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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벨의 관점에서 본 오스틴과 비트겐슈타인

marxpino 2024. 4. 30. 22:38

이 글은 약 20년 전에 쓴 것이지만, 출판되지는 않은 글입니다. 비트겐슈타인 초기와 후기 사이에는 큰 단절이 있습니다. 이 글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 대해 쓴 글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바디우는 초기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한 듯합니다만, 저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이더군요. 이런 저의 관점은 라캉에 대한 또 다른 글에서도 엿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물론 저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입장입니다). 어쨌든 카벨을 따라 오스틴과 비트겐슈타인 간의 쟁점을 살펴 봅니다. 즐독 되시길.

 


 

 

카벨의 관점에서 본 오스틴과 비트겐슈타인

 

최 원

 

Stanley Cavell

 

1. 들어가며

『이성의 주장들(Claims of Reason)』에서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은 존 랭셔 오스틴(John Langshaw Austin)의 판단 개념과 (후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판단 개념의 성격을 비교하고, 어떤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판단 개념이 오스틴의 것보다 더 심오한지를 논한다. 카벨에 따르면, 이 양자 간에는 수렴과 발산이 있다. 수렴은, 판단기준(criteria)에 기초한 판단은 대상의 실존(existence)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상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것이라는 양자의 공유된 입장에 놓여 있다. 반면 발산은 주로 그 두 철학자가 각각 어떤 종류의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에 있다. 예컨대 오스틴이 선호하는 대상이 ‘오색방울새(goldfinch)’라면 비트겐슈타인이 선호하는 대상은 ‘의자(chair)’다. 선호하는 대상의 종류에서의 차이는 다시 이 두 철학자의 상이한 판단기준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글에서 나는 카벨의 설명을 재구성해보는 것을 기본목표로 삼지만 결론 부분에서 약간의 문제제기를 시도할 것이다. 두 번째 절에서 나는 오스틴의 판단 개념이 어떻게 전통적 인식론자(traditional epistemologists)의 것과 다른지 검토하고, 오스틴이 논하는 판단의 종류는 대상의 실존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대상의 정체성에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시도할 것이다. 세 번째 절에서 나는 오스틴과 비트겐슈타인의 상이한 대상 선택이 그들 각각의 철학적 질문들과 관련해서 무엇을 함의하며, 이 차이가 어떻게 그들의 상이한 판단기준 개념의 형성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검토해볼 것이다. 또한 나는 판단기준에 기초한 판단이 실패할 때 저 두 철학자에게 어떤 상이한 결과가 뒤따르는지, 또 이 차이가 그들의 윤리관의 측면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John Langshaw Austin

 

2. 일상 언어 철학 대(對) 전통적 인식론

카벨에 따르면 오스틴이 자신의 에세이 「타인의 마음(Other Minds)」에서 답하려고 시도하는 주된 질문은, 예컨대, “지금 정원에 오색방울새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와 같은 앎의 문제, 지식의 문제이다. 물론 이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 나는 오색방울새(그리고 아마도 다른 새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경험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정도는 당연한 조건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와 같은 정보와 경험을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내가 지금 정원에 오색방울새가 있다는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는 뜻일까? 오스틴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두 종류의 상황을 구별한다. 하나는 내 판단이 타인에 의해 의문시되지 않는 “정상 상황(normal situation)”이라면, 다른 하나는 내 판단이 타인에 의해 실제로 의문시 되는 “특별 상황(special situation)”이다. 특별 상황에서 타인은 나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저것은 박제된 오색방울새가 아닙니까? 나는 저것이 진짜 오색방울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상 상황에서는 내가 어떤 주장을 펼치기 위해 주어진 문제(이 경우엔 오색방울새)에 대한 나의 전문가로서의 자격과 경험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이 경우 “충분하다”는 것은 그것이 박제된 오색방울새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나의 판단이 반박되지 않는 한 나는 그것이 진짜 오색방울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조사를 진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스틴에게 정상 상황에서의 앎의 문제는 대상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에 엄격히 제한되며 대상의 실존(진짜임)의 확립은 관련이 없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판단기준의 사용을 대상의 정체성의 결정에만 제한해야 하고 그 기준들을 대상의 실존의 확립으로까지 확대해선 안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와 같은 구분의 의미를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 카벨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조류도감을 보여주면서, “여기 오색방울새가 있나요?”라고 묻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당신은 그 조류도감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오색방울새를 발견한다. 그래서 당신은, “맞습니다. 여기 오색방울새가 있네요.”라고 답한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편이 당신은 지금 실수를 범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진짜 오색방울새가 아니라 단지 오색방울새의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면, 당신은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카벨이 이 사례에서 끌어내고자 하는 논점은 판단기준에 기초한 판단은 대상의 실존이 아닌 그것의 정체성에 대해 행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이 사례를 논하기 전에 카벨은 이미 “그런 것임(being so)”와 “그런 것임(being so)”를 구분함으로써 유사한 주장을 펼친바 있다(CR, 제2장). 이 같은 구분을 위해 그는 자신이 아프다고 거짓 연기를 하는 사람의 사례를 든다. 어떤 사람이 신음소리 같이 통증을 표현하는 행동을 내보이는 것을 당신이 목격할 때 당신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아프구나 하는 판단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가 진짜로 아프다는 것을 당신이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그런 척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카벨에 따르면 심지어 그가 단지 아픈 척하는 경우라도, 당신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런 척하고 있는(is feigning) 거군요. 하지만 그가 통증이 아니라면 뭘 연기하고 있단 말이요?” 이런 방식으로 거짓 연기 속에서조차 통증이라는 개념 자체는 보존된다. 그가 통증을 경험하고 있다는 당신의 판단(그의 “그런 것임being so”)은 올바른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만일 애초에 통증의 개념이 없었다면 그는 통증을 연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판단기준들의 힘, 그 필연성은 진실과 거짓(연기하기) 양자 모두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는 데에 있다. 판단기준들은 어떤 이의 상태(그런 것임)를 식별하기를 원하는 사람 뿐 아니라 심지어 그와 같은 상태를 거짓으로 연기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스스로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짓말을 하는 주체는 항상 자신이 거짓 연기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판단기준을 지켜야만 한다.

다른 한편, 대상의 정체성이 아닌 대상의 실존에 관심이 있는 것은 전통적 인식론자들이다. 전통적 인식론자들과 일상 언어 철학자 오스틴 간의 앎의 질문에 대한 접근 상의 차이는 대상의 상이한 선택에 의해 표현된다. 오스틴은 테이블, 의자, (데카르트의 『성찰』에 등장하는) 밀랍 조각 등과 같은 전통적 인식론자들의 대상 선택을 비판한다. 오스틴은 이 같은 “보잘 것 없는, 임의적인” 대상들은 앎의 문제, 지식의 문제를 정체성 식별의 문제로서 또는 올바른 기술(description)의 문제로서 제기할 수 없게 만들며, 그리하여 그 대상선택은 출발점에서부터 철학적 조사를 편향되게 만들고 망쳐놓는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서, 테이블, 의자, 밀랍 조각 등과 같이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례는 우리의 일상 언어 사용에 있어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정체성 식별의 문제를 이끌어내기엔 너무 단순하다는 것이다.

오스틴의 이런 비판을 섬세하게 가공하면서, 카벨은 총칭적 대상(generic objects)과 종별적 대상(specific objects)이라는 두 종류의 대상을 구분한다. 그는 총칭적 대상을 “그것에 관해서는 인지나 식별이나 기술(description)의 문제가 없고, 만일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실존하는지, 실재인지, 실제로 거기에 있는지를 말하는 문제만 유일하게 있는 대상”이라고 규정한다(테이블, 의자, 밀랍 조각). 반대로 종별적 대상은 “그것이 무엇인지(what it is)”를 말해야 하는 문제가 있는 오스틴적 대상이다(CR, pp. 52~53). 그러므로 “오색방울새”와 같은 사례가 전통적 인식론자들의 텍스트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그와 같은 사례는 인식론자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벨은 또한 이런 구분은 총칭적 대상과 종별적 대상이 상호 배타적인 것이라는 식으로(그러니까 오색방울새는 총칭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구분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대상을 전통적 인식론자의 관점에서 보는가, 아니면 일상 언어 철학의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생겨난다. 그리하여 어떤 대상(즉 어떤 대상이든 간에)이 전통적 인식론자들에게 제시될 때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안에(또는 그 대상 뒤에) 있는 “인지할 수 없는 어떤 것”(예컨대 존재)을 인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종별적 대상과 총칭적 대상 간의 구분이 칸트가 수립한 서술어(predicates)와 실존(existence)의 구분과 얼마간 유사하다는 점을 보게 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신의 존재 증명, 특히 데카르트의 그것을 비판한다. 칸트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신의 존재 증명은 서술어와 실존에 대한 근본적 혼동에 기초해 있다.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신은 존재하는 것으로서만 생각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존재는 신의 완전함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완전하다”). 그러나 칸트는 완전함이란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든 간에 여전히 하나의 서술어(predicate)에 불과하며, 따라서 만일 존재가 사실로서 상정되면 그 존재에 속하는 그 모든 서술어도 함께 상정되지만, 반면에 존재가 취소되면 그 모든 서술어들도 역시 취소되기에, 신의 존재는 신의 속성들(완전함)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종별적 대상이란 그 쟁점이 그 대상의 올바른 기술(서술)에 있지 그것의 존재에 있지 않은 대상을 말하고, 총칭적 대상은 이와 대조되어 규정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저 두 종류의 대상 간의 카벨적 구분은 궁극적으로 칸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카벨은, 칸트가 물자체 개념을 지성(understanding)의 범주들에 내적인 것으로, 즉 대상 일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의 일부로서 사유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칸트 사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내가 파악하기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비록 칸트가 물자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의 앎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칸트는 물자체라는 개념이 어떻게 앎 자체의 바로 그 가능성을 구성하는지, 즉 우리의 의식에 내적인 물자체 개념이 없다면 왜 우리는 그 어떤 것을 인식하는 일을 시작조차 할 수 없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자체는 앎을 위한 추동의 힘(driving force)의 원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는 욕망과 심지어 알아야 한다는 의무까지 부여한다. 카벨은 물자체와 신의 관념이라는 칸트의 두 개념을 비교한다. 양자 모두 초감각적인 것이지만, 칸트가 그 둘을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 신의 관념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특징은 그것이 단순히 세계의 “외부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꿔 말해서 칸트에게 그것은 인간의 알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 욕망은 앎의 영역 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즉 이러저러한 지식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지만) 앎의 영역의 가능성을 구성한다. 카벨은 물자체라는 개념 또한 신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사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대상의 외부성은 그것이 지식과 아무 상관없다는 의미로 이해되거나 그것이 단순히 지식 너머에 있다는 의미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대상의 외부성은 “세계를 드러내지만, 사물들을 아는 능력으로 소진되지 않는 인간의 역량, 책임, 욕망”이라는 정확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CR, p. 54).

바로 이런 이유로 전통적 인식론자들의 대상은, 카벨에 따르면, 여전히 철학적으로 유의미하다. 그들의 대상은 확실히 정체성 식별을 위한 종별적 대상이 아니지만 여전히 지식의 가능성에 관계된 또 다른 일군의 문제들을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갖고 제기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스틴의 대상은 종별적 대상이며 대상에 대한 판단기준을 넘어서는 어떤 점검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어떤 회의론자가 다가와서 존중의 감정 없이, 즉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진지한 욕망 없이, 공격적인 질문을 던진다면(“그것이 오색방울새인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그 대상의 존재나 실재를 확실한 방식으로 보장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그 대상이 총칭적 대상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전통적 인식론자들이 관심을 갖는 총칭적 대상은 정체성이 아닌 다른 문제를 제기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예컨대, 테이블, 의자, 밀랍 조각은 그것이 무엇인지 식별함에 있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종류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군가는 예의를 갖추어 물을 수 있다. “당신은 저기에 의자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오스틴이 대상의 존재나 실재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고 말한 “특별 상황”에 진입한다. 오스틴은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카벨은, 만일 오스틴이 거기에는 더 이상 답할 문제가 남아 있지 않다거나 그 문제는 쟁점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이 같은 질문을 무시한다면, 이는 오스틴이 전통적 인식론자들만큼이나 교조적임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카벨이 여기서 “교조적”이라고 말할 때, 이는 일상 언어와 철학 언어를 완전히 갈라놓고 한쪽만 취하면서 다른 쪽에는 완전히 눈을 감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일상 언어 철학자는 전통적 인식론자들이 너무 철학적이라고 비난하며, 반대로 전통적 인식론자들은 일상 언어 철학자가 철학적 문제를 사유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오스틴이 총칭적 대상의 존재나 실재에 관한 질문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는 추가적인 새로운 판단기준들을 찾아보는 것 외엔 사실상 그 질문에 철학적으로 답할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다. 카벨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자신의 논점을 명료하게 만든다. 일상 언어 철학자가 총칭적 대상으로서의 정원에 있는 오색방울새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그 새에게 다가가 그 새가 움직이나 알아보기 위해 그것을 부드럽게 찔러볼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그 새가 움직인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것이 진짜 오색방울새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것은 실제로는 일종의 로봇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번엔 그가 그 새를 움켜쥐고 수술용 칼로 배를 갈라 봤는데 온갖 내장과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그는 그 새가 진짜 오색방울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만일 어떤 사람이 오색방울새의 가죽 안에 어떤 믿을 수 없는 장치와 함께 온갖 내장이나 피 등을 집어넣어서 그 오색방울새처럼 보이는 것이 움직이도록 만들어 놨다면 어쩔 것인가? 이 같은 방식으로 회의론의 질문들은 어떤 뚜렷한 종결 없이 무한히 이어질 수 있다. 즉, 추가적 판단기준은 총칭적 대상의 존재나 실재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스틴 자신이 지식의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오스틴은 때때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진짜 오색방울새라고 믿었던 새가 우리의 눈앞에서 갑자기 폭발할 수 있다(아마도 그것은 폭탄이 설치되어 있던 극단적으로 세련된 로봇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식의 실패에 대한 오스틴의 반응은 “[그런 경우] 우리는 그것이 오색방울새라고 말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른다. 말이 문자 그대로 우리를 실망시킨다(Words literally fail us).”이다. 하지만 여기서 카벨은 이 같은 실패를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카벨은, 이 경우 말은 우리를 “실망/실패”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압도(overwhelm)”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는 깜짝 생일파티에서 놀라며 할 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 때 확실히 말은 우리를 “실망/실패”시키는데, 이는 그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분명 이 현상에는 어떤 좋은 이유가 있음에 틀림없어.” 즉 우리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찾기 시작한다. 설사 우리가 어떤 미신적인 믿음 안에서 그 답을 구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답을 구하는 것이 우리에겐 반드시 해야 할 어떤 일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바로 말의 본성이다. 말은 지식의 실패를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 안에 어떤 공백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공백 안으로 흘러 들어가 채우기 시작한다. 말은 우리를 압도한다고 카벨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우리는 앞서 카벨이 칸트의 물자체 개념에 대해 논하면서 그 개념이 지식의 영역 내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즉 “세계를 드러내지만, 사물들을 아는 능력으로 소진되지 않는 인간의 역량, 책임, 욕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봤다. 말은 우리를 압도하며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이상한 것이든 간에) 우리가 대하는 현상을 온갖 가능한 방식들로(과학적이든, 종교적이든, 미신적이든 간에) 해석하게 만든다는 카벨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인간 존재 안에는 정보 데이터 가운데 하나로 결코 간주되어선 안 되는 언어적이거나 담론적인 추동의 힘(인간의 역량, 책임, 욕망)이 있다.

 

Ludwig Wittgenstein

 

3. 오스틴의 판단기준 대(對)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

『이성의 주장』의 제4장에서 카벨은 오스틴의 판단기준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의 것과 완전히 유사하진 않다고 말한다. 카벨에 따르면 양자의 수렴 지점은 둘 다 판단기준을 실존이나 실재의 표지가 아니라 정체성 식별의 표지로서 기능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다. 반면 발산 지점은 판단기준이 적용되어야 할 대상을 그 두 철학자가 상이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오스틴의 판단기준 개념은 종별적 대상들을 향해 있다면, 비트겐슈타인의 것은 총칭적 대상들을 향해 있다. 하지만 만일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 개념이 총칭적 대상과 관련된다면, 그것이 어떻게 정체성 식별의 표지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카벨은 총칭적 대상이란 존재나 실재가 쟁점인 종류의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너무 섣부르게 결론내리지 말고 카벨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카벨에 따르면, 오스틴의 경우 어떤 대상을 판단기준에 기초해서 식별한다는 것은 사물을 명명하는 것, 즉 어떤 사물이 무엇이라고 불리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주어진 대상에 대한 판단기준을 알고 그 대상에 어떤 이름을 적용하는 것을 내가 정당화할 수 있다면,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적임자라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대상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내가 모른다면 나는 그 대상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스틴에 따르면, “그 대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또는 관례적으로 (또는 개략적으로, 관습적으로) 무엇이라 불리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CR, p. 66).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는 꽤 다르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문제가 되는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들의 특정한 이름을 결여하고 있는 대상들이 아니다. 그 대상들은 어떤 의식의 상태(고통과 같은)나 또는 이름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어떤 물리적 대상들(의자 같은)이다. 우리는 주어진 대상들에 대한 판단기준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비트겐슈타인의 경우는 대상을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 최선의 경우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오게 된다. 어떤 대상과 마주할 때 그 대상의 이름이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식별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카벨은 우리가 외국의 어떤 부족을 방문하고 있을 때 보게 된 의자의 예를 가지고 나온다. 우리는 의자에 대한 완전한 판단기준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의자로 규정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대상은 의자의 완벽한 예이며 우리는 심지어 그 외국인들이 우리가 통상 의자라고 번역하는 용어를 말하는 것을 듣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그 외국인들이 그 대상을 사용하는 방식은 우리가 의자를 사용하는 방식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들은 우리가 의자에 앉는 방식으로(그러니까 의자의 선이 변화하는 대로 우리의 몸을 구부러뜨리면서) 그 대상 위에 앉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의자라고 확신하거나 또는 거의 확신할 수 있는가? 지금 이 질문은 그 동일한 대상이 우리의 세계 안에서 발견되었다면 전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판단기준 하에서 그것은 분명히 어떤 의문의 여지도 없이 의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판단기준이 아니라 그 외국인들의 판단기준들이다.

이 예는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 개념이 개념(즉 이름이나 단어)과 대상 간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곧바로 보여준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개념과 다른 개념들 간의 무수히 많은 관계들을 수립하는 문제다. 개념적 준거들의 전체 그물망이 예컨대 의자라는 개념을 향해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적 그물망을 안다는 것은 어떤 문화의 온전한 구성원 자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철학적 탐구』(이하 PI)의 첫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든다.

나는 누군가에게 쇼핑을 하러 보낸다. 나는 그에게 ‘다섯 개의 빨간 사과’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네준다. 그는 그 종이를 가게 점원에게 가져가고, 그 점원은 ‘사과’라고 적힌 서랍을 연다. 그리고 표에서 ‘빨간’이라는 단어를 찾아 본 후 그 단어에 대응하는 색깔을 찾아내고, 그 다음에 일련의 기수(cardinal numbers) ― 나는 그가 이 기수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 를 ‘다섯’에 이를 때까지 말해 나가면서 각각의 숫자를 말할 때마다 같은 서랍에서 샘플과 같은 색의 사과를 꺼낸다. ― 우리가 단어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이다. ― ‘그렇지만 그는 ’빨간‘이라는 단어를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볼지, 그리고 ‘다섯’이라는 단어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아는가?’ ― 글쎄, 나는 내가 묘사한 것처럼 그가 행동한다고 가정한다. 설명이 어딘가에서 종결된다. ― 그러나 ‘다섯’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 그런 것은 여기서 문제가 아니었고, 단지 ‘다섯’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만이 문제였다.”(PI, §1)

이 예는 단어들(‘다섯’, ‘빨간’, ‘사과’)와 대상들 사이의 관계들을 수립하는 것은 종이 위에 적힌 단어들을 이해하는 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점원은 쇼핑, 도움, 심부름, 색깔, 과일, 식료품 가게 등을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모든 개념들로부터 의미를 만들어 내면서 그 개념들 사이의 어떤 의미론적 연결을 형성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는 심부름을 보낸 사람과 가게 점원 양자에 의해 공유되는 어떤 공통의 토대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 개념은 대상의 실재나 실존이 아니라 정체성 식별에 관련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종별적 대상이 아니라 총칭적 대상을 향해 있다고 카벨이 말한 것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판단기준은 문법적 설명을 위한 것이다. 판단기준들은 대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의 확실성을 단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주어진 대상 안에서 여전히 발견될 수 있는) 추가적인 특징이나 표지, 추가적인 정보 조각이 아니다. 우리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판단기준(즉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식별하는 것은 대상 자체에 준거하거나 대상의 특징들에 준거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의 개념과 또 다른 이웃하는 개념들의 문법적 연결(grammatical connectedness)에 준거함으로써 ― 이 연결이 말의 활용, 즉 화용이다 ―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들의 연결은 오직 공통의 삶(common life) 속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공통의 삶이야말로 사실 모든 개념들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은 확실히 이와 같은 기원을 식별하고 인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 판단기준들은 대상들의 개념들의 발생론에 관련된다.

그렇게 해서 카벨은, 오스틴의 판단기준은 종별적 대상들을 다루는 비-문법적 판단기준인 반면,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은 총칭적 대상을 다루는 문법적 판단기준이라고 주장한다. 카벨은 이렇게 말한다. “[오스틴에게] 판단기준은 이 이름을 저 대상(또는 저 대상의 종류)에 관련시킨다. 그것은 판단기준을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가에 대한 완전한 시험이다. … [반면 비트겐슈타인에게] 판단기준은 대상에 이름을 관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개념에 다른 다양한 개념들을 관련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당신이 개념을 소유하고 있는가에 대한 시험은 당신이 … 그 개념을 다른 개념들과 연결시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있다.”(CR, p. 73)

따라서 오스틴의 대상들은 이런저런 부류(class)의 종별적 대상들이다. 그것들은 분류들(classifications)과 관련된다. 만일 어떤 대상이 속해 있는 부류를 알아보고 그로써 여려 총칭적 대상들이 그 아래 포섭될 수 있는 올바른 이름으로 그 대상을 부른다면, 당신은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비트겐슈타인의 대상은 자연적인 종류(의자, 테이블 등)이거나 또는 형이상학적인 종류(고통, 마음, 색깔 등)다. 따라서 거기엔 그것들을 어떻게 명명할까 하는 쟁점이 특별히 없거나(자연적인 종류의 경우), 또는 대상들에 대한 궁극적으로 감각적인 접근 자체가 부정되어 있다(형이상학적인 종류의 경우).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대상의 올바른 이름을 알기에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대상의 이름을 다양한 상황들과 문맥 속에서 사용할 수 있기에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은 실패하지 않는 반면 오스틴의 판단기준은 실패한다는 뜻인가? 카벨에 따르면, 오스틴의 판단기준만큼이나 비트겐슈타인의 판단기준도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패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만일 당신이 어떤 대상에 대한 오스틴적인 비-문법적 판단기준을 모른다면, 그것은 당신이 어떤 정보를 결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당신이 정원에 있는 새가 오색방울새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 이는 당신이 오색방울새나 다른 새들에 대한 충분한 경험이 없거나 또는 당신이 유사한 모습을 가진 다른 새들로부터 오색방울새를 구분할 수 있는 표지나 특징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 당신이 충분히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오색방울새를 식별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단지 조류 전문가에게 가서 물어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 당신이 만일 어떤 대상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적인 문법적 판단기준을 모른다면, 그것은 당신이 단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지식의 가능성 자체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러한가? 왜냐하면 대상에 대한 문법적 판단기준은 단지 문제의 그 대상의 개념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많은 다른 개념들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실패는 단지 하나의 이름을 하나의 대상과 일대일 대응시키는 데에서 생겨난 실패가 아니라 개념적 시스템 전체의 실패인 것이다. 이는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이 그 언어적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신이 공통의 삶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체성 식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떤 특권화된 주체도 있을 수 없는 총칭적 대상(의자)을 예로 드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비록 어떤 대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최선의 경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가 실패할 수 있는 경우(의자 또는 외국 부족이 가진 의자처럼 생긴 어떤 사물),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문법적 판단기준의 결여 때문에 어떤 대상의 정체성을 식별하는 데에 실패한다 해도, 우리는 (오스틴적 주체처럼) 전문가에게 가서 새로운 판단기준을 배울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당신이 새로운 대상에 대해선 전혀 배울 수 없다는 뜻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새로운 대상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는 당신이 그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즉 당신은 그 대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현상에 침투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탐구는 현상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 현상의 ‘가능성들’을 향해 있다. 곧, 우리는 현상에 대해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진술의 종류에 대해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 우리의 탐구는 그러므로 문법적인 탐구이다.”(PI, §90) 이 같은 가능성은 우리가 다른 대상과 현상에 대해 이미 가지고 있는 단어들과 개념들에 의해 제공된다. 우리가 새로운 대상을 마주칠 때 우리는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개념과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념과 단어를 자의적인 방식으로 그 대상에 적용하지 않는다. 거기엔 어떤 패턴이나 방향이 있는데, 이는 카벨이 문법적 도식(grammatical schematism)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카벨은 이렇게 말한다. “그 도식은 판단기준의 집합을 표시하는데, 이 판단기준에 입각해서 단어는 그 모든 문법적 문맥들 속에서 적용된다. 그 단어가 적절하고 적절한 것으로 드러날 그 문법적 맥락들 말이다.”(CR, p. 77) 개념은 새로운 대상이나 새로운 문맥에 저항하는 고정되고 단단해진 실체가 아니다. 그리고 이는 애초에 우리가 하나의 이름을 하나의 대상에 직접 관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하나의 단어를 하나의 대상이나 일군의 대상에 고정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개념들의 그물망을 통해서만 하나의 대상에 우리 자신을 관련시킨다.

그렇지만,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대상에도 종국적으로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대상을 우회하고 개념들의 그물망을 가지고 그것을 포위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 그 자체를 결코 포획하지 못한다. 완전한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카벨이 판단기준이란 실망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때 나는 이 말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 카벨은 이렇게 말한다. “[판단기준은] 나의 말이 다른 이들의 고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나의 말은 의도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CR, p. 79)

바로 여기가 회의론자들이 자신의 의심이 옳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곳이다. 판단기준들은 예컨대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 그 자체에 나를 데려다 주지 못한다. 내가 그 판단(‘저 사람은 정말 고통 속에 있다’)을 실재로서 받아들일지의 여부는 궁극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카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야말로 철학적 문제다. 내가 문제다. 소통의 회로가 끊어지는 것은 내 안에서이다. 나야말로 굴러가는 바퀴가 부딪혀 부서지는 돌부리다.”(CR, p. 83) 그러므로, 회의론자는 판단기준에 대한 나의 사용이 자의적이고 사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 내에서의 판단기준의 공유를 일종의 환상적인 우연이나 일종의 집단 광기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론적 확실성의 영역을 떠나 도덕적 확실성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은 바로 여기, 바로 이 대목에서다. 판단기준은 타인이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왜 받아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궁극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이 같은 받아들임은 나의 책임, 타인에 대한 나의 답하고자 하는 태도이며, 따라서 그것은 본성상 도덕적인 것이다.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바로 “삶의 형태(forms of life)”이다. 만일 내가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타인들과 나의 소통들은 파괴될 뿐 아니라 삶/생명의 개념 그 자체도 파괴될 것이다. 나의 삶, 나의 실존까지도. 카벨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판단기준이 생명체의 내적 생명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 삼아 주어진 생명체의 심리학적 상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유예하거나 얼버무리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내 생각의 원천을 유예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유예하는 것, 무엇이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나의 반응/대답/책임을 거부하는 것이다.”(CR, p. 83) 삶/생명은 단지 인식론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 탐구의 대상이다.

4. 나오며

결론을 대신하여 숙고해 봐야할 문제를 한번 제기해 보자. 카벨의 해석에 따르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각각의 문화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형태에 따른 고유한 개념들의 망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내가 속한 고유한 문화가 아닌 타인의 고유한 문화의 언어 또는 문법적 구조를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다른 나라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일까?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은 번역을 하나의 보트에서 다른 보트로 점프하여 건너 타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문화와 언어가 폐쇄적인 시스템이라면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사실 그 점프는 열 번 가운데 한 번이라도 성공할 수 있을까가 불확실한 기적과도 같을 어떤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나 지속적으로 번역에 성공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번역의 실천들 속에서 우리의 고유하다고 가정되는 그 언어가 늘 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고를 전도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립된 언어체계들이 먼저 있고 번역은 그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늘 번역을 하고 있고, 그 번역이 어떤 잠정적인 방식으로 상대적으로 안정화되는 것이 언어체계가 아닌가 자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화용은 독특한 장소들에서 조우하는 주체들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삶의 형태”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정하고 있는 삶의 전제들이 다소간 늘 부딪히며 변형되는 그런 과정, 늘 다시 타자성을 향해 열려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언어 이전에 번역이 항상 이미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타인의 고통은 완전히 다른 저편에 있는, 내가 가닿을 수 없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늘 번역의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나에게 윤리적으로 요구하는 어떤 것, 타인의 것만도 아니고 나의 것만도 아닌 어떤 ‘사이’의 다양한 판단의 망설임, 협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오해와 배신과 좌절, 하지만 의미의 어떤 실패할 수도 있는 우편배달과 텔레커뮤니케이션(데리다 Jacques Derrida)의 시도의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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