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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sex-war 논쟁과 버틀러 (강의노트)

marxpino 2023. 5. 13. 09:33

단국대에서 5년 정도 주디스 버틀러를 강의해 왔고 이번 학기에도 강의했다. 여기 강의 노트 일부를 공유한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2부 5장은 게일 루빈에 대한 (양가적인, 즉 비판을 통한 긍정의, 탈구축적인) 논의다. 게일 루빈은 <일탈>이라는 저서에서 성해방의 관점에서 매우 스캔달적인 주장들을 펼치면서, 심지어 범죄적으로 보이는 성욕(예컨대 소아성애자의 성욕) 까지도 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는 80년대 초에 있었던 이른바 sex war의 양진영, 즉 sex positive(섹스는 좋은 것인데, 법 또는 권력이 그것을 억압한다)와 sex negative(섹스는 그 자체로 나쁘고 폭력적이다) 가운데 sex positive의 진영에 속한다. 버틀러는 이 입장을 비판하면서 법 이전적인 성욕, 법을 파괴함으로써 해방시켜야 할 성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다양한 성욕들은 모두 권력의 효과들로 생산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현재적인 권력의 배치를 변혁할 수 있는가, 지배적인 권력의 배치를 어떻게 다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다른 권력 배치를 어떤 실천을 통해 이룰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는 모든 권력배치가 다 좋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권력배치가 다른 권력배치보다 나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입장에서 보면 비록 현재적인 권력배치에서 억압되거나 배제되는 권력배치라고 할지라도 무조건 전복적이고 좋은 권력배치일 수 없다. 앞의 예로 돌아가자면, 동성애적 성욕에 대해서는 긍정할 수 있지만 소아성애적 욕망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제할 수 있는 것이다. 성해방의 관점에서는 성욕의 모든 면이 모두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관점에서는 성욕의 재배치가 문제이며, 배제된 모든 성욕이 다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배치가 추구할 만한가 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쟁점이다. 

 

반면 <젠더 트러블> 3부의 3장은 모니크 위티그의 sex-negative 입장에 대한 버틀러의 비판이다. 모니크 위티그는 유일한 성별(sex)은 여성이라는 성별이며(남성은 보편자의 위치에 서있기 때문에 특수한 성별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는 이성애적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고, 모든 이성애적 관계는 강요된 관계, 강요된 성적 계약에 의한 관계라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성(sex)을 부정 또는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위티그에 따르면 레즈비어니즘은 이성애적 관계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성을 벗어나고 그것을 실천하는 주체는 성별을 갖지 않을 수 있게 된다(남자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코기토 또는 초월적 자아가 될 수 있다). 두 번째 물결 페미니즘에서 나온 레즈비어니즘 강경파의 입장이자 sex-negative의 입장인 것이다. 이 입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따라서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의 근본적 단절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이 입장을 비판하면서 이성애 안에는 심리적 동성애의 구조가 있으며, 동성애 안에는 심리적 이성애의 구조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근본적 단절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예컨대 부치와 펨 사이에서 펨은 자신의 남자친구가 여자이길(여자의 몸을 가지고 있길) 원한다. 즉 자신의 파트너가 여성의 몸을 갖지만 남자다운 성격을 갖길 원한다. 이는 이성애적 관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이성애적 여성은 자신의 여자친구가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길 원할 수 있다. 이른바 상남자보다는 좀더 부드러운 남자를 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애 안에는 동성애가, 동성애 안에는 이성애가 있는 것이다. 이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우울증적인 부인이다. 이성애자가 “나는 결코 동성애를 해본적이 없어” 또는 동성애자가 “나는 결코 이성애를 해본적이 없어“ 라고 부인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젠더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런 스테레오타입을 탈구축하여 동성애 안에 이성애가, 이성애 안에 동성애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런 것을 유연하게 허용하는 권력배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회적 규범을 재배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 이성애 남성이 자신의 파트너 안에서 단지 (전통적) 여성의 특성만 좋아하는가? 씩씩하고 자신을 심지어 리드하는 그런 여성에게 더 끌릴 수 있지 않은가? 또는 한 사람 안에서 어떤 남성적 특성과 또 다른 여성적 특성이 섞여 있는 상태에 더 끌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인정할 수 있도록 정치적 실천을 조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젠더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적인 권력배치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애를 부정하거나 파괴/해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안에 동성애가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근본적 단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버틀러는 두 번째 물결 페미니즘에서 나왔던 레즈비어니즘 강경파(모든 이성애는 강요된 것이다) 및 sex negative의 입장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퀴어 이론을 펼쳐낸다. 

 

이렇게 봤을 때,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바로 페미니즘 자체를 붕괴시킨 sex war 논쟁을 진정으로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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