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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의 라캉 비판의 문제점 (강의노트)

marxpino 2023. 5. 13. 15:03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종종 정신분석에 대해 오해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라캉에 대한 오독은 문제가 많다. 이는 특히 지난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 근본적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오히려 라캉이 더 잘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버틀러가 라캉을 오독했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젠더 형성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 자체를 기각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상세한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들어가기 앞서서 중요한 개념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

라캉은 성별들의 구조적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 두 가지 축을 도입한다. 하나는 사랑의 요구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축이다. 여기서 사랑의 요구의 축이란 타자가 자기를 욕망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따라서 사랑의 요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팔루스가 된다(to be the phallus)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타자의 욕망의 기표, 타자가 욕망하는 것은 바로 팔루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욕망의 축은 주체가 욕망하는 축이다. 무엇을 욕망하는가? 바로 팔루스를 욕망한다. 이는 자신이 팔루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안에 있거나 있다고 가정되는 팔루스를 욕망하는 것이다. 이 두 축이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는가에 따라 각각의 성별이 갖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1. 라캉에서 팔루스‘이다’는 여성이고 팔루스를 ‘가지다’는 남성인가?

여기 인용하는 것은 라캉의 "팔루스의 의미작용"으로부터 온 것이다.

"Paradoxical as this formulation may seem, I am saying that it is in order to be the phallus--that is, the signifier of the Other's desire--that a woman rejects an essential part of femininity, namely, all its attributes, in the masquerade. It is for what she is not that she expects to be desired as well as loved. But she finds the signifier of her own desire in the body of the person to whom her demand for love is addressed. It should not be forgotten, of course, that the organ that is endowed with this signifying function takes on the value of a fetish thereby. But the result for a woman remains that two things converge on the same object: an experience of love that, as such (see above), ideally deprives her of what the object gives, and a desire that finds its signifier in this object. This is why one may find that a lack of satisfaction of sexual needs, in other words, frigidity, is relatively well tolerated by women, whereas the Verdrangung inherent in desire is less in them than in men."

Lacan, "The Signification of Phallus“

위 문단에서 대충 라캉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이렇다. 

타자의 욕망의 기표(즉 타자가 욕망하는 것)는 팔루스인데, 여성은 팔루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기가 팔루스인 척하기 위해,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의 핵심적 부분을 부인한다. 즉 그녀는 자기가 아닌 것으로서(즉 팔루스로서) 욕망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자신이 사랑을 요구하는 타자(남자)의 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기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결과, 여성에게서는 두 가지가 수렴하게 된다. 사랑의 경험(이는 자신이 팔루스인척 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그것은 전형적으로 그녀에게서 그 대상-페니스-이 주는 것[성적 욕구의 만족]을 빼앗는다)과 욕망(이 대상에서 자신의 기표를 발견하는 욕망), 이 두 가지가 동일한 대상(페니스)에서 수렴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은 성적 욕구(need)가 만족되지 않는 것을 잘 참고 성적으로 차가울(frigid) 수 있는 반면, 욕망에 본래적인 억압은 남자들에게서보다 적게 갖는다. 

이 문단에 대조되면서 이어지는 부분은 남자에 대한 것인데,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사랑에 대한 요구는 만족시키는 반면(여성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사랑 안에서 주는 자로 구성된다), 팔루스에 대한 욕망은 한 여자 안에서 만족되지 않기에(왜냐하면 그녀는 팔루스를 가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또 다른 여자를 찾게 된다(바람 피운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남자는 팔루스를 가지고 있는(to have) 존재이고 여자는 팔루스인(to be)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남자는 페니스를 가지고 있고 페니스는 팔루스가 아니기 때문에, 라캉은 남자는 대타자가 욕망하는 팔루스이고자(to be the phallus) 한다고, 그리고 그 관점에선 그가 가지고 있는 것(페니스)은 그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 나은 게 없다고 앞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사랑에 대한 요구와 욕망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다르게 배치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사랑에 대한 요구의 만족과 팔루스에 대한 욕망이 수렴하는 구조라면, 남성은 두 가지가 발산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2. 가면이라는 이슈

다시, 버틀러는 라캉의 구절을 오독/왜곡한다..(게다가 이 오독을 국역자가 더 강화한다. 영어 인용문에 없는 말을 집어 넣어서).

버틀러는 다음과 같은 라캉의 말을 인용하면서 괄호 안에 자신의 견해를 삽입한다.

"이는 '보인다'는 것이 개입하여 생긴 일인데, 이 '보인다'는 것은 '가진다'는 것을 대체한다. (물론 대체는 필요하다. 여성들은 '가지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니까.-버틀러) 그것은 한편으론 여성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것의 결핍을 위장하기 위해서이다." (국역본 174~75쪽)

먼저 여기서 "여성의 위치"라는 표현은 라캉의 원문에도, 버틀러의 영어 인용에도 없는 것이다. 국역자가 자의로 집어넣은 것이다.

라캉의 원래 문장은 이렇다. 

Ceci par l'intervention d'un paraître qui se substitue à l'avoir, pour le protéger d'un côté, pour en masquer le manque dans l'autre ......

This is brought about by the intervention of a seeming that replaces the having in order to protect it, in one case, and to mask the lack thereof, in the other .....

여기서 한편d'un côté은 남자의 편을 말하고, 다른 편에서dans l'autre는 여자의 편을 말한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이는 한편에서는[남자의 편에서는] 가지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편에서는[여자의 편에서는] 가지기의 결여를 위장하기 위해, 가지기를 대체하는 보이기의 개입에 의해 [야기된다].” 

그런데 버틀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 ‘보이기’가 마치 여성만의 이야기인 듯이 논의를 진행한다. 

“여기엔 어떤 문법적 젠더도 없다고 하지만, 라캉은 ‘결핍’이 특징적이고 따라서 위장이 필요한 여자, 그리고 구체화되지 못하고 보호가 필요한 여자의 위치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이건 내 번역이다. 국역자는 또 다시 없는 말을 자의적으로 집어넣는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버틀러 자신이 이어서 인용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왜 라캉은 양성 모두에 대해 말하고 있을까? “['가지기'를 대체하는 이 '보이기'는] 양성 각각의 행동의 이상적이거나 전형적인 발현을, 성 결합의 행위라는 한계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코미디[의 영역으]로 던져 넣는 효과를 갖는다.” (이것도 내 번역)

라캉의 문장 전체를 인용해보자.

Ceci par l'intervention d'un paraître qui se substitue à l'avoir, pour le protéger d'un côté, pour en masquer le manque dans l'autre, et qui a pour effet de projeter entièrement les manifestations idéales ou typiques du comportement de chacun des sexes, jusqu'à la limite de l'acte de la copulation, dans la comédie.

영어번역은 이렇다.

This is brought about by the intervention of a seeming that replaces the having in order to protect it, in one case, and to mask the lack thereof, in the other, and whose effect is to completely project the ideal or typical manifestations of each of the sexes' behavior, including the act of copulation itself, into the realm of comedy.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대타자의 욕망은 늘 팔루스를 향하기 때문에(대타자의 욕망의 기표가 팔루스),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남자와 여자는 공히 모두 팔루스이고자(to be the phallus)하지만, 남자는 팔루스가 아닌 페니스를 가지고 있고, 그 페니스를 보호하기 위해서(즉 거세 공포 때문에) 보이기로 가지기를 대체하고, 여자는 팔루스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장함으로써 팔루스인 척 하기 위해서, 보이기로 가지기를 대체한다는 것이다.

 

3. 라캉이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를 부정?

버틀러가 라캉에 대해 비판하는 것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라캉은 관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레즈비언의 탈성화(desexualization)된 위상, 욕망의 부재로 보이는 일종의 거부의 합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결론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섹슈얼리티 자체의 거부로 받아들이는, 이성애적이고 남성적인 관찰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섹슈얼리티는 단지 이성애적인 것으로만 간주되고, 이성애 남성으로 구성된 관찰자는 명백히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러한 설명은 관찰자를 실망시키는 거부의 결과가 아닌가?" (<젠더 트러블>국역판 180쪽)

이 비판은 라캉이 거의 글의 끝에 가서 "여성 동성애는 실망으로 인해 사랑의 요구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지워진다"(즉 욕망은 약화시키는 쪽으로 간다)고 말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버틀러는 그런데 사실 레즈비언이 느낀다고 라캉이 주장하는 "실망"이란 사실 이성애 남성인 관찰자(라캉 자신)의 실망의 역투사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버틀러에 따르면 라캉은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를 부인한다.

그런데 이건 라캉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고 가해지는 비판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라캉은 '사랑의 요구'와 '욕망'의 두 축을 설정하고 그것의 배치를 통해서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구조를 설명하려고 했다. 여기서 '사랑의 요구'는 자신이 대타자가 욕망하는 바의 팔루스가 되는 것(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로 '욕망'은 팔루스에 대한 욕망으로서 자신이 욕망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레즈비언은 사랑의 요구를 강화하면서 욕망을 약화시킨다. 반대로 게이의 경우 욕망을 강화하면서 사랑의 요구를 약화시킨다. 즉 레즈비언은 남자에게 있다고 가정되는 팔루스를 욕망하길 그만두고, 사랑의 요구(자신이 모성적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팔루스가 되는 쪽)를 강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면, 게이는 팔루스를 욕망하는 쪽을 강화해서 더 이상 팔루스를 가지지 않은 여성이 아니라 팔루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남성 파트너를 원하는 쪽으로 간다. 

그러므로 라캉이 레즈비언이 느끼는 "실망"이라고 여기서 부른 것은 남성들이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팔루스가 사실은 팔루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오는 실망(그것은 페니스일 뿐이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라캉은 레즈비언에게 섹슈얼리티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섹슈얼리티가 자신이 팔루스가 되는 쪽(사랑의 요구)으로 정향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버틀러가 라캉에 대해 길게 논하는 반면, 그곳에서 버틀러가 참조하는 텍스트는 10쪽 남짓의 <팔루스의 의미작용> 하나다. 그것도 그 마지막 3-4쪽. 버틀러가 충분히 라캉의 논의를 이해했다고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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