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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2012/01/22 09:00
제 논문 한 편이 데칼라주( Décalages, An Althusser Study Journal) 두번째 호에 출판되었습니다. 제 박사학위 논문 첫번째 챕터의 첫 절반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Won Choi, "From or Toward the Symbolic? A Critique of Slavoj Zizek's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Décalages: Vol. 1: Iss. 2, Article 2.

그리고, 이번 두번째 호에는 이외에도 알튀세르의 원고 "발생학에 대하여"와 피에르 마슈레의 버틀러에 대한 글을 비롯하여 좋은 논문과 리뷰가 많이 실렸습니다.
전체 목차는 여기로 가시면 됩니다.
http://scholar.oxy.edu/decalages/
Posted by marxpino
非평2012/01/07 02:17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의 두번째 강의에서 곡물가격을 둘러싼 권력관계의 변화, 곧 곡물가를 최저가로 유지하기 위해 사재기나 독점 등을 '금지'하는 법적-규율적 권력으로부터 곡물시장을 자유롭게 놔두면서도 그 안에 몇몇 장치(수출을 허용하고 수입에 관세를 부과하는 등)를 도입하여 곡물량의 흐름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어 사재기나 독점을 자연스럽게 포기하도록 만드는 '안전장치'의 권력으로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자니, 다시금 드라마 <선덕여왕>이 떠오른다. 곡물의 사재기를 통해 곡물가를 조작하여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노비가 되게 만드는 귀족들의 책략을 방해하기 위해, 덕만이는 군량미를 일시적으로 풀거나 푸는 척하여 곡물량의 흐름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든다. 덕만의 안전장치! ㅋ 물론 푸코가 말하는 안전장치는 근대에 생겨난 것인데, 그것이 선덕여왕이 살던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완전 난센스이지만, 어차피 허구임을 감안하고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의 테마 가운데 하나는 확실히 장치다.
Posted by marxpino
철학2012/01/06 05:43

좀 더 시간을 두고 앞에서 내가 제기했던 문제를 생각해봤는데, 이렇게 지젝과 라클라우의 논쟁이 혼전의 양상을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아마도 라캉을 다시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김정한 선생은 자신의 글에서 저 두 이론가가 얼마나 라캉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게 사실은 적어도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왜냐하면 초기 지젝이 라클라우를 비판하면서 "사회적 적대에 선행하는 부정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상징계에서 주체는 구성적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빗금쳐진 주체($)이며, 사회적 적대는 이런 구성적 결여를 외부화함으로써 발생한다"고 말할 때 이미 거기서 "상징계"란 '타자'의 질서,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웃(neighbor)으로서의 대타자(the Other)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빗금쳐진 주체 (또는 빗금쳐진 A)가 있고, 그리고 나서 타자와의 어떤 (사회적) 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웃-대타자와의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섬으로써만 A는 빗금쳐진 주체로 생산된다. (지젝은 여기서 내가 <알튀세르 효과>에 기고한 글, "인셉션인가, 호명인가?"에서 지적했듯이 주체의 회고적 구성의 논리에서 인셉션의 논리로 끊임없이 후퇴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클라우가 "적대"란 "나"의 동일성을 온전히 달성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으로서의 타자와의 관계를 지칭한다고 말할 때, 여기서 그가 적대를 동일성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라클라우가 말하는 적대란 상징적인 것으로만 이야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비록 라클라우 자신이 헛갈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상징적인 동일성의 '실패'를 가져오는 것이 타자이고 타자와의 적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실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지젝과 라클라우가 거의 입장을 서로 180도 바꿔 상대방의 초기 입장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계속 설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이 양자의 논쟁이 사실은 이 문제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 내가 보기에 지젝이 실재를 자꾸 언급하면서 그곳에 적대를 온전히 위치시킬 것을 주장할 때, 지젝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닌가 한다. 곧 그는  실재에 다른 적대가 아닌 오직 계급적대만을 위치시키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은 계급적대만이 실재인가 아니면 다른 적대도 실재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지 '적대'라는 카테고리를 상징계에 위치시킬 것인가 실재계에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계급적대만이 항상 그리고 아마도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실재이며 다른 적대는 실재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지젝은한번이라도 제대로 답했는가? 내가 보기엔 아니다. 그가 자본의 지구화를 말한다고 하지만, 그게 왜 이 질문에 대한 답인지는 매우 모호하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라클라우는 지젝이 본질주의로 복귀했다고 파악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지젝은 여기서 내가 보기에 자신이 처음부터 애착을 가지고 있던 도식 하나를 변주하고 있는 것 같다. 바로 프로이트주의를 범성욕주의(pansexualism)로 사람들이 비난할 때, 프로이트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그것을 부인하기는 커녕 프로이트주의는 범성욕주의가 맞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범성욕주의는 아니라고 지젝이 주장했을 때, 그가 제시한 바로 그 도식말이다. 잠재적 꿈사고는 특별히 성적인 내용과 상관 없는 일상적 경험들의 데이터들이며, 그러한 한에서 명백한 꿈사고의 진실을 이루는 어떤 것이 아니다. 성욕은 이러한 경험적 데이터들의 내용을 직접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데이터들이 서로 결합되어 이야기를 생산하는 데에 형식적으로 개입하는 꿈작업이며,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잠재적 꿈사고(전의식)와는 다른 구조적 위치(무의식)를 차지한다.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가 본질주의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직접 꿈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꿈내용을 이루는 여러가지 것들의 결합에 형식적으로만 개입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운운.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된 프로이트의 범성욕주의를 변주하여 지젝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범계급(적대)주의를 말하고 싶어한다. 즉 계급적대는 이러저러한 적대(인종적대, 성적 적대, 생태적 적대, 등등)와는 다른 위치를 차지하며 그것들의 내용들을 직접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들이 서로 결합방식에 형식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결정자가 된다. 그러한 한에서 그는 자신이 계급본질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왜 그러한 예외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계급적대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라클라우는 지젝이 여전히 계급본질주의를 고수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 간단한 문제를 또 다른 문제와 헛갈리면서 서로 진흙탕을 뒹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지젝이 사실은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논리를 가져다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건 사실 아이러니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는 범성욕주의를 위와 같이 옹호한 바로 그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를 비난하느라고 또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심급들의 형식적 위계를 결정함으로써(곧 지배적 심급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므로써) 작동하지 심급들의 내용을 직접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 동의에도 불구하고, 지젝 주장이 알튀세르의 주장과 같은가 하는 문제는 좀 달리 생각할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알튀세르가 저 최종심급 이론을 가공할 당시만 해도, 다양한 적대 간의 관계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제기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계급투쟁이 모든 것을 본질적으로 결정한다는 식의 사고가 팽배해있던 때다. 그러한 상황에서 알튀세르는 계급투쟁에 의한 결정을 본질적 결정이 아닌 위와 같은 형식적 결정이라고 말함으로써 경제주의적 사고를 비판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젝이 저 이론화를 할 때, 그리고 라클라우와 논쟁할 때는 이미 다양한 적대 간의 관계 문제가 사회적으로 충분히 제기된 이후라는 점이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같은 주장이지만 그 두 주장은 다른 효과를 가지고 오는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계급적대의 중심성을 오늘날도 위와 같은 도식을 통해서 옹호하는 것이 충분한가 또는 정당한가 물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동시에 알튀세르는 처음부터도 실재를 단순히 계급적대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전체 및 그것이 갖는 계급적대의 구조라고 봤다는 점이 중요하다. 문제는 복잡한 사회적 전체이지 단순히 계급적대가 아닌 것이다. 또는 그가 말하는 계급적대는 그 자체로 이미 경제적 차원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차원 등을 포함한 비동시대적인 다양한 심급들의 절합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단순히 계급적대가 아니라 다양한 적대들이 절합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복잡한 사회적 전체가 문제라고 알튀세르의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을 해놓고 보면, 알튀세르를 통해서 우리는 적대들의 복잡한 절합의 문제에 라클라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지젝과 같이 본질주의로 돌아가지 않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라클라우는 알튀세르의 최종심을 비판하기 위해서 모든 적대를 (적어도 초기에) 모조리 상징계 내부로 가두려고 했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적대의 다원성을 인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상징계 내부로 가둘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우리는 다양한 적대들이 또한 이데올로기적 차원뿐 아니라 그 자체로 경제적 차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놓치고 말것이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의 적대는 경제적 차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가당치 않은 말인가? 인종간 적대가 경제적 수단을 통해 작동하지 않는가? 생태문제는 경제문제와 관련이 없는가?

또 거꾸로 지젝에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급적대를 말하면서 계속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계급의 특정한 표상과 동일성의 문제를 다루지 않아도 되는가? 지역에 따라, 성별에 따라, 지적 차이에 따라 형성되는 그 모든 계급적 동일성들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계급적대를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지젝의 가장 커다란 문제 가운데 하나가, 그가 끊임없이 계급적대의 중심성을 말하지만, 그것을 한 번도 역사적으로 제대로 분석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계급적대는 항상 주어진 어떤 실재이며, 실재인 한에서 그것은 사실 과학적으로 분석해서는 안되는 것이다.실재는 알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증상을 분석하려고 했지만, 지젝은 증상(특히 sinthome)이란 분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있을 뿐이다. 계급적대는 분석할 수 없다. 다만 그것과 동일시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입만 열면 계급적대를 말하지만 우리가 거기에서 보는 것이 결국 이데올로기적 동일시의 공허함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알튀세르가 70년대 말로 가면서 계급적대와 함께 대중운동에 대한 논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세가 바뀌면서, 그는 라클라우처럼 대중을 관통하는 다양한 적대들에 주목했지만, 그것을 라클라우처럼 단순히 상징계 내의 문제로 사고하는 것은 거부했다. 김정한 선생이 자신의 글의 결론에서 던진 질문은 따라서 유효하다. 우리에게는 헤게모니, 계급적대, 대중이라는 세 가지 카드가 있다. 당신이 선택할 카드는 무엇인가?

  

Posted by marxp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