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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

marxpino 2022. 6. 22. 20:19

이번에 <성찰과 전망>(민주주의사회연구소 기관지)에 실린 글입니다. 완전히 새 글은 아닙니다만 학술지에 실렸던 글은 아니라, 나중에 좀 더 확장해서 학술지에 낼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각주는 모두 생략했습니다.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

 

최 원(단국대)

 

 

 

1. 서론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1990년대부터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폭력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제어하려는 전통적인 모델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첫 번째는 국가에 의한 폭력적 수단들의 독점을 통해 사회로부터 폭력을 제거하려는 ‘폭력 독점’(monopoly of violence)의 모델이며, 이 모델은 주지하다시피 『리바이어던(Leviathan)』의 토마스 홉스에 의해 이론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두 번째 모델은 지배계급(또는 그들을 대변하는 국가)의 폭력을 종식시킴으로써 모든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혁명적 폭력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 모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통상 이 모델을 특권화해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모델은 지배의 수단으로서든 지배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든 간에 모든 폭력은 부당하며 따라서 단순하게 거부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비폭력’(non-violence) 모델이다. 이는 주로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수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 내에는 대항폭력 모델과 개념적으로 구분될 수 있으면서도, 폭력 독점 모델이나 비폭력 모델로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한 정치가 경향적으로 구성되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폭력 모델’(anti-violence)이라고 부른다. 반폭력의 정치는 폭력에 맞선 투쟁의 정치로서, 지배계급의 압도적인 폭력에 저항함에 있어서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따라서 비폭력 모델은 채택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폭력적 수단의 활용은 극단적 폭력을 제한하거나 감축하여 (전쟁이 아닌) 정치 그 자체가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핵심으로 한다.

이러한 발리바르의 입장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지만, 지금껏 국내의 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면이 많고, 종종 대항폭력과 비폭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속에서 다시금 분해되는 양상을 보여왔던 것 같다. 이 모델은 기껏해야 법리적인 논리에서 발견되는 ‘정당방위’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되면서, 대항폭력적 행위를 어떤 경우에 제한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법적, 도덕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 환원되어왔다. 여기서는 발리바르가 논하는 반폭력의 정치가 어떤 면에서 대항폭력과 비폭력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전쟁(및 내전), 계급투쟁, 정치가 맺는 관계에 대해 마르크스주의가 사고한 바를 추적하면서 그 안에서 (대항폭력이 아닌) 반폭력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검토하는 발리바르의 논의를 간략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2. 반폭력의 정치로서 혁명을 사유하기

마르크스(그리고 엥겔스)의 1847년 텍스트인 『공산주의 선언』은 계급투쟁을 내전과, 즉 비가시적이고 잠재적인 전쟁상태에서 가시적이고 공개적인 전쟁상태로, 그리고 마침내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대한 폭력적인 전복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행하는 내전과 등치시킨다. 선언은 모든 계급투쟁을 ‘정치적 투쟁’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모순적으로 ‘정치의 종언’(정치 영역의 소멸)이라는 종말론적 전망 속에 기입함으로써 계급투쟁이나 혁명을 궁극적으로 비정치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고야말로 그 이후 혁명적 대항폭력을 정당화하는 담론들이 주로 준거하는 틀로써 그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선언』은 1918~21년의 레닌에게서 다시 부활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구사회와 신사회 간의 목숨을 건 투쟁의 장기이행으로 규정하는 데에 활용된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비국가, 비정치로 표상되듯이 이행기의 계급전쟁은 비전쟁으로 표상되는데,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1848년 혁명이 잔인하게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더 이상 혁명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유지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으며, 런던 도서관에 파묻혀 이후 근 20년을 작업하여 『자본』 1권(1867년)을 출판하게 된다.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예전과 달리 역사의 방향에는 세 가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첫 번째는 『자본』 32장에 제시되어 있는 생각으로 혁명을 ‘부정의 부정’이자, ‘수탈자들의 수탈’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 선언』에서 이미 나왔던 메시아적인 종말론 테마의 반복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자본』 33장에 제시되어 있으며(혁명을 논하는 32장이 마지막 장이 아니라 그 뒤에 33장이 추가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의 사유가 복잡해졌음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제국주의적인 중심의 자본주의 국가 내의 모순들이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통해 완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세 번째 생각은 『자본』에 나와 있는 공장 감독관 제도에 대한 그의 분석이다. 여기서 그는 공장 감독관이 국가의 편에서 파견된 착취의 엔지니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아동노동 착취를 비롯한 자본가들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초과착취를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파악하면서, 계급적대에 관해 자신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일정한 방식으로 수정한다. 과거에 마르크스는 계급적대를 화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누가 이기든 간에) 계급 대 계급의 폭력적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제 『자본』에서는 계급적대를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닌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보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여론 등을 활용하고 다른 시민 세력들과 연대하여) 자본가 계급의 극단적 폭력을 제어하면서 자본주의를 좀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분명히 『자본』에서 혁명에 대한 사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지만, 이는 역사가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경로로서만 고려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부르주아지의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가 폭력적 혁명의 정치의 곁에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나란히 제시되고 있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가 바로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 발발한 1871년의 파리코뮌으로 인해 그 망설임이 강제로 중단되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 있다고 보면서 봉기 이전에는 봉기에 반대했지만, 대중들이 실제로 봉기에 나서자 찬성 입장으로 돌아서서 파리코뮌에 실천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동참하게 된다(비극적이게도 마르크스의 애초의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마르크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또 다른 반폭력의 정치의 거대한 사례는 1914~17년의 레닌—앞서 언급한 1918~21년의 레닌과는 대조되는 레닌—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레닌은 전쟁과 정치, 그리고 계급투쟁을 정세 속에서 접합시킴으로써 혁명 그 자체를 하나의 반폭력의 정치로 만들어 낸 최초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반전 입장을 취하고 있던 많은 좌파 정치인들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주의와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제2인터내셔널은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하게 되었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 끝까지 반전의 입장을 고수했던 극소수의 사람들은 짐머발트 회의(이른바 제2.5인터내셔널)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지만, 유일하게 레닌만이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연구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레닌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탐독하면서 전쟁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통찰을 얻어냈다. 따라서 전쟁 초기에는 대중들이 애국주의에 고무되어 전쟁에 찬성하겠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전투 속에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면 결국 근본적인 불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상하고, 볼셰비키 조직원들로 하여금 러시아 군대에 자원입대하게 만들었다. 이 조직원들은 처음에는 전쟁터에 나온 다른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하면서 그들과의 유대감을 발전시키다가 전쟁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하면 그 불만을 정치적으로 조직해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만들어진 대중조직은 단순한 노동자 소비에트가 아니라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였으며, 재향 군인들은 이 평의회 조직의 거대한 한 축을 구성했다. 

바로 이런 정치적 개입을 통해 레닌은 러시아를 혁명적으로 패배하게 만듦으로써,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폭력 그 자체를 멈출 수 있었다. 레닌은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방어전쟁의 내부로부터 준비되는 반격’이라는 도식을 완전히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그 논리적 필연성을 “절대전쟁(또는 제한 없는 전쟁)은 시간 속에서 유지 불가능한 것으로 된다”는 사실로부터 이끌어냄으로써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으로서의 전쟁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발명할 수 있었다. 실제로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망명 중이었던 레닌은 독일 정부를 찾아갔다. 만일 자신을 러시아 한복판으로 들여보내 주기만 하면 혁명을 일으켜서 러시아를 전쟁에서 빼내고 이 전쟁을 멈추게 만들겠다고 약속한 레닌은 독일 정부로부터 그 유명한 ‘밀봉열차’를 받아내어 러시아로 멈추지 않고 들어가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가 물자 공급을 받기 위해 독일 국경 내의 마지막 역에 정차했을 때 수많은 독일 인민들이 나와서 “저 사람이 레닌이다, 저 사람이 이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한다”며 레닌을 연호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반폭력의 정치의 또 다른 사례는 바로 대장정의 마오쩌둥에게서 발견된다. 마오 또한 국공합작이 깨진 이후 중국 공산당이 처해있던 거대한 열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독특하게 해석하여 중국 상황에 적용시켰으며, 중국 공산당원들이 인민대중 속으로 숨어들어 가도록 만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마오는 전쟁과 정치를 명확히 관련시키는 클라우제비츠의 테제, 곧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라는 테제를 완벽하게 복원해내면서도 이를 ‘대중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클라우제비츠식 정치 개념과는 매우 다르게 변형하는 데에 성공하는데, 이는 바로 ‘파르티잔의 장기전’(protracted war of partisans)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가공함으로써 달성된다. 마오의 핵심적인 생각은 제국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지배계급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은 그렇지 못하다는 최초의 상황에 의해 후자에게 강제되는 방어 전략이 종국에 가서는 오히려 역전되어 ‘약자들’의 손에 의한 ‘강자들’의 실제적 파괴를 이룩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점이었다. 이때 장기간 지속되는 전쟁 기간은 농민대중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피난처를 구했던 혁명적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세포핵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시간을 의미했으며, 이는 그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삼중의 결과를 동시에 달성하도록 허락했다. 먼저 이들이 침략군의 분견대와 국지적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그들에게서 빼앗은 무기로 스스로를 무장할 수 있게 허용할 것이고, 둘째, 전쟁 무대를 전국적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이들이 전쟁의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며, 마지막으로 셋째, 인민 안에 있는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적들로부터 분리하여 피지배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는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도록 헤게모니를 이동시킬 것이다. 즉 공산당원들은 이렇게 대중 속으로 도망침으로써 그 속에서 전세의 역전을 도모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으며, 그 속에서 주민대중을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또한 다양한 소규모 게릴라전을 수행함으로써 전쟁에 필요한 무기 및 전쟁기술들을 확보하여 마침내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놀라운 대역전극은 마오가 파리코뮌처럼 지배계급의 압도적 폭력에 대해 맞서 싸우기 위해 무대의 중앙을 단번에 장악하는 전술을 구사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들 속으로 숨어 들어가 정치와 방어전쟁을 결합하는 길을 찾아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레닌과 마오의 실천에서 공히 드러나는 것은 우선 전쟁을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그 속에 대중들이 들어와 있는) ‘과정’으로 사고했다는 점이다. 비폭력과 대항폭력의 논리는 주로 폭력이 행사되는 사건 또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면서, 적대하고 있는 상대편이 살인적 폭력을 가해올 때 거기에 대해 총을 쏴서라도 대항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논의가 조직되지만(이러한 차원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폭력은 부당하지만 정당방위에 사용된 폭력은 예외적으로 정당하다거나 아니면 정당방위를 위해서도 폭력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발리바르가 분석하는 레닌과 마오의 사례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오히려 폭력이 하나의 과정이며 따라서 최초의 세력관계는 시간 속에서 변증법적인 전도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고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사실 극단적 폭력을 동원한 지배계급의 공격에 대한 방어 전쟁이 성공한 사례들은 대부분 무대의 중앙을 단번에 장악했던 사례가 아니라 대중 속으로 숨어 들어가 그 속에서 작업하는 지난한 게릴라전의 형태(물론 이 형태는 조건에 따라 변형 가능하다)를 띠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리코뮌의 경우(또 우리의 광주항쟁의 경우)는 오히려 이러한 과정의 조직화 없이 곧장 무대 중앙을 장악하려고 했기 때문에 비극적으로 실패한 사례가 아니었을까? 물론 상황이나 정세는 언제나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성을 우리가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반폭력의 정치로서의 혁명을 사유하고 또한 성공시켰던 레닌과 마오의 정치는 혁명 성공 이후 오히려 홉스적인 폭력 독점의 모델로 도착(perverted)되고 말았을까? 

 

3. 어떻게 혁명을 문명화할 것인가?

우리는 대항폭력 노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반폭력의 정치 모델, 곧 폭력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정치로서의 반폭력의 정치 모델에 대해 논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몇 탁월한 사례들을 검토했다. 특히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극단적 폭력을 멈출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을 발견했던 실로 유일한 정치가이자 이론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폭력을 단순하게 거부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노선은 (오늘날 유행하는 이러저러한 비폭력론이 취하는 형태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극단적 폭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간디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성취된 이후 인도 내의 종교적 갈등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오자, 갈등을 단지 일시적으로나마 유예시킬 수 있었던 단식—간디 자신의 목숨을 건 단식—외에 그 어떤 유효한 개입의 수단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비폭력 노선은 간디 사후 인도 내 종교 분파 간 대학살의 참극이 일어나는 일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반폭력의 정치는 혁명 이후 폭력 독점의 홉스적 모델로 변질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는가? 이 문제는 사실상 모든 사회주의 혁명이 경험했던 문제로, 단순히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몇몇 지도자들의 개인적 오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마르크스주의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봐야 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은 단번에 가공된 것이 아니다. 이 용어는 1848년 혁명에 대한 분석을 다룬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처음 등장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들이 채택할 수 있는 여러 전술들 가운데 하나의 전술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제안했으며, 그 내용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이야말로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투쟁임을 보여줌으로써 중간계급으로서의 농민들을 부르주아지의 편에서 분리하여 자신들의 동맹군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알다시피 1848년 혁명은 실패했으며, 그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의 착수와 더불어) 마르크스의 텍스트에서 완전히 실종되었다가 20여 년이 흐른 뒤 1871년의 파리코뮌에 대한 분석(『프랑스 내전』)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때 그 관념은 단순히 적절한 정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할 수 있는 가능한 하나의 전술이 아니라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취해야 할 이행의 보편적 형태라는 성격을 부여받았으며, 그 내용의 핵심은 노동자 계급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가공할 모순이 이미 프롤레타리아 독재 관념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모순으로 인해 마르크스가 노동자 계급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논하는 바로 그 텍스트에서 하나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그 텍스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안에서의 공산당의 역할에 대한 어떤 논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통치’와 공산당의 ‘지도’라는 관념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양한 이질적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 노동대중을 통일시켜 하나의 단일한 통치 계급으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화의 중심으로서 공산당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마르크스에게 수십만 대중들의 희생으로 끝난 파리코뮌의 처참한 실패는 바로 이 점을 보여주는 듯이 여겨졌을 것이다. 지배 계급의 압도적인 폭력과 대결하면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는 (무장해제까지는 아닐지라도) 매우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의 일주일’이라고 불리는 파리코뮌 진압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곧바로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 것은 이 때문이고, 이런 그들의 노력은 1875년 독일 사회민주당 창립으로 귀결된 바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을 포함하여, 마르크스주의는 이 이론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파리코뮌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 모든 사회주의 혁명을 결정적으로 홉스적 폭력 독점 모델로 변질시킨 것이 바로 이 모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 모순은 정확히 혁명의 방어를 둘러싼 딜레마로 정식화될 수 있다. 혁명은 노동대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들고 그들의 자기 통치 역량을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나 외국의 군대를 포함하는 또 다른 반혁명세력들의 공격으로부터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노동대중을 군대로 조직해야만 하며, 따라서 그들을 규율화해야만 한다. 문으로 내보낸 근대 자본주의의 핵심으로서의 ‘규율권력’(미셸 푸코)이 다시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대항혁명을 불러오지 않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면, 권력장악으로서의 혁명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늘 자신을 더 극단적인 혁명 또는 ‘초-혁명’(Ultra-Revolution)으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혁명의 도착(perversion)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전시 공산주의 시기 레닌은 클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당 내외부에서 터져 나온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공산당 내에서의 ‘분파형성권’(right to tendency)을 금지하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결국 스탈린에 이르게 되면 당의 일괴암적(一塊巖的) 통일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숙청의 정치로 귀결되고 만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또한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마오는 중국 공산당의 기술관료주의화를 비판하기 위해 “요새를 포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들을 동원하여 반역을 조직했지만, 점점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계급투쟁이 당을 관통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계급투쟁의 최종적인 해결장소는 여전히 당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혁명을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당이 진리의 장소로 나타나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뿌리 깊은 사고를 마오 또한 피할 수 없었다.

1976년에 있었던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 대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 문제를 둘러싼 큰 논쟁이 벌어졌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을 폐기하려는 당의 주류적 입장에 맞서 투쟁했으며, 그의 제자인 발리바르도 알튀세르와 대동소이한 입장을 택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그러나 1977년 11월에 이탈리아 공산당 기관지 『선언』(Il manifesto)이 주최한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의 권력과 저항”이라는 콜로키움 이후 사정은 크게 변했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종전 입장을 되풀이하는 글을 콜로키움에서 발표하고 몇몇 인터뷰를 행한 반면, 발리바르는 1978년 초에 작성한 『국가, 당, 이행』에서 스승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면서 사실상 1976년 논쟁 당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에 찬성했던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의 의견에 수렴하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물론 풀란차스의 입장이 당의 주류적 입장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의 축들 가운데 하나는 마오의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스피노자의 “오히려 인식하라(sed intelligere)”라는 슬로건과 결합함으로써 어떻게 혁명을 문명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사유하는 작업이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작업에서 그는 혁명의 지배적인 상 자체를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가진 혁명의 상은 사실상 프랑스 대혁명의 모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 반드시 이런 권력 장악의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국가권력 장악으로서의 혁명, 특히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통일된 계급의 독재로서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혁명 방어의 딜레마를 좀처럼 극복할 수 없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론’(mixed regime)을 급진화한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 공화국의 사례에 준거하여, 혁명은 한 계급의 독재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군주, 귀족, 인민이라는 세 계급이 서로를 견제하고 갈등을 빚으며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장구한 과정의 조직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갈등적 민주주의’(conflictual democracy)의 모델을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마키아벨리의 모델을 어떻게 현재화할 것인가? 우리가 혁명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혁명이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세력 관계 그 자체의 제거로서의 권력 장악—반드시 국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이 아니라, 세력 관계의 상이한 조직화다. 지배자들의 폭력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대항폭력까지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상호 도착을 제어하는 혁명 문명화의 길을 우리가 발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 좌파 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4. 결론: 새로운 시민공존을 향하여

발리바르는 1997년에 출판된 『대중들의 공포』에서 해방, 변혁, 그리고 시민공존(civilité)이라는 세 가지 정치개념을 정식화했다. 먼저 ‘해방’은 정치의 자율성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공동체 내에 제도화되어있는 시민권을 평등-자유 명제에 기초한 봉기적인 시민권의 대중적 발동을 통해 공동체의 내적·외적 경계 너머로 확장하는 정치라고 볼 수 있다. ‘변혁’은 정치의 타율성의 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치를 조건짓는 물질적 관계들(대표적으로 마르크스의 경우 이는 경제적 관계를 의미하며, 푸코의 경우 신체에 관련된 권력관계를 의미한다)을 변화시키는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지는 ‘시민공존’은 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 가운데 특히 ‘동일성의 폭력’을 제어함으로써 정치를 다시 가능하게 만드는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시민공존을 사고하기 위해 발리바르가 일차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법철학』의 헤겔이 발전시킨 ‘지틀리히카이트(Sittlichkeit)’ 개념이다. 헤겔에 따르면, 국가는 갈등하는 특수한 공동체들, 즉 가족적, 지역적, 종교적, 직업적, 정치적 공동체들을 단순히 제거함으로써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들을 잠재적으로 해체하여 국가적 작동의 매개들로 재구성하는 ‘부정의 부정’의 운동을 통해 헤게모니를 확보한다. 이 운동은 확실히 특수한 공동체들을 국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차별적으로 취급함으로써 그 공동체들에 위계화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국가를 특수이해에 따라 규정되는 또 다른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가를 보편화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근대에 이렇게 다양한 특수 공동체들을 탈구축하여 서로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줌으로써 그 공동체들 위로 헤게모니적인 심급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민족국가’(nation-state)다. 민족적 유대 양식을 특권화함으로써 근대 국가는 무엇보다도 (극단적 폭력을 동반하곤 하는) 종교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고, 시민공존의 정치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최근 30~40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로서 이런 민족국가들의 상대화가 진행되었으며 민족국가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폭력 제어의 기능이 무력화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동반한 테러리즘과 전쟁이 다양한 방식으로 복귀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화 과정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민족국가를 우선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파괴적 효과를 비난하면서 그 좋았던 옛날의 민족국가의 영광을 되찾자는 포퓰리즘적 선동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확보하는 세력들—“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트럼프나 옛 소련의 위대함을 복원하기 위한 유라시아주의를 선동하는 푸틴 등—은 오히려 폭력과 전쟁을 국제정치의 무대에 더 큰 규모로 복귀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 문제들은 새로운 시민공존의 정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해결되기 힘들다. 그것이 무엇일 수 있을까? 이는 무엇보다도 (세계화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 속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면서 다양한 원인들이 내재된 극단적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세계 시민들의 연대의 길을 찾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운동을 통해 우리는 민주적 UN, 즉 상임이사국 없는 라운드 테이블 UN을 건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 각 지역 내 국제적 연방(federation)의 제도적 형태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발리바르는 이런 모색 속에서 우리가 사유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매우 보기 드문 이론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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