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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라는 알레고리의 이단점

marxpino 2021. 2. 9. 18:13

* 이 논문은 <문학과 영상> 지 2017년 봄호에 출판된 논문입니다. 논의나 인용은 출판된 논문에 준거해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좀비라는 알레고리의 이단점

 

 

최원

 

 

 

영화 <부산행>

 

1. 들어가며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알레고리(allegory)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의 allegoría에서 온 말로, 그것은 ‘베일로 가려진 언어, 수사’를 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allegoría라는 말 자체는 ‘또 다른, 차이가 나는’의 의미를 갖는 allos와 ‘집회에서 연설하다, 장광설을 늘어놓다’라는 의미를 갖는 agoreuo라는 상이한 두 말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다시 agoreuo라는 말은 ‘집회’(assembly)라는 의미를 갖는 agora에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각주1) https://en.wikipedia.org/wiki/Allegory (2017년 2월 15일 접근). 따라서 알레고리라는 의념(notion)은 확실히 정치·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그러한 정치·사회적 차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수사적 베일로 가리면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알레고리가 그 자체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알레고리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텅 빈 기표, 기의 없는 기표처럼 기능하며, 그것은 오직 다른 기표들이나 때로는 다른 알레고리들과 환유적으로 결합하여 담론화되는 한에서만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담아낼 수 있게 될 뿐이다. 바꿔 말하면, 알레고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입장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유하기 위해 상이한 정치적 입장들이 서로 해석 전쟁을 벌이는 하나의 전장으로서의 이단점(point of heresy)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알레고리로서의 ‘좀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좀비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나 해석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이단점, 상이한 해석들이 갈라져 나가면서 싸우는 전쟁터라고 보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이다. 「좀비 선언문」에서 라우로와 엠브리는 좀비를 근대의 자본주의적 주체 및 인간주의적 주체를 비판하고 대체할 새로운 포스트-인간주의적 주체의 형상으로 제시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좀비라는 알레고리가 활용되어온 역사 또한 간략하게 살펴보고 있는데, 그것은 좀비를 다르게 해석하기 위한 싸움의 역사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Lauro & Embry 2008). 라우로와 엠브리가 코헨(Daniel Cohen)을 참조하여 말하듯이 좀비 신화는 원래 아이티(Haiti)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에 따르면 좀비는 부두교의 마법을 쓰는 ‘의사’가 농장에서 밤새도록 노동하게 만들기 위해 죽은 자들을 무덤에서 일으켜 노예로 만든 것이다. 좀비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완전한 통제가 가능한 노예로 처음 ‘태어났다’. 그러나 아이티 혁명(1791년) 당시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이 스스로를 ‘합리적인’ 백인 군대에 맞서 한 몸처럼 떼를 지어 압도하는 수많은 ‘초자연적’ 존재들로 표상했을 때, 좀비는 이미 하나의 해석상의 전쟁터가 되었다. 이후 미국이 아이티를 점령했을 때 좀비 신화는 미국 문화 안으로 서서히 유입되었는데, 이때부터 좀비는 점차 서양인들에 의해 ‘식인주체’ 또는 ‘물어뜯는 주체’로 상상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마법이 아니라 바이러스 등에 의해 전염되어 발발하는 질병의 감염자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좀비는 식민지 원주민들의 야만성에 의해 자신들이 가진 문명이 오염될지도 모른다는 제국주의적 주체들의 불안감을 표현하는 알레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논자들이나 평론가들은 좀비를 쇼핑몰을 습관적으로 어슬렁거리는 자본주의적 소비자들 또는 식민지 노동자들의 산-노동을 씹어 삼키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에 대해 아무 생각 없는 제국주의 국가의 소비자들을 재현하는 알레고리로 만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라우로와 엠브리가 좀비를 반자본주의적인 포스트-인간주의적 주체라고 규정하고자 하는 최근의 시도 또한 이러한 해석 전쟁의 새로운 한 경향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좀비라는 알레고리에 대해 최근에 나온 몇몇 영화나 드라마가 접근하는 방식 상의 이단점을 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결론 부분에 가서는 나 또한 해석 전쟁의 가능한 전략들 가운데 하나를 가설적으로 소묘해 보고자 한다.

 

 

2. ‘숭고’로서의 좀비: 칸트와 하이데거를 중심으로

 

최근에 나온 좀비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두 가지 태도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쪽에는 좀비를 매우 공포스럽지만 또한 매우 추상적인 위협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쪽에는 좀비에게 나름대로 어떤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스토리를 부여하려는 태도가 있다.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그린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실 전자의 부류에서 영화의 관심은 좀비가 아니라 인간에게 가있는 셈이며, 후자의 부류에서 영화의 관심은 좀비에게 가있는 셈이다. 이런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는 심지어 동일한 감독이 만든 영화들에서 제각각 나타나기까지 하는데, 연상호 감독이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든 실사 영화 <부산행>(2016)과 애니메이션 영화 <서울역>(2016)은 동일한 알레고리를 적어도 외양상 정반대의 방향으로 풀어냈던 영화들이 아니었나 싶다. 필시 연상호 감독은 두 영화를 하나의 시리즈로 구상했던 것 같다. 서울역에서 좀비가 발발하고 막 퍼져나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아마도 석우(공유 분)는 자신의 딸을 데리고 부산행 열차에 올라탔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의 시리즈로 구상된 이 두 영화는 좀비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부산행>의 좀비들은 느닷없이 인간을 쫓아오기 시작하는 완전히 추상적이고 외적인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 <서울역>에서 좀비는 훨씬 더 개인화되어 있고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위협으로 나타난다.

 

먼저 <서울역>을 보자. 서울역을 전전하던 어떤 나이 많은 노숙자가 시름시름 앓다가 쓰러졌는데, 친구였던 또 다른 노숙자가 아픈 그를 위해 약을 구하러 갔다가 돈이 없어 소화제만 사들고 돌아와 보니 쓰러졌던 그가 사라졌고, 그리하여 그를 찾아 헤매다 접어든 골목길에서 좀비로 변한 그를 만나 물어 뜯겨 스스로 좀비로 변한다. 좀비가 된 또 다른 사람은 서울역 근처에서 몸을 팔면서 살고 있는 혜선이라는 여성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현재 빌붙어서 뜯어먹고 사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어 하지만 또한 그에게 다시금 의존하게 되는 여자이자, 과거에 한참 뜯어먹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를 다시 뜯어먹기 위해 쫓아오는 포주를 좀비가 되어 거꾸로 물어 뜯어주는 좀비 여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세상에 대한 어떤 원한의 스토리들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인간 이하로 취급받는 인간, 곧 과소인간의 세상에 대한 보복이라는 테마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부산행>에서 구체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쪽은 좀비가 아니라 인간들이다. 우선 남자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석우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석우는 매우 잘 나가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금융거래인이지만 동시에 아내와 이혼하고 딸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임신한 아내 성경(정유미 분)에게 절절 매면서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적과도 싸울 수 있고 스스로 목숨을 던질 각오까지 되어 있는 상화(마동석 분) 등 다른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저마다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로 그려진다.

 

좀비에 대한 이런 상반된 태도가 함축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기 위해 우리가 참조해볼만한 철학자 가운데에는 우선 칸트와 하이데거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반성적 판단의 일종인 취미판단 또는 미학적 판단의 문제를 다루면서, 미와 숭고를 대비시켜 논한다(Kant 1951). 칸트는 판단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하는데, 그 중 하나가 규정적 판단(determinate judgment)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반성적 판단(reflective judgment)이다. 이런 두 판단은 공히 직관(intuitions)과 개념(concepts)을 종합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지만 그 종합의 방향에 있어서는 서로 완전히 반대쪽으로 운동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규정적 판단은 예컨대 “이것은 고양이다”라는 식의 판단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은 “이것”(이 사물)의 독특성(singularity)을 “고양이”라는 일반적 개념 또는 범주 하에 포섭하는 것이다. 따라서 규정적 판단은 우리가 흔히 (넓은 의미에서) 이론적 판단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대로 반성적 판단은 예컨대 “이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것은 정말 독특하다”라던가 또는 역으로 “이것이 무엇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그러한 인식을 넘어가는 무언가 독자적인 것이 들어있다”라는 식의 판단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반성적 판단은 이것 또는 이 사물의 독특성을 개념의 일반성 하에 포섭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정반대로 그 사물의 독특성 그 자체를 겨냥하는 판단이다. 이 때문에 반성적 판단은 규정적 판단과 달리 일반적인 개념들 또는 범주들의 일관된 논리적 적용 가능성 내지 체계성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고 외려 그것들을 본래적인 이론적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분리하여 엉뚱하고 유희적인 방식으로 결합 또는 브리콜라주함으로써 어떤 사물의 독특성을 그 자체로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반성적 판단은 전형적으로 미학적 판단의 경우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판단이다(물론 칸트는 또 다른 반성적 판단의 예를 생물학적 판단에서 찾아낸다). 예컨대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을 보고 “이것은 변기이다”라고 규정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바로 그 작품이 감상자로 하여금 반성적 판단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반성적 판단은 다시 ‘미’와 ‘숭고’라는 두 가지 하위 범주로 나뉠 수 있다. 이 가운데 미(the beautiful)는 ‘목적 없는 목적성’(purposeless purposiveness)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바, 그것은 예컨대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 그 안에 있는 나무들, 풀들, 강물, 언덕 따위가 분명 어떤 목적을 위해 거기에 그렇게 놓여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군가(이를테면 신적인 존재)가 그것들을 어떤 목적을 위해 그 자리에 가져다 놓은 것처럼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감정이다. 각주2) 이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이나 예술작품이 갖는 미는 예쁘게 디자인된 가구나 도구 등과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목적이 없는 것인 반면, 후자는 분명한 사용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가구나 도구가 만일 하나의 예술작품 또는 유사-예술작품으로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들이 그것을 가구나 도구로서 대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갖는 기능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게 될 때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는 바로 이러한 전환을 통해 사물이 확보하게 되는 미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숭고(the sublime)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조화롭고 편안한 느낌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숭고는 오히려 어떤 대상이 우리 자신의 인식 능력(faculty)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고통을 야기할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칸트는 숭고를 다시 ‘수학적 숭고’와 ‘역동적 숭고’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수학적 숭고는 거대한 대상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예컨대 나이아가라 폭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이 너무나 거대하여 우리가 가진 상상(imagination)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히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곧바로 칸트는 이런 거대한 대상의 경험이 단순히 우리에게 고통만을 안겨준다면 그것이 미학적인 경험으로 나타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속에 숨어있거나 또는 거기에 은밀하게 이어지는 또 다른 인식과정을 분석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거대한 대상을 우리의 또 다른 인식 능력인 지성(understanding)을 사용하여 하나의 개념 안에 단번에 포획하는 과정이다. 요컨대 우리는 거대한 대상 앞에서 우리 상상력의 한계를 경험하지만 동시에 그 한계를 넘어서는 우리가 가진 또 다른 능력인 지성의 위대한 힘을 경험함으로써 그 고통을 승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칸트에 따르면, 수학적 숭고의 감정이란 인간이 거대한 대상 그 자체에 대해 갖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거대한 대상을 계기로 삼아 드러나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자기 긍정에서 유래하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동적 숭고 또한 이런 인간의 자기 긍정과 연결되어 있다. 역동적 숭고는 폭풍과 같이 폭력적인 자연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지만, 그것은 만일 우리가 폭풍의 한 복판에서 작은 조각배를 타고 집채 만한 파도에 둘러싸여 실제로 목숨이 경각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라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단순한 공포다. 칸트에 따르면 역동적 숭고는 오히려 그런 폭력적인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어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다. 예컨대 견고하고 안전한 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바다를 뒤흔들고 있는 폭풍을 바라보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역동적 숭고인 것이다. 각주3) 2011년 해양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쓰나미가 일본의 후쿠시마를 덮쳤을 때 TV를 통해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맥없이 사나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장면을 본 많은 한국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SNS에 ‘자연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숭고한 자연의 힘’ 등의 메지지를 대거 올렸었다. 그러나 이는 정작 일본에서 그 끔찍한 일을 겪고 있던 사람들은 가질 수 없었던 감정이다. 오직 멀리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감정인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것은 그러한 압도적인 자연을 정복하고 우리 자신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인간의 무한한 문명적 힘을 자기 긍정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좀비는 아마도 수학적 숭고와 역동적 숭고를 합쳐 놓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거대한 숫자로 나타나고 또한 너무나 압도적인 폭력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초기의 좀비 영화들과 달리 최근의 영화들(예컨대 <세계대전Z>)에서 좀비는 더욱 더 압도적인 숫자로, 더욱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려지고, 게다가 걷는다기보다는 인간과 마찬가지의 속도로 달리는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좀비 영화가 구현하는 미학적인 차원이 바로 숭고의 그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좀비는 사실 인간의 자기 긍정을 위한 또 하나의 문학·예술적 장치에 다름 아닐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좀비 영화의 관심은 좀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좀비 영화가 가정하는 아포칼립스적인 상황, 인류가 종말을 맞고 있는 상황이라는 설정은 이런 인간의 자기 긍정으로서의 숭고의 메커니즘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철학자는 바로 하이데거이다. 하이데거는 1935년에 행한 강의인 {형이상학 입문}에서 (비록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칸트의 역동적 숭고 개념에 준거하여 고대 그리스의 비극, 특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를 읽는다(Heidegger 1987). 그는 ‘인간은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기괴한 존재’라는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코러스의 노랫말을 해석하면서, (푸시스, 곧 ‘자연’으로 이해되는) 존재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오직 현존재(Dasein)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이 분유하고 있는 그 존재의 힘을 되돌려 존재 자체에 맞서기 위해 휘두를 줄 아는 폭력적인 존재로 묘사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 만든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보다 ‘두 배로 끔찍한 존재’(twice deinon)이기에 자연을 정복하여 역사를 만든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권력으로 나타나는 전체로서의 존재는 압도하는 것(the overpowering), [위에서 말한] 첫 번째 의미에서의 deinon[곧 압도하는 힘이라는 의미에서의 끔찍한 존재]이다. 인간은 끔직한 존재(deinon)인데, 우선 왜냐하면 그는 이런 압도적인 힘 안에서 노출된 채 남아 있기 때문이요, 본성상 그는 존재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끔찍한 존재인데, 왜냐하면 그는 위에서 지적한 의미에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힘을 모아서 그 힘을 명백하게 만든다.) 인간은 폭력적인데, 다른 속성들 이외에 그리고 다른 속성들과 함께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근본적 폭력(Gewalt-tätigkeit) 안에서 그가 [자신의] 힘을 압도하는 것(Überwältigende)[전체로서의 존재]에 맞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는 기원적으로 하나인 의미에서 두 배로 끔찍한 존재이고, 그는 가장 끔찍한 존재, 가장 힘 센 존재, 압도하는 것의 한 복판에서 폭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Heidegger 1987, 150) <<<

 

그런데 이런 인간의 투쟁은 바로 인간이 또한 ‘죽음을 향한 존재’(a being-toward-death)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가능성들을 파괴하는 절대적 한계로서의 죽음 앞에 서있기에,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폐지하는 죽음,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자신의 죽음을 다시 한 번 하나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전환시키는, 다시 말해서 가능한 불가능성으로 전환시키는 실존적 결단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오직 스스로가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는 자만이 홀로이 결단할 수 있다. 죽음=무=비존재로의 길(a path to non-being)은 따라서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 긍정 및 존재로의 길(a path to being) ― 외양으로의 길(a path to appearance)과 대조되는 ― 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이데거가 그 강의에서 당시 독일 민족의 상황을 미국과 소련이라는 핀셋의 두 팔 사이에 잡혀 민족이 소멸할지도 모를 상황으로 묘사하면서 나치즘의 전쟁과 폭력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좀비 영화에서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소멸할지도 모를 상황이 전개되지만, 이런 비존재로의 길, 죽음으로의 길로서의 아포칼립스적 상황은 근본적으로 숭고의 메커니즘과 전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더욱더 강렬한 인간의 자기 긍정의 경험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

 

사실 좀비에게 물려 스스로가 좀비가 되어가고 있는, 비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좀비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상황이야말로 바로 이런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현존재에게 결단을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부산행>의 절정에서 좀비로 변하고 있는 석우가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했던 석우가 자신의 인간성을 마침내 회복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또한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The Walking Dead)의 시즌 2의 제3화에서 사슴을 발견하고 다가가다 난데없이 날아온 사냥꾼의 총알에 맞아 죽어가는 아이를 두고 부모가 논쟁을 벌일 때 우리가 보는 것도 바로 인간의 자기 긍정이다. 로리는 남편 릭에게 죽음이 넘쳐나며 매순간 겁에 질려 살아야 하는 이런 끔직한 세상에서 아이를 살게 하느니 차라리 죽도록 놔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하고 따진다. 하지만 릭은 사고를 당한 아들이 잠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자신에게 남긴 말이 ‘사슴이 예쁘다’는 말이었다고 전하면서, 이 세상이 망해가도 죽음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며, 아름다운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인간에게도 희망은 있다고 말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고 살아 나가기 위해서는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이때 그 사슴은 더 이상 단순히 ‘예쁜 것’(미)이 아니라 사실 ‘숭고한 것’으로 등장하며, 그 상징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세상의 종말조차도 마스터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기 긍정의 정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좀비 영화는 역사 이후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역사 이후적인 상황에서조차 쓰여지길 멈추지 않는 인간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아이 엠 레전드>에서처럼 좀비 치료제를 만들어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구하는 인간이 있는 한 역사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외려 종말은 하나의 기회이다. 모든 인간의 타락을 씻어내고 역사의 원년을 새롭게 써나갈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이런 류의 좀비 영화나 드라마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적인 자기 동일성으로 끊임없이 복귀한다. 심지어 극한적 상황에서 거짓된 길을 택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고 투쟁하는 인간이 남아 있는 한 구원의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말이다.

 

 

3. ‘타자’로서의 좀비: 레비나스를 중심으로

 

그러나 모든 좀비 영화가 이런 인간의 자기 긍정을 숭고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서울역>과 같이 인간보다는 좀비에 더욱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영화들이 있다. 사실 좀비가 특이한 점은 그것이 정확히 ‘자연’은 아니라는 점이 아닌가? 예컨대 이리 떼와 좀비 떼는 둘 다 우리를 하나의 먹잇감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한 가지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바로 좀비는 우리의 ‘이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좀비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로서의 이웃의 매우 탁월한 형상화인 것처럼 보인다.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타자는 결코 우리에게 편안하거나 다정하거나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타자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성가신 존재, 더 나아가서 요구를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더욱더 자신의 요구를 키워나가며,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의 전존재를 요구하기에 이르는 몬스터와 같은 존재이다. 옛 중동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낙타처럼, 이웃은 처음에는 주인의 텐트 안으로 자신의 코만 집어넣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다음에는 머리를, 그 다음에는 상체를, 그리고 마침내 몸 전체를 넣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함으로써 주인을 텐트 바깥으로 내쫓는, 말하자면 파렴치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바로 우리의 1파운드의 살점을 주길 요구하는 이웃,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는 이웃으로서의 좀비야말로 레비나스적 의미에서의 타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타자가 요구를 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신체적 필요를 만족시켜야 하는 존재자(existent)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함으로 인해 그가 고통 속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타자}에서 레비나스는 정신적 구원(salvation)과 신체적 필요의 만족(satisfaction)을 대립시키는 관념론의 이율배반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투쟁은 이미 구원을 위한 [정신적] 투쟁과 대등한 지위에 서있는데, 왜냐하면 경제적 투쟁은 하이포스타시스[분화되어 있지 않은 익명적인 순수 존재 덩어리로서의 일리아(il y a)가 개체화/구체화되는 사건]의 변증법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고, 이 변증법을 통해서 첫 번째 자유가 구성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Levinas 1987, 61-62). 세상의 영양분을 취함으로써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최초의 물질성(배고픔)으로부터의 일정한 자유를 얻고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하이데거에게서처럼) 무로 소멸하는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로 충만한 익명적 일리아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물질성에 완전히 구속되어 오직 살아있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좀비들이야말로 가장 일리아에 가까워진 존재, 개체성을 상실한 익명의 비-주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좀비는 어쩌면 소멸로서의 죽음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알레고리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좀비를 보면서 불안해하는 것도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죽음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꾸면서 영원한 불면의 밤을 서성거리게 될 것이라는 점 때문일지도 모른다.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그의 독백에서 우려하고 있듯이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레비나스는 이런 타자들의 요구를 조건 없이 들어주는 데에서 우리의 윤리성이 구성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분명 나르시시즘적인 인간의 자기 긍정과는 거리가 먼, 아니 대척점에 서 있는, ‘타자성’에 대한 존중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레비나스적 관점이 모든 철학적 곤란들을 피해 가는 것인지는 우리에게 분명치 않다. 그것은 우선 타자에 대한 주체의 무조건적인 환대를 윤리성의 절대적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윤리적 책임의 무게 하에 주체를 질식시킨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심지어 레비나스적 주체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뿐만 아니라 타자 자신이 져야할 윤리적 책임까지 자신이 떠맡아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윤리적 책임을 견딜 수 있는 자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유대기독교적 정언명령에 따르자면각주4)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교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의 레위기 19장 17~18절이다. 물론 그 모든 복잡한 율법을 폐기하고 율법을 이 단순한 교리 하나로 환원한 것은 예수였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면에서 보면, 이웃사랑은 기독교적인 윤리일 뿐 아니라 유대교적인 윤리였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좀비 이웃에게 팔 하나쯤은 뚝 떼어 건네주는 것을 망설여선 안 될 것 같다. 아니, 우리의 몸 전체를 좀비에게 마음껏 물어뜯도록 바쳐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안에서 바로 이런 레비나스적 주체의 예를 찾는다면, 그것은 레비나스가 사랑해 마지않는 햄릿이 아니라 오히려 {오셀로}에 등장하는 데스데모나에게서일 것이다. (그것이 오셀로든 아니면 카시오든 간에) 타자의 요구에 늘 ‘예스!’라고 말하며 무조건적인 환대의 태도를 보이다가, 자신이 말 그대로 오셀로의 손아귀 안에서 질식하여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에조차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요’라고 말하는 데스데모나 말이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유대기독교적 윤리를 끔찍한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프로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 바 있었다. “인간은 그의 이웃을 희생시켜 공격성에 대한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려고 하고, 보상 없이 이웃의 노동을 착취하려고 하며, 이웃의 동의 없이 그를 성적으로 이용하려고 하고, 그를 굴복시키고 그에게 고통을 부과하며 고문하고 죽이려고 한다.”(Lacan 1992, 185) 이런 좀비와도 같은 이웃-타자를 향해 무조건적인 환대를 해야 한다는 레비나스의 관점은 그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윤리적 초자아의 잔혹성을 극단화시키는 가장 사드적이고 가장 폭력적인 관점으로 전도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제기되는 더욱 가공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레비나스의 윤리관이 타자를 위해 우리가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단언하면서, 바로 그 윤리적 제스처를 통해서 타자를 철저히 수동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윤리적 선택의 기회와 책임은 (선택이란 어쨌든 모종의 자율성을 가정하는 것인바) 언제나 주체에게만, 동일자에게만 귀속되고 있을 뿐, 타자는 그 모든 윤리적 선택의 기회 자체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타자와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한편으로 신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지만 사실 그 모든 신과의 대화는 주체의 모놀로그일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언제나 대화 아닌 대화, 불가능한 대화일 뿐, 타자의 목소리는 항상-여전히 저 초월적 너머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떠한 자율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물질적 필요에 의해서만 기계처럼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좀비가 레비나스적 타자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보면 진정 유일한 사례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져볼만 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서울역>에서 타자들을 구체화하고 개인적인 스토리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연상호 감독의 노력은 어떤 내적인 이율배반에 부딪히게 되는 것 같다. 자신을 뜯어먹기 위해 쫓아오는 포주를 혜선이 좀비가 되어 물어뜯을 때 그것은 오직 감독과 관객의 관점에서만 보복일 뿐 혜선은 보복의 주체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보복의 투영이지 좀비-타자의 보복이 아니며, 그렇게 좀비의 타자성은 동일자 안으로 재전유된다.

 

사실 나는 마찬가지 이유로, {좀비 선언문}에서 라우로와 엠브리가 좀비를 포스트-휴머니즘적 주체 또는 오히려 비-주체의 진정한 모델로 제시할 때 그것이 어떤 이론적 곤란을 숨기거나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곤란의 가장 눈에 띠는 징후는 그들이 좀비를 존재자적(ontic)이면서 동시에 유령적(hauntic)인 존재라고 제시할 때 드러난다. 좀비가 존재자적이라는 것은 분명히 이해될 수 있는 말이지만, 좀비가 또한 유령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어폐가 있기 때문이다. 좀비는 ‘령’ 또는 ‘혼령’이 아니다. 좀비는 령 없는 존재, 스피릿을 빼앗긴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이 좀비에 령의 차원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좀비라는 알레고리만으로는 정치적 주체화라는 문제를 사유하기 곤란하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에 일본에서 만든 좀비 영화 <아이 엠 어 히어로>(I am a hero)가 인간과 좀비 사이의 (비)존재로서 어떤 소녀 주인공을 등장시킨 것도 아마 이런 곤란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소녀는 인간에서 좀비로 변하다가 멈춘 중간적 존재로 등장하는데, 그렇게 멈춤으로써만 그녀는 남자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신체는 좀비처럼 파워풀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아직 좀비처럼 의식 없는 비주체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그 영화 안에서 의미 있는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그렇게 좀비와 인간 사이의 어떤 중간지대를 설정하는 것이야말로 휴머니즘으로의 복귀, 그 무엇보다도 강력할 수 있는 인간주의적 나르시시즘으로의 복귀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남자 주인공이 위기에 빠진 바로 그 때에만 좀비처럼 힘 센 존재로 잠깐 등장하고 그 뒤로는 아주 무기력한 존재로 줄곧 그려지고 있는데,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 어떤 자보다 강력한, 심지어 죽이고 죽여도 죽지 않는 전직 농구선수 좀비보다도 더 강력한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히어로’로서의 남자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심지어 사회적으로 힘을 잃은 별 볼일 없는 남성을 다시 숭고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판타지를 만드는 것으로 퇴행하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휴머니즘은 인간적이기 위하여 언제나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인간의 한계 또는 범위를 정해야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거기에 속하지 않는 모종의 인간들을 인간에서 배제해 오지 않았는가? 휴머니즘은 따라서 항상 역사 속에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동반하고 다닐 수밖에 없는데, <아이 엠 어 히어로>의 반인반좀비로서의 여성의 신체야말로 우리는 휴머니즘적 인종주의와 휴머니즘적 성차별주의가 접합되고 있는 바로 그 장소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며

 

인간과 좀비의 이율배반(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을 갖는 이율배반)을 그 중간적 존재라는 타협점을 통해 풀어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나는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하여 서두에서 언급했던 나의 가설적인 해석 전쟁의 전략을 한번 제안해 보고 싶다. 오히려 우리는, 좀비라는 알레고리는 그것과 유사해 보이지만 차이가 나는 또 다른 알레고리들과 함께 연결하여 사유할 때 좀 더 효과적으로 전유될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맑스가 자본을 산 노동을 빨아 먹음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는 축적된 죽은 노동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을 ‘뱀파이어’에 비유했을 때각주5) 이 비유는 노동일을 논하는 {자본} 제1권의 10장에 등장한다. “자본은 뱀파이어와 같이 살아있는 노동을 빨아먹음으로써만 살고, 더 많은 노동을 빨면 빨수록 더 많이 사는 죽은 노동이다. 노동자가 노동하는 시간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산 노동력을 소비하는 시간이다. 만일 노동자가 [노동 과정에서] 소모할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를 위해 소비한다면,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강도짓을 하는 것이다.” (Marx 1990, 342)., 정확히 그 반대편에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좀비’라는 알레고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럴 듯하다. 좀비라는 알레고리는 확실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허기져 있는 배고픈 대중들을 재-현하는 문학적 장치로 해석될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정치적 주체화’라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거나 맹목점에 놔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러한 허점을 보충하는 인간적 차원, 동일자적 차원을 작가나 감독 등으로 하여금 다시금 좀비 안으로 밀수입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는 또 다른 알레고리의 대당을 도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주권자의 형상을 보름달이 뜰 때마다 늑대로 변하는 ‘늑대 인간’(werewolf)과 접근시킨 바 있는데, 그 대척점에 놓여 있는 알레고리는 (호모 사케르라기 보다는) 주권권력에 늘 따라붙으며 출몰하는 데리다적 의미에서의 ‘유령’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Agamben 1998).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면 뱀파이어-늑대인간과 맞서는 좀비-유령이라는 알레고리들의 대립 구도를 상상해 봄직도 하지 않은가? 그것은 어떠한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적어도 이러한 알레고리들의 접합이 단순히 하나의 알레고리만을 특권화시키는 방식보다는 훨씬 더 많은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인용문헌

“Allegory".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Allegory (2017년 2월 15일 접근).

Agamben, Giorgio. 1998.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translated by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Heidegger, Martin. 1987. An Introduction to Metaphysics, translated by Ralph Manheim,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Kant, Immanuel. 1951. Critique of Judgment, translated by J. H. Bernard, New York: Hafner Press.

Lacan, Jacques. 1992.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Seminar VII, 1959-1960), edited by Jacques-Alain Miller, translated by Dennis Porter,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Lauro, Sarah Juliet & Embry, Karen. 2008. "A Zombie Manifesto: The Nonhuman Condition in the Era of Advanced Capitalism", Boundary 2, vol. 35 no. 1: 85~108.

Levinas, Emmanuel. 1987. Time and the Other, translated by Richard A. Cohen, Pittsburgh: Duquesne University Press.

Marx, Karl. 1990.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1, translated by Ben Fowkes, New York: Penguin Books in association with New Left Review.

 

국문초록

이 논문은 좀비라는 알레고리에 영화들이 접근하는 두 가지 매우 상이한 방식들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편에는 좀비를 추상적이고 외적인 위협으로 그리면서 좀비들보다는 인간들에게 좀 더 구체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영화들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좀비들을 개인적 서사를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존재들로 접근하는 영화들이 있다. 예컨대, 2016년에 상영된 좀비에 관한 두 편의 한국영화 <부산행>과 <서울역>은 심지어 연상호라는 같은 감독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두 상반된 태도들을 보여준다. 이 논문은 이런 두 상반된 태도가 두 상이한 철학적 입장들과 연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인간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쪽은 칸트와 하이데거의 입장에 연결될 수 있고, 좀비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쪽은 레비나스의 입장에 연결될 수 있다. 먼저 좀비는 그 용어의 칸트적 의미에서 숭고의 효과를 생산하기 위해 고안된 알레고리로 해석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좀비는 관객에게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감정을 가져다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좀비 영화가 인간이 거의 종말에 도달한 아포칼립스적 상황을 묘사한다는 사실은 이 같은 숭고의 감정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킨다. <형이상학입문>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로의 길(진리의 길)과 외양으로의 길(진리은폐의 길)은 오직 비존재로의 길(죽음)이 그것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현존재의 실존주의적 결단은 오직 자기 자신의 소멸이라는 임박한 위험이 있는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와 하이데거 양자 모두 자연의 압도적인 힘에 대항하여 행사되는 인간의 힘을 긍정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숭고에 대한 그들의 개념화는 인간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적이다. 반면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좀비는 그가 타인(l'autrui)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종국에는 우리의 목숨 자체를 요구하는 이웃으로서의 타인이 그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란 타인의 모든 요구에 “예,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데에 놓여있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칸트와 하이데거와는 완전히 대립된 위치에 서있다. 그렇지만 본 논문은 레비나스 또한 곤란들을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먼저, 타인이 행하는 윤리적 요구는 너무나 과도한 것이어서 주체를 마비시키고 질식시키는 것이라는 점이 있다. 둘째, 레비나스는 타인을 윤리적으로 완전히 수동적인 지점에 위치시킨다. 마치 타인 자신은 윤리적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두 번째 종류의 좀비 영화(좀비에게 더 구체적 관심을 갖는)가 좀비를 좀 더 능동적으로 만들기 위해 좀비를 다시 인간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논문은 이런 곤란을 우회하기 위해 좀비의 알레고리를 유령의 알레고리와 결합시키는 것이 어떨까 하는 대안적 해석 전략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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