조화가 어느 정도 만족스럽냐는 바로 타인과의 관계에 달려 있지요.” 몇 문단 후 라캉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자아이상, Ich-Ideal은 말하는 한에서의 타인, 나와 상징적이고 승화된 어떤 관계를 …… 맺는 한에서의 타인입니다.” (라캉, 『프로이트의 기술론』, 255 및 257)

 

이 때문에 라캉은 이상적 자아를 상상적 투사(projection)에 관련시키고, 자아이상을 상징적 입사(introjection)에 관련시킨다.

 

(주7) 라캉, 『프로이트의 기술론』, 150~51.

 

그런데 이 상상적 동일시의 “기쁜” 경험은 그 이면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로부터 공격성이 유래한다. 거울 속의 이미지가 이상적으로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사실 아이 자신은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소외”되기 때문이다. ‘나’는 적어도 아직 ‘내’가 아니며, 저 이미지를 따라 ‘나’는 무한하고 점근선적인 방식으로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라캉이 공격성(aggressivité)이라고 부르는 것은 행위로서의 공격(aggression)과는 구분되는 것으로, 그것은 증오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안에서도 발견되는바(“박애주의자, 이상주의자, 교육학자, 심지어 개혁가의 행동을 기초 짓는 공격성” ― Ei 99; 121), 그것은 거울단계에서 아이가 사랑과 증오의 뒤얽힘으로서 경험하는 자신의 이상적 자아와의 양가적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다. 

 

「공격성」에서 라캉은 아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와 함께 있게 될 때 이들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감정이입”(Einfühlung)이 아니라 “인간적 형태의 이마고”에 사로잡히는 것(곧 동일시)이라고 하면서 그 예로 아이가 다른 아이와 자기를 구분 못하는 현상, 곧 “다른 아이를 때리는 아이가 자기가 맞았다고 말”하거나 “다른 아이가 넘어지는 것을 보면 울음을 터뜨리는” 현상을 든다(112; 136). 그러나 정확히 이렇게 상상적 동일시의 이미지가 인간을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내쫓는 것, 소외시키는 것인 한에서, 그것은 어떤 내적 긴장을 필연적으로 도입하게 된다. “실제로 이 [소외의] 형태는 주체에 내적인 갈등적 긴장으로 결정화하며, 이 갈등적 긴장은 타자[다른 아이]의 욕망의 대상을 원하는 주체 자신의 욕망에 대한 자각을 야기한다. 여기서 원초적 합일은 공격적 경쟁으로 치닫고, 이로부터 타인, 자아, 대상이라는 3인조가 태어난다.”(Ei 112~113; 137) 

 

물론 이때 주체 자신이 욕망하게 되는 타인의 욕망의 대상의 자리에는 장난감을 비롯하여 다양한 것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체와 타자(다른 아이)가 모두 원하는 공통된 욕망의 가장 근본적 대상을 이루는 것은 바로 대타자로서의 어머니의 욕망이다. 이 때문에 얼마 안 있어 라캉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가 『고백』에서 묘사한 질투에 사로잡힌 아이의 사례, 곧 이미 엄마젖을 뗀 아이가 “창백한 얼굴과 독기를 품은 시선으로 젖을 먹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는 사례를 든다(Ei 113~14; 138). 라캉은 자신의 열한 번째 세미나인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사례를 재론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일정하게 수정하고 좀 더 정교화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타인이 갖고 있는 대상을 자신도 갖고 싶어 하는 어떤 질투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원인 a에 관련된 질시(invidia)다. 

 

 

응시로서 기능하는 invidia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그것을 질투(jalousie)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건 아니건 그가 ‘질시하는’ 어떤 것이 꼭 그가 ‘갖고 싶어 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동생을 응시하는 아이, 이 아이에게 아직도 자신이 젖먹이이길 바라는 욕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이런 것이 바로 진정한 질시입니다. 주체가 이렇듯 질시로 하얗게 질리게 된다면 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앞에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충만함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매달려 있는[집착하는se suspend] 분리된 소문자 a가 어떤 타자에게는 그 타자를 만족시키는 소유물, Befriedigung(만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주8) 라캉,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맹정현·이수련 옮김, 새물결, 2008, 179.

 

 

라캉의 욕망에 대한 정식화인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가 여기서 온전히 작동 중이다. 주체가 욕망하는 것은 대타자도,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도 아니고, 대타자의 욕망이다.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대타자가 자신을 욕망해주길 욕망한다.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길 욕망한다. 문제는 어머니가 자신이 아닌 동생에게 젖을 주고 있는 위와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적 상황에서 나타나듯이 대타자의 욕망은 지속적으로 미끄러져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전위(또는 환유)의 운동을 그 본질로 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욕망의 전위의 운동을 언표(énoncé)와 언표행위(énonciation) 사이의 환원 불가능한 간격과 연관시킨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적 욕망이 놓여 있는 것은 언표의 수준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수준이다.

 

(주9)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차원에 의해 주체에게 부여된 위상의 차이는 ‘코기토’ 수준에 욕망을 위치시켜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언표 행위에 생기를 불어넣는 모든 것, 모든 언표 행위가 언급하는 것은 욕망에 속합니다.”(『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214쪽)

 

그리고 언표행위의 수준에 위치해 있는 대타자의 욕망은 늘 그 자신의 언표에서 떨어져 나와 미끄러지기 때문에 대타자의 언표는 주체에게 기만적인 것으로 경험되며, 이것이 바로 주체를 “좌절”(frustration)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대타자의 욕망의 확정적 대상이 되려는 주체의 그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결국 주체는 “도대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Che vuoi)?” 하고 절규하게 된다.

 

초자아의 가혹함(férocité)은 사실 그것이 주체에게 법을 무조건 강제한다는 사실보다 그 법이 모성적 대타자의 욕망의 자의적인 운동에 기초해 있다는 데에서 훨씬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유래한다. 라캉에 따르면, 초자아의 전형적인 “명령(impératif)”은 “즐겨라(Jouis)”인데, 그 명령 앞에서 주체는 단지 이렇게 답할 수 있을 뿐이다. “저는 듣고 있습니다(J’ouïs)”(Eii 302; 969) 즐기라는 대타자의 명령에 자신이 듣고 있다는 동일한 발음의 답변을 돌려줌으로써 같은 언표가 상이한 언표행위, 상이한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며 주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통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라캉은 이런 대타자의 욕망의 자의성에 의해 통제 불가능하게 커져만 가는 좌절이야말로 범죄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메커니즘이라고 본다. 「범죄학」의 결정적인 대목에서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주체의 바람에 대한] “타자”의 부응의 결핍(defaut d’adéquation)이 문제해결적 동일시를 유산시킬 때마다 좌절된 충동(pulsion frustrée)을 흡수하는 공격적 긴장은 이를 통해 자아의 변증법의 중단 속에서 범죄 유발적(criminogène)이 되는 유형의 대상을 야기한다.(Ei 141; 167~68, 강조는 인용자)  

 

 

바꿔 말해서 초자아의 자의적인 법으로 인해 좌절된 충동이 복귀하여 주체의 공격성을 극단화할 때, 그것은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일에 실패한 주체의 자기 처벌적 범죄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4.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 해봐야 한다”

 

 

리오넬 쉬리버(Lionel Shriver)의 동명소설에 기반하여 제작된 램지 감독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는 학교 강당에 자신의 학우들을 모두 가두고 활로 쏴 학살한 후 투옥된 케빈이라는 한 고등학생과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어머니 에바(Eva)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아들이 갇혀 있는 감옥 근처에서, 자신에게 그 어떤 편안함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황폐한 집을 얻어 사는 에바는 그 사건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된다. 어쩌다 케빈은 그런 천인공로할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영화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의 생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케빈은 원래 그런 “범죄적 본능”을 타고난 존재,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머니 에바가 그를 그토록 잔혹한 범죄자로 만든 것일까?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질문 앞에서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제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양자택일을 거부하면서, 그것은 아이의 잘못도 아니고 어머니의 잘못도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라캉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 안에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케빈의 아버지 프랭클린(Franklin)이다. 프랭클린이야말로 이 이야기에서 초자아의 심급을 대표한다. 또한 우리는 이 영화를 분석하면서 얻게 될 실마리를 따라서 라캉이 제안하는 치유적 개입이 무엇인지까지 살펴보려고 한다.

 

케빈의 어머니 에바는 결혼 전에 원래 세계의 아름다운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여행칼럼을 쓰는 열정적인 작가였지만, 당시 연인이었던 프랭클린의 아이를 임신하게 됨으로써 이 직업을 포기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키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케빈을 임신한 에바가 임산부를 위한 체조 학습반에 가기 위해 어떤 건물로 들어가는데, 때마침 건물 안쪽에서 발레 클래스를 방금 마친 어린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온다. 그 달리는 아이들 속에서 에바는 마치 마비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멈춰 서서 질식할 것 같은 숨 막힘을 맛본다. 

 

케빈이 태어난 후 상황은 계속 더 나쁜 쪽으로만 진행된다. 갓 태어난 케빈은 일부 신생아에게서 보이는 생후 3개월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는 콜릭(baby colic)의 증상을 보인다. 에바는 아기의 울음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하루는 케빈을 유모차에 태운 채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 곳으로 가 드릴의 굉음으로 아기의 울음을 덮고 한참을 서 있게 된다. 이후 케빈이 조금 더 성장하여 2~3세가 되었을 때 케빈은 에바를 향한 믿을 수 없는 공격성을 내보이고, 케빈의 여동생 실리아(Celia)가 태어난 후에는 에바만이 아니라 실리아까지 적대적으로 대하다가 결국 동생을 실명하게 만드는 가혹행위를 저지른다. 케빈이 5~6세 가량 되었을 때, 케빈은 대소변을 가릴 나이가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 있다. 하루는 에바가 케빈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케빈을 보내주려고 하는데 문 쪽으로 걸어가던 케빈이 갑자기 뒤돌아보면서 비열한 웃음을 내보이고 다시 새 기저귀에 똥을 싸는 제스처를 취한다. 격분한 에바는 아이를 거칠게 들어 올리다가 아이가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케빈이 보여주는 이 극단적인 공격성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우리는 그 실마리를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케빈이 3~4세 정도 되었을 때 하루는 에바의 방에 들어가 벽에 붙어 있던 수많은 사진들을 전부 찢어버린다. 이 사진들은 에바가 결혼 전에 여행한 세계 각지의 관광지를 찍은 것이었다. 케빈은 왜 이 사진들을 찢은 것일까? 이유는 명확하다. 그 사진들이야말로 어머니 에바의 욕망의 대상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케빈이 정말 욕망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에바의 욕망이었지만, 에바의 욕망은 늘 자신을 향하지 않고 다른 대상(사진으로 대표되는 여행 작가의 꿈)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에바의 욕망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케빈이 에바에 대해 보여주는 적대, 그리고 이후 가족에 새로 도착한 동생 실리아에게 보여주는 적대는 모두 대타자인 어머니의 욕망을 붙잡기 위한 시도가 실패하면서 그 좌절감이 공격성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이는 케빈이 학교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과정에서도 뚜렷이 확인된다. 케빈은 학교로 가서 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기 전에 이미 집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을 모두 활로 쏴서 죽인다. 가족 중 자신이 가장 적대적으로 대했던 어머니 에바만 빼고 말이다. 왜일까? 당연히 그것은 에바를 죽일 경우 자신이 욕망하는 바로 그 대타자의 욕망을 붙잡는 일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원래 케빈은 아버지와 매우 친한 사이였다. 사실 케빈이 학살에 사용한 프로페셔널한 수준의 활을 생일선물로 준 것이 바로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케빈을 데리고 양궁장으로 가 활 쏘는 법을 직접 가르쳐주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은 바로 그 활로 아버지를 쏴 죽이고 동생과 학우들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언급했듯이, 이 모든 비극에서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은 바로 케빈의 아버지 프랭클린이다. 케빈을 사랑한 것이 분명하고 그를 일관되게 다정하게만 대해주었을 뿐인 프랭클린이 어찌해서 가장 책임이 크다는 것인가? 왜냐하면 프랭클린은 여기서 바로 결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 아버지,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만 말하는 아버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라캉이 말하는 초자아의 전형적인 명령은 “즐겨라”이다. 바로 이 명령을 통해 역설적으로 초자아는 주체를 마비시키고, 주체에게 그 모든 즐김, 곧 주이상스(jouissance)에의 접근을 금지한다. 라캉은 「범죄학」 논문 초반에(그러나 사실 라캉은 다른 여러 텍스트에서도 이 사례를 예시로 든다)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를 잠깐 언급한다. 아버지가 “신은 죽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고 말하자, 아들은 이렇게 답한다. “신은 죽었습니다. 이제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신은 금지의 심급이다. 그런데 신이 죽음으로써 아무런 금지도 없어질 때 벌어지는 사태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상황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 무엇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 또는 오히려 그 환유의 진정한 본질로서의 아버지는, 라캉의 관점에서는, 단 하나를 금지함으로써 그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주체의 욕망을 허락하고, 그리하여 주체를 자유롭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곧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상상적 팔루스가 되기 위한 주체의 시도, 그 단 하나를 금지하는 “거세”를 행함으로써 말이다.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의-이름(le nom-du-père)”은 오직 이런 “아버지-의-금지(le non-du-père)”를 통해 달성되며, 그 이름 하에서만 주체는 자신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주이상스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따라서 라캉에게, 아무 것도 금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허락하는 아버지는 사실 모든 것을 금지하는 아버지(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아버지”)와 본질적인 수준에서 등가적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에바가 프랭클린에게 고충을 털어놓으면서, 케빈이 너무 말썽을 피우고 공격적으로 행동해서 아무래도 케빈을 정신치료 상담이라도 받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자, 프랭클린은 얼굴을 붉히며 “왜 애를 가지고 그래? 상담을 받아야 할 것은 당신이야!”라고 말하면서 케빈을 옹호하고 에바를 비난한다. 이런 프랭클린의 태도야말로 바로 에바로부터 케빈을 “분리”하는 일을 가로막고 케빈의 욕망이 병적이고 범죄적인 것으로 폭주하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것도 금지하지 않는 프랭클린이야말로 케빈에게는 잔혹한 초자아의 심급을 대표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남은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기 위해 우리의 논의를 좀 더 정교하게 세공할 필요가 있다. 앞서 우리는 모성적 대타자의 욕망의 자의적인 법을 초자아의 법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주체에게 가져다주는 좌절에 대해 논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인 프랭클린을 오히려 초자아의 심급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외양상의 어긋남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라캉이 자신의 일곱 번째 세미나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초자아에 대해 논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 거세, 좌절, 박탈(privation)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좌절이 상징적 어머니에 고유하게 속한다면, 거세를 책임지는 자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실재 아버지입니다. 박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상적 아버지이지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초자아 형성의 계기에서 이 요소들 각각의 기능을 파악해 봅시다. 아마 이것이 좀 [우리의 생각을] 명확하게 해줄 것이고, 우리가 한편에서 거세하는 아버지를 설명하고, 다른 한편에서 초자아의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를 설명할 때, 우리가 동시에 두 상이한 선을 읽어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10)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Seminar Book VII, 1959-1960), trans. Dennis Porter, Norton, 1986, 307.

 

이렇게 말하고 나서 조금 후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섭리적 이미지의 기초인 것은 이런 상상적 아버지이지 실재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종국에 초자아의 기능은 최종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에 대한 증오입니다. 신이 일을 아주 엉망으로 처리했다는 경멸 말이지요. 

 

(주11)  Lacan,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308.

 

정리하자면, 좌절의 작인으로서의 상징적 어머니가 수립하는 자의적인 모성법의 상관항으로서 박탈의 작인인 상상적 아버지가 초자아의 기원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실재적 아버지는 거세를 실행함으로써 더 이상 자의적이지 않은 상징적 아버지의 부성법을 새로이 수립하는 작인이 된다. 케빈의 아버지 프랭클린이 “박탈”의 작인으로서의 상상적 아버지로 기능했던 한에서 그는 이 이야기에서 초자아의 심급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런 초자아와 연결되어 있는 범죄적 주체성에 대해 라캉이 제안하는 치유적 개입의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공격성」에서 라캉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승화에 연결된 오이디푸스적인 “두 번째 동일시”에 대해 언급한 후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가 자아이상의 ‘평화를 가져오는(pacifiante)’ 기능이라고 부르는 것, 곧 리비도적 규범성을 문화적 규범성과 연결하는 것인데, 이 기능은 역사 이래 아버지의 이마고와 관련되어 있었다. 아버지 살해라는 신화적 사건으로부터 이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 차원, 곧 죄책감을 도출하는 한에서, 저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만드는 신화적 순환성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저서 『토템과 타부』가 여전히 갖고 있는 중요성이 분명히 여기에 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아버지 살해 이후 형제들끼리 경쟁하는 상황 속에 기입되는 갈등을 중화시켜줄 참여의 필요성이 부성적 토템에 대한 동일시의 기초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적 동일시는 최초의 주체적 개인화에 구성적인 공격성을 주체가 초월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동일시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이 거리의 창립에 있어서 이런 동일시가 구성하는 진보(le pas)를 주장한 바 있다. 이 거리를 통해 존중의 질서(l’ordre du respect)의 감정들과 함께 이웃에 대한 그 모든 정서적 받아들임이 실현된다. (Ei 116; 140~41, 강조는 인용자)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에 대한 라캉의 평가는 이후 1960년을 전후하여 완전한 기각이라는 훨씬 더 비판적인 것으로 변하게 되지만, 이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라캉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승화와 관련된 자아이상의 자리에 상징적 어머니가 아니라 상징적 아버지를 들어서게 만드는 두 번째 동일시는 주체의 공격성을 해소하고 개인들 사이의 평화(또는 보다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시빌리테civilité)를 달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는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한 금지가 아닌, 모성적 대타자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이라는 단 하나를 금지하는 상징적 아버지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5. 나가며

 

 

라캉은 인간 안에 잔존해 있는 생물학적이거나 동물적인 것으로서의 “범죄적 본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라틴어 경구는 이런 점에서 기만적이다. 오히려 인간의 잔혹(cruauté)은 “동물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며, 포악한 “육식 동물조차 인간이 자연 전체에 가하는 위협 앞에서는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 치”게 되는데, 라캉은 이런 “잔혹 자체가 인간성을 함축한다”고 말한다(Ei 146; 173). 왜냐하면 이런 잔혹은 기표의 효과 하에 놓이게 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정신적 구조에서만 유일하게 기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라캉은 “정신분석은 범죄를 비실현시키면서도 범죄자를 탈인간화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Ei 134; 160). 곧 정신분석은 범죄적 주체의 공격성이 범죄로 현실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이 목표는 범죄자를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인간으로 취급함으로써만 달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범죄자를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라캉은 『또 다른 에크리』에 실려 있는 「범죄학의 가능한 모든 발전의 전제들」이라는 글에서 “책임, 그것은 처벌이다”라고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주12) Lacan, “Prémisses à tout développement possible de la criminologie”, Autre écrits, Seuil, 2001, 124. 사실 이 글은 독립적인 글은 아니고 그의 「범죄학」 논문 발표에 대해 학술대회에서 제기된 몇몇 문제제기에 대해 라캉이 한 답변이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처벌의 “위생적” 관념(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적 관념)의 발전이 20세기에 보여준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그런 실천은 정확히 인류의 사분의 일을 집단 수용소에 가두는 사태로 귀결되었다고 말하면서, 정신분석은 처벌과 그것의 제한 사이의 화해의 척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같은 곳). 

 

그러나 이런 라캉의 관점의 긍정성을 평가하면서도, 우리는 그가 제안하는 폭력과 범죄에 대한 제어의 방안을 비록 회고적인 시각에서라고 할지라도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70년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5~60년대에 걸친 시기에 라캉은 부성적 상징법을 특권화하며, 이 입장에서 병리적 범죄의 발생원인을 부성 중심의 가족구조의 와해에서 찾았다.

 

(주13) 1973년에 “앙코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스무 번째 세미나에서 일어난 라캉의 이론적 단절에 관해서는 최원, 『라캉 또는 알튀세르』, 난장, 2017, 특히 2장을 보라. 

 

 

초자아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귀결되는 이론적 결론들을 열거함으로써 이 고찰들을 마무리하자. 초자아는 오이디푸스성의 사회적 조건들과 연결되어 있는 개인적 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가족 상황에 포함되어 있는 범죄적 긴장들이, 이 가족 상황 자체가 해체되는 사회 속에서만 병리적 결과를 발생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Ei 135; 161) 

 

 

라캉의 이 같은 발언은 가족의 해체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병리적 폭력과 범죄의 증가(미국에서 빈발하는 총기난사 사건과 같은 주소 없는 폭력, 묻지마 범죄, 그리고 점점 더 극렬해지는 각종 혐오범죄, 테러리즘 등)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지만, 우리는 동시에 부성 중심의 가족 구조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제기되는 질문은 분명하다. 부성적 상징법이 더 이상 병리적 범죄와 폭력을 제어하는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떤 대안적 시빌리테(시민공존)의 방안을 가질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라캉의 범죄적 주체에 대한 분석은 하나의 중요한 이론적 준거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최원, 『라캉 또는 알튀세르』, 난장, 2017.

라캉, 자크,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맹정현·이수련 옮김, 새물결, 2008.

______, 『프로이트의 기술론』, 맹정현·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6. 

______, 『에크리』, 홍준기 외 옮김, 새물결, 2019.

Evans, Dylan,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Routledge, 1997. 

Lacan, Jacques,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Seminar Book VII, 1959-1960), trans. Dennis Porter, Norton, 1986.

______, The Ego in Freud’s Theory and in the Technique of Psychoanalysis (Seminar Book II, 1954-1955), trans. Sylvana Tomaselli, Norton, 1988.

______, Écrits: Nouvelle édition vol I, Seuil, 1999.

______, Écrits: Nouvelle édition vol II, Seuil, 1999.

______, Autre écrits, Seuil,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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