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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오피스
* 20년 전, 뉴 스쿨 대학 석사시절 때 썼던 에세이다. 학술지에 출판된 적은 없다. 헤겔은 정신(Spirit)에 도달하기 이전, 의식이 통과하게 되는 그 모든 형상들은 정신 그 자신의 추상적인 자기-분석을 구성할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 역사는 정신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헤겔은 정신의 그 긴 여행의 출발점에 ‘허구’의 분석, 즉 소포클레스의 문학작품 『안티고네』의 분석을 위치시킨다. 따라서, 앞서의 진술 속에서 ‘실제’(“실제 역사...”)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는 바는 통상적인 이해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역사는 의식이나 자아(the Self)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를 지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신은 정확히 자아와 세계가 더 이상 그렇게 대립된..
에서 버틀러는 종종 정신분석에 대해 오해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라캉에 대한 오독은 문제가 많다. 이는 특히 지난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 근본적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오히려 라캉이 더 잘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버틀러가 라캉을 오독했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젠더 형성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 자체를 기각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상세한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들어가기 앞서서 중요한 개념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 라캉은 성별들의 구조적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 두 가지 축을 도입한다. 하나는 사랑의 요구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축이다. 여기서 사랑의 요구의 축이란 타자가 자기를 욕망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따라서 사랑의 요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욕..
단국대에서 5년 정도 주디스 버틀러를 강의해 왔고 이번 학기에도 강의했다. 여기 강의 노트 일부를 공유한다. 버틀러의 2부 5장은 게일 루빈에 대한 (양가적인, 즉 비판을 통한 긍정의, 탈구축적인) 논의다. 게일 루빈은 이라는 저서에서 성해방의 관점에서 매우 스캔달적인 주장들을 펼치면서, 심지어 범죄적으로 보이는 성욕(예컨대 소아성애자의 성욕) 까지도 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는 80년대 초에 있었던 이른바 sex war의 양진영, 즉 sex positive(섹스는 좋은 것인데, 법 또는 권력이 그것을 억압한다)와 sex negative(섹스는 그 자체로 나쁘고 폭력적이다) 가운데 sex positive의 진영에 속한다. 버틀러는 이 입장을 비판하면서 법 이전적인 성욕, 법을 파괴함으로써 해방시..
2022년 10월에 출판된 저널 (vol. 32, no. 4)에 실린 Pablo Vila, Matthew T. Ford & Edward Avery-Natale의 논문 "Althusserian Interpellations: Intellectual Trajectory and New Avenues"에는 십 년 전에 제가 동일한 저널에 출판했던 "Inception or Interpellation? The Slovenian School, Butler, and Althusser"(vol. 25, no. 1)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저로서는 영광스럽고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문의 첫 문단만 여기 인용해 봅니다(본격적인 논의는 좀 뒤에 나옵니다). A few years ago, Won Choi (20..
이 글은 발리바르가 2022년 10월 1일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발표한 글의 초역입니다. 현정세에서 너무나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이고 또 개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옮겼지만, 초역이니만큼 오역이 있을 수 있다는 점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아마 발리바르가 영어로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영어가 조금 이상한 부분이 몇몇 군데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자가 조금 개입을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 있었음을 말씀 드립니다. 본래의 영문본은 다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Étienne Balibar | Uncovering Lines of Escape: Towards a Concept of Concrete Utopia in the Age of Catastrophes – Utopia 13/13 (columbi..
국문초록 이 논문은 발리바르의 논의를 지침 삼아,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전체론)를 모두 거부하면서 개인과 집단을 하나의 동일한 구조 내에서 통일시키는 과개체론을 사유한 방식에 대해 고찰한다. 동시에 이 논문은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상이한 내용을 이론화하면서도 어떻게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하게 되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는데, 과개체성의 이중 구축 및 과개체성의 초과라는 특징들이 그것들이다. 이 논문은 스피노자가 개체들의 합성과 분해라는 관념을 통해 국가라는 상위 개체의 구축(인간 개인들의 합성)을 사유하면서도 그것이 진정한 개체를 형성하기보다는 단지 유사-개체에 이르게 되는 이유를 밝힌다. 또한 이 논문은 마르크스가 청년 시절에 가졌던 소외의 문제설정을, 과개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론화를 통..
이번에 (민주주의사회연구소 기관지)에 실린 글입니다. 완전히 새 글은 아닙니다만 학술지에 실렸던 글은 아니라, 나중에 좀 더 확장해서 학술지에 낼 수는 있을 거 같습니다. 각주는 모두 생략했습니다.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 최 원(단국대) 1. 서론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1990년대부터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폭력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제어하려는 전통적인 모델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 첫 번째는 국가에 의한 폭력적 수단들의 독점을 통해 사회로부터 폭력을 제거하려는 ‘폭력 독점’(monopoly of violence)의 모델이며, 이 모델은 주지하다시피 『리바이어던(Leviathan)』..
십수 년 전에 거의 다 번역해 놨었지만 잊고 있다 컴퓨터에서 발견하고 최근 마무리 지었습니다. 1982년에 출판된 글이니 아주 오래된 글이죠. 특히 마지막 결론 부분은 발리바르의 입장이 변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국가권력장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최근의 에서는 명시적으로 국가권력장악은 국가주의적인 사고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바쿠닌주의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최 원) * 『맑스주의 고증사전 Dictionnaire critique du marxisme』, eds. Labica-Bensussan, PUF, 1982, pp. 85-91. (프루동주의자들과 계속된 논쟁을 제외하면) 1868년 이전에 아나키즘 문제는 맑스와 맑스주의에게 단지 부차적 중요성만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