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2019. 12. 7. 13:01

* 회원 모집이 종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Jacques Lacan

 

 

  • 교재: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새물결)
  • 지도: 최 원 (<라캉 또는 알튀세르> 저자)
  • 시간: 2020년 1월~3월 매주 목요일 7시 30분 (첫 모임: 1월 9일, 1월 23일 휴강, 세미나 진행상황에 따라 일정이 조정될 수 있습니다.)
  • 장소: 공중캠프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150, 대로변이 아니라 와우공원 올라가는 언덕길에 출입구가 있습니다.)
  • 회비: 무료 (세미나 시 공중캠프 음료/주류 주문)
  • [참가신청방법] wonchoi68 @ hotmail.com 으로 이메일을 주시거나 페이스북 메신저 주시면 됩니다. 

         (첫 모임 때는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될 예정이고, 교재의 1장만 읽어오시면 되겠습니다.)

 

 

라캉의 열한 번 째 세미나인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1964)은 라캉이 국제정신분석협회 및 프랑스정신분석협회에서 파문 당하고, 생트 안느 병원에서도 쫓겨나, 파리 고등사범학교로 옮겨와 처음으로 진행했던 세미나로, 프랑스 인문학의 최고 지성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선보이고 자신이 생각하는 정신분석학이 무엇인지를 제시했던 세미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에 대한 그의 근본적 생각이 체계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3개월 동안 이 텍스트를 철저히 해부하고 퍼즐을 맞추듯 재구성하여 거의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라캉에 대한 해설서나 2차 문헌은 넘쳐 나지만, 오히려 그것들이 라캉에 대한 오해에 더 기여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세미나는 우리가 함께 라캉의 진수를 맛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세미나를 마친 시점에 우리는 라캉의 다른 텍스트들을 마구 누비고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갖게 될 것입니다.

 

세미나 형식은 <공중캠프>의 "알콜토크" 포맷으로 진행됩니다. 물론 술을 원하지 않는 분은 소프트 드링크(Non-Alchoholic Drinks)를 주문하셔도 됩니다. http://kuchu-camp.net/xe/82011

 

우리는 이 강독 세미나를 마친 후 지속적으로 세미나 모임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공부 주제와 세미나 방식 등에 대해서는 서로 논의하여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오래 동안 이어질 지적 우정과 배움의 기쁨을 나누는 이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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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xp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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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9. 11. 20. 20:39

* 이 글은 오래전에 중대 자유인문 캠프 강연을 논문형식으로 옮겨 <문화과학> 지면에 발표했던 글이다. 몇몇 소소한 각주들이 있지만, 각주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최원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이 지젝의 주도로 런던, 뉴욕, 베를린에서 이미 세 차례에 걸쳐 개최된 “공산주의라는 이념(The Idea of Communism)” 컨퍼런스가 작년 9월 24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바디우와 지젝 뿐 아니라 많은 국내외 좌파 학자들이 함께한 이 컨퍼런스는 비록 한국의 레드 콤플렉스를 경계하여 명칭을 “멈춰라, 생각하라! 공통적인 것과 무위의 공동체를 위한 철학 축제”라고 바꿨지만, 그것이 매년 시리즈로 열려온 “공산주의라는 이념” 컨퍼런스에 속해 있는 대회였다는 점에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게 필자는 이 컨퍼런스가 열리기 약 1년 전에 국내에서 컨퍼런스에 대한 준비를 주도하고 있던 이택광 교수(경희대)와 만난 사적인 자리에서 이 컨퍼런스가 서울에서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이야기도 하나 전해 들었는데, 그것은 에티엔 발리바르가 이 대회에 참여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조금 의아했지만, 두 번째 열렸던 뉴욕 컨퍼런스에 그가 참여한 바 있었기에 그땐 그가 오더라도 아주 이상한 일까진 아니겠거니 하면서 넘어갔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는 서울 컨퍼런스에 오지 않았다. 왜 오지 않았을까? 필자는 이것이 단지 일정상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데, 이 글은 어쩌면 그가 오지 않은 이유를 필자 나름대로 해명해 보고자 쓴 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컨퍼런스의 기원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적 가설』이라는 바디우의 책자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 바로 “공산주의라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념(idea)이라는 용어는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적 의미에서의 형상(eidos, 이데아) 개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관념’이라고 옮길 수도 있지만, 또한 그것이 이상적인 것(the ideal)과 맺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념’이라고 옮기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하나의 이념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주장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 특히 맑스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을 항상 유물론자로 천명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디우가 어떤 의미에서 공산주의를 이념(관념)이라고 규정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발리바르는 바디우의 이러한 생각에 일단 동의하면서 공산주의를 이념이라고 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정당하다고 평가하지만, 동시에 바디우가 말하는 이념의 그 성격을 문제로 삼는다. 먼저 우리는 바디우의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이어서 거기에 대한 발리바르의 문제제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필자가 바디우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기회와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바디우를 조금씩 공부해나가고는 있지만, 그의 논의를 모두 섭렵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필자로선 조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고 또 한편으론 독자들에게 송구스러운 일이 아닌가 우려된다. 사실 이 글의 모태가 된 것은 작년 11월에 중앙대학교 자유인문캠프의 초청으로 필자가 행했던 “공산주의라는 쟁점”이라는 강연이었는데, 주최 측에서 애초에 잡았던 큰 주제가 ‘공산주의’였고(나중에 강연을 했던 또 다른 선생님들과의 조율 과정에서 주제가 ‘국가와 정치’로 바뀌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라는 쟁점을 둘러싼 바디우와 발리바르의 논쟁을 소개하는 강연을 준비했던 것이다. 자유인문캠프에서 처음에 ‘공산주의’를 주제로 잡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서울에서 열렸던 “공산주의라는 이념” 컨퍼런스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바디우의 ‘공산주의적 가설’이 어떤 검토를 요구하는 지적 또는 이론적 정세가 있다는 뜻이고, 필자 또한 그러한 정세에 어느 정도는 부응할 필요를 느낀다. 부족하지만 이 글을 앞으로의 공부와 고민에 대한 하나의 작은 약속으로 여기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1. 바디우의 공산주의라는 이념

 

바디우는 수학의 집합론을 가지고 존재론을 해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존재와 사건』에서 그는 이러한 해석을 체계화했는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제목의 이 책에서 바디우는, 존재론이야말로 철학의 본령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고 존재론은 오히려 수학의 영역이라는 일견 놀라운 주장을 전개한다. 곧 존재론적 필연성의 법칙을 연구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수학(특히 집합이론)이며, 철학은 오히려 이러한 존재론적 필연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른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이 연구해야 할 이 다른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발본적인 우발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사건이라는 것은 동시에 하나의 주체적 방향성(orientation)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수학적 필연성을 벗어나는 것은 주체적인 것이고, 따라서 사건의 우발성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주체에 관련되어 있다(그의 스승 가운데 하나인 루이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이 주체를 배제하는 것이라면 사건에 대한 바디우의 이념론/관념론은 주체를 우발성의 적극적이고 본질적인 계기로 파악한다). 사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매우 사르트르적인 것이다(청년시절 바디우는 열렬한 사르트르주의자였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 ‘무(Nothingness)’라는 것은 단순히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파괴’를 뜻하는 것인데, 사르트르는 자연에는 실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파괴가 없으며 파괴는 오직 주체 쪽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자연 안에도 산이 무너진다든지 강이 마른다든지 하는 이러저러한 변화(따라서 파괴적으로 보이는 변화)가 있지만, 자연의 인과적 필연성의 작동 그 자체를 중단시키는 파괴는 오직 주체의 개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디우도 자연에는 사건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기존의 필연성의 장 내에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가능성을 도입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주체의 ‘실존적 결단’이라고 말한다. 이 논리가 하이데거적인 사건 개념(Ereignis, 현전-으로의-도래)과 결합함으로써 세련화되는데, 그 세련화의 수단을 이루는 것이 바로 수학의 집합론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집합론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기에(사실 이는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 필요한 부분만을 간략하게 살펴볼까 한다.

 

집합은 기본적으로 현시(presentation), 곧 자신에게 속하는 이러저러한 원소들을 현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집합은 원소들을 무작위로 뽑아 현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질서 또는 구조에 따라 현시한다. 곧 그 집합이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자신에게 속하는 것만을 자신의 원소로 현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집합이 갖는 이러한 포함과 배제의 질서를 바디우는 “상황의 상태(the State of a situation)”라고 명명한다(여기서 ‘상태’에 해당하는 ‘State’라는 말에는 중의적으로 ‘국가’라는 뜻도 들어가 있음에 유의하자). 반면 이 집합의 질서에 의해 현시된 가능성들을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들이 현시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그것을 바디우는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진리가 돌발하며, 철학이 연구해야 할 주제도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이 점에서 바디우의 진리 개념은 ‘드러남’ 또는 ‘탈은폐’로서의 진리라는 하이데거적 진리 개념―aletheia―을 부분적으로 계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수학집합론, 특히 20세기 초에 발전된 제르멜로-프랭켈의 집합론(the Zermelo-Fraenkel set theory)에서는 이러한 사건 개념이 인정되지 않는다. 바디우 식으로 말하자면, 집합론은 오직 존재론적 필연성의 영역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는 우발성의 영역을 출발점에서부터 미리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르멜로-프랭켈의 집합론이 근본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라캉을 비롯한 현대의 많은 이론가들이 주목하는)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역설이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카탈로그들의 카탈로그’를 구성함에 있어 생겨나는 논리적 모순을 일컫는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름의 카탈로그를 만들 수 있다. 예컨대 산에 대한 카탈로그를 만든다면 그 안에는 백두산, 한라산, 금강산, 지리산 등의 원소들이 포함될 것이고, 강에 대한 카탈로그를 만든다면 그 안에는 한강, 두만강, 낙동강, 압록강 등의 원소들이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카탈로그들은 그 안에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산이라는 집합 안에 세상에 있는 모든 산의 이름을 다 써넣을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 단적으로 ‘산’이라는 원소를 써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강이라는 집합도 마찬가지인데, 거기엔 모든 강의 이름을 다 써넣을 수 있지만, ‘강’이라는 원소를 써넣을 수는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카탈로그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카탈로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이러한 카탈로그들의 카탈로그, 다시 말해서 일종의 ‘메타-카탈로그’를 만들려고 시도하게 되면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메타-카탈로그 안에는 ‘산’이라는 카탈로그, ‘강’이라는 카탈로그,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의 카탈로그들이 모두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메타-카탈로그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자기 집합 안에 써넣지 않으면, 그 자신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카탈로그’라는 기준을 만족하게 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도록 강제된다. 그렇다고 만일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원소들 가운데 하나로 목록에 포함시키면, 곧바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카탈로그’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집합에서 배제하도록 강제된다. 이러한 메타적 의미의 집합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면 이와 같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이 생겨나기 때문에 제르멜로-프렝켈의 집합이론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한다. 예컨대, 빨간 것들의 집합(reds)은 {빨간 장미, 빨간 산타클로스의 복장, 빨간 소방차, .... }라고 쓸 수 있지만, 그 집합 자체가 빨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집합이 자신의 이름을 포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라는 관념은 짖지 않는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개라는 관념에는 이러저러한 (짖는) 개들이 포함되지만 (짖지 않는) 개라는 관념 그 자체가 그 안에 포함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디우에 따르면, 제르멜로-프랭켈의 집합이론이 부인하는 것과 달리,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집합이 생겨날 때, 집합론의 필연성 또는 존재의 법칙을 허물고 새로운 필연성을 정초하는 사건이 발발한다. 어떤 집합이 그러하다는 것일까? 가령 빨갛지 않은 것들의 집합(non-reds)이 그러하다. 우리는 이것을 {투명한 꽃병, 푸른 스머프, 하얀 병원응급차, ... }와 같이 구성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위에서 논한 빨간 것들의 집합의 경우와 한 가지 점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빨갛지 않은 것들의 집합이라는 것 또한 집합 그 자체가 빨간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빨갛지 않은 것’이라는 기준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곧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원소란 항상 또한 하나의 부분집합이라고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합론에 대한 논의가 도대체 공산주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이렇게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이 출현할 때 이를 바디우는 사건 또는 진리사건이라고 부른다. 물론 바디우에게 진리사건은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종류의 진리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정치, 과학, 예술, 사랑(정신분석학의 테마로서의 사랑). 이들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진리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대해 논하고 있으므로, 정치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디우가 말하는 정치적 진리사건이란 단적으로 해방적 사건, 봉기적 사건을 지칭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적 진리사건 또한 그것이 진리사건인 한에서 바로 우리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의 출현이라는 역설적 사건으로서 돌발한다.

 

물론 역사상 일어났던 그 모든 봉기적 사건들이 다 진리사건인 것은 아니다. 바디우는 (필자가 보기에) 사건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진정한 진리사건이 역사상 두 번 일어났다고 보는 것 같다. 먼저 고대에 예수 부활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1871년에 일어난 파리 코뮌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바디우는 이렇게 발본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적 진리사건은 날짜까지 꼭 집어 확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부활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파리 코뮌의 경우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코뮌의 경우 1871년 3월 18일이 바로 그날인데, 알다시피 파리 코뮌은 그날로부터 시작하여 5월 21일 정부군의 침탈이 자행될 때까지 지속되었다(28일에 진압이 완료되었고, 수만 명이 학살당한 이 일주일간을 사람들은 ‘피의 일주일’이라고 부른다).

 

1871년 3월 18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 전해인 18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의 술책에 넘어가 (나중에 보불전쟁이라고 불리게 될) 전쟁을 벌이다 70년 9월 2일 스당(Sedan)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이로부터 이틀이 지난 9월 4일에는 파리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 제정이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들어선다. 하지만 이때 권력을 잡은 것은 민중이 아니라 공화주의 정치가인 피카르드, 티에르 등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민중봉기로 인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프랑스가 이 시점에서 전쟁을 끝냈던 것은 아니다. 계속 전쟁을 수행하다가 프랑스 정부는 1871년 1월 28일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프로이센에 항복하게 되는데, 그 결과 전쟁에 패한 프랑스 공화주의 정부는 프로이센의 굴욕적인 항복조항을 받아들여야 했다. 특히 국민방위군으로 조직되어 있던 인민(이들은 여전히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을 무장해제해야 했으며, 이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특히 대포)를 회수해야 했다. 3월 18일 새벽 3시 정부는 분견대를 파견하여 기습적으로 국민방위군의 대포 3정을 회수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이들은 곧 파리의 여성들에 의해 발각되어 제지를 당하고, 이를 지켜보던 파리의 인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자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심지어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설득당해 정부 편에서 빠져나와 민중 편에 가담한다). 이것이 바로 민중봉기의 시작이다. 정부청사였던 오텔 드 빌(Hôtel de ville)에서 30명 정도 되는 대표자들이 다음 날(19일)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선언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1871년 3월 18일 봉기는 정치사에 있어서 (종래의 혁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출현시키면서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일련의 봉기들의 집합의 이름’이 되었다. 그 집합 안에는 파리 코뮌을 필두로 러시아 혁명, 중국 문화 대혁명과 같은 일련의 혁명이 원소로 포함되는데, 이 후자의 혁명들은 모두 파리 코뮌(1871년 3월 18일)에 스스로 준거함으로써 집합 전체의 이름을 ‘파리 코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파리코뮌 =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 중국 문화대혁명, ...}이라는 (집합론의 필연성을 파괴하는) 비정상적인 집합이 출현한 것인데, 그것의 진리사건적 단절의 핵심은 바로 의회주의와의 완전한 결별, 더 나아가 정치의 그 어떤 대표제적 형태에도 의존하지 않기로 한 결정을 내린 데에 있다. 이 점이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적 가설』의 마지막 장(“공산주의라는 이념”)에서 바디우는 다시 ‘대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거기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이 글의 후반부에 논할 바디우에 대한 발리바르의 비판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 지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그 안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불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1) 정치적 요소: 진리 절차, 곧 정치적 사건 자체에 한정된다기보다는 그 사건을 포함하여 그 결과들의 조직화의 뜻을 가지고 있는 진리 절차.

 

2) 역사적 요소: 인류의 일반적 생성.

 

3) 주체적 요소(이데올로기): 결단(decision).

 

먼저 정치적 요소를 살펴볼 것 같으면, 바디우가 여기서 드는 사례는 프랑스혁명(1792~94), 중국의 인민해방전쟁(1927~49),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1902~17), 중국의 문화대혁명(1965~68) 등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모든 진리절차는 그 진리의 대문자 주체(Subject)를 처방하며, 이 대문자 주체는 어떤 개인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이미 우리가 살펴봤듯이, 바디우에게 사건이라는 것은 주체적인 것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개인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대문자 주체란 무엇일까? 비록 『공산주의적 가설』에서 그가 명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메타정치』에 나오는 논의가 여기서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디우는 그 텍스트에서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주지하다시피 알튀세르에게 있어 과잉결정은 과소결정과 달리 모순들의 응축을 통한 혁명의 발발과 등치되곤 한다)을 논하면서, 그것을 “주체 없는 과정”으로 보고자 했던 알튀세르에 반대하여 그것을 “주체 없는 주체성(subjectivity without a subject)”으로 보자고 제안한 바 있는데, 바디우가 말하는 대문자 주체란 바로 이러한 "주체 없는 주체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곧 그것은 혁명적 실천의 어떤 주체적 방향성과 관련되어 있다.

 

두 번째 요소는 역사적 요소로, 이것은 위와 같은 진리절차가 인류의 일반적 생성(becoming) 속에 기입되는 사태를 지시한다. 진리절차는 봉기인 한에서 항상 어떤 국지성(locality)을 가지고 있다. 세계 인민의 동시 봉기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반문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봉기는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전파되어 이동하는) 국지성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국지적 진리절차는 또한 반드시 전 인류의 역사 일반 안에 하나의 의미로서 기입되어야만 한다. 주지하다시피 불어에서 역사는 이스투아르(histoire)인데, 이 말은 역사라는 뜻 이외에 이야기/스토리라는 의미 또한 포함하고 있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하기, 사건이 종결된 다음에 그 사건의 의미를 들려주는 이야기 만들기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요소는 상징화 작업을 통해 나타나는 것 또는 단적으로 (라캉적 의미에서) 상징적인 것(the symbolic)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상징화 작업을 통해서만 사실들(facts), 곧 역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바의 것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반면 앞서 말한 정치적 요소, 진리절차로서의 정치적 사건은 바디우에게 실재적인 것(the real)이며, 따라서 바디우에게 실재로서의 ‘사건’은 ‘사실’과는 다른 것, 오히려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대립된 이 양자는 곧바로 통일될 수 없으며, 그것들을 매개하는 요소가 필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마지막 요소인 주체적 요소이다.

 

주체적 요소는 개인이 스스로 정치적 진리의 일부가 되기로 결단(decide)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의 투사(militant)가 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을 바디우는 “합체(incorporation)”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개인이 진리의 육체의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어 그 육체 안으로 통합되는 사태로 규정한다. 이 진리의 육체를 바디우는 또한 성육신(glorious body)과 등치시키는데, 이 말은 알다시피 기독교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신의 육체’를 지시하는 것이다. 개인은 개인주의와 동물성(동물적 욕구)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갈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신의 육체에 합체되고, 그리하여 주체가 된다. 개인이 “새로운 대문자 주체의 능동적 부분”이 되는 것으로서의 “주체화(subjectivation)”는 바디우에 따르면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 세 가지 요소 또는 세 가지 차원(실재, 상징, 상상―RSI)을 하나로 종합하는 것이 바로 이념(idea)이다. 바디우는 이념의 형식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준다. “이념이란 진리절차의 독특성과 역사의 표상/재현 사이의 상호작용의 주체화이다.”

 

여기서 어떻게 보면 바디우는 라캉적 쉐마뿐만 아니라 칸트적 쉐마를 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칸트는 개념과 직관을 논하면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화/상징화 없는 진리사건은 맹목적이고, 진리사건 없는 역사는 공허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칸트에게 있어서 개념과 직관을 매개함으로써 양자를 종합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초월적 도식으로서의 상상이다. 마찬가지로 바디우에게 있어서도 실재적 진리절차와 역사적 상징화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주체의 상상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바디우는 플라톤주의자이자 칸트주의자라고 여겨지는데, 반면 그는 헤겔주의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바디우는 지젝과 달리 헤겔을 비판하면서, 헤겔에겐 역사가 실재인 반면 자신에게 역사는 상징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라캉적 RSI 쉐마에 대한 바디우적 해석이 올바른 해석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와 상징을 매개하는 상상적인 것(주체적 요소)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해서 부정적이거나 실효성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개인들이 함께 대문자 주체에 합체됨으로써 그것을 구성할 능동적 역량을 갖게 되는 이념의 작동이라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역사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진리는 의미를 갖지 않으며 오직 실존하기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이 실존과 의미를 주체화를 통해 연결한다고 말한다. 주체는 상징화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실재인 진리절차를 상상적으로 역사 속에 투사함으로써 그것을 현시가능(presentable)하게 만든다. 곧 기존의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한 것인양 현시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들의 장을 출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현시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다시 상징적인 것 안에서 현시의 새로운 법칙을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만큼, 새로운 상황의 상태(the State of a situation)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사건이라는 것은 상징화될 수 없는 것, 곧 기존의 상황의 상태 안에서는 현시될 수 없는 것인데, 주체는 상상을 통해 그것을 역사에 투사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상황의 상태 안에서 현시될 수 있는 “사실”인양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새로운 국가(State)의 구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해방적 정치가 (통치자는 바뀌었다 할지라도) 이전과 동일한 국가의 구성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는 혁명적 사건 이후의 국가(상태)는 “비국가(non-State)”로 이행하는 국가, 사멸하는 국가, 사멸을 본질로 하는 국가라고 말한다. 알다시피 이 정식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직접적으로 온 것이며, 바디우가 자신의 책에서 별다른 설명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바디우가 레닌과 결국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완전히 그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디우가 내심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레닌이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나중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어쨌든 이 비국가로 이행하는 국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징화의 작업으로 등장하는 것, 상징적으로 구성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징화의 “구심점”으로서의 고유명사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바디우는 이를 “고유명사들의 치명적인 중요성”이라고 표현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봉기 또는 혁명은 “이름 없는 대중들”이 벌이는 것인데, 이러한 해방의 정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고유명사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또한 고유명사를 통해서 서로로부터 구별된다. 바로 혁명적 영웅들의 이름이 그것이다. 스파르타쿠스, 로베스피에르, 레닌, 마오, 체 게바라 등의 이름을 들을 때 우리는 각각 그 이름에 대응하는 혁명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다. 바디우는 이 고유명사들을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계기를 이루는 상징화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서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개인숭배(cult of personality)를 옹호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모든 개인숭배가 잘못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개인숭배인가를 물어야지 개인숭배 전체를 기각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스탈린의 개인숭배는 비판해야 하지만 마오의 개인숭배는 비판해선 안 된다. 그러면서 바디우는 개인숭배를 “수없이 많은 대중들의 행동을 고유명사를 가진 일자(the One)를 통해 대표(representation)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이 개인숭배이고, 이것이 없다면 진리사건 또는 진리절차는 맹목적인 것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그것이 역사화/상징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표(representation)라는 관념이 이전과 달리 긍정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디우는 파리 코뮌이 정치의 어떤 대표제적 형태도 거부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진리사건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서는 대표라는 관념이 긍정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바디우는 의회주의적 또는 의회적 형태의 대표는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만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대표(의 적어도 어떤 형태)는 옹호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정치철학자가 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극우 정치이론가인) 칼 슈미트이다. 슈미트야말로 의회주의를 비판하면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한 대표 개념을 옹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양자는 모두 이러한 지도자에 의한 대표를 통해 분할불가능한 공동체(an indivisible community)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주권의 분할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대표를 통해서 공동체의 통일이 달성된다고 말하는 슈미트야 말할 것도 없지만(『헌법이론』), 바디우의 경우에도 진리절차에 참여하는 것은 진리의 육체, 대문자 주체에 합체가 되는 사태를 지시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분할가능성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바디우가 유기체적인 결합의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사실 발리바르의 문제제기 전체는 어쩌면 이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해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발리바르 자신이 바디우에 대한 글에서 대표 개념을 장황하게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대표 개념이 그의 문제제기를 좀 더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보인다. (바디우 자신을 포함하여 간혹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하지만) 발리바르는 확실히 의회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슈미트나 바디우의 대표 개념과는 전혀 다른 대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해서 우리는 발리바르 쪽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발리바르의 문제제기를 세세히 요약해 소개하기보다는 ‘대표’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취하려 한다. 그러면서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대안적인 공산주의자의 상을 마지막으로 소개해볼까 한다.

 

2. 발리바르의 문제제기

 

발리바르는 우선 바디우가 공산주의를 하나의 이념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없는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친다. 그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념에 따라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사실 (자기-변혁을 통한 세계-변혁과 세계-변혁을 통한 자기-변혁으로서의 혁명적 실천이라는 이중의 목적론을 정식화하며) “세계를 변혁하라”고 말한 것은 맑스 자신이었다(포이어바흐에 대한 11번째 테제). 현재의 세계를 부정하고 다른 세계를 실현하려고 하는 존재로서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보면 모두 이념주의자/관념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이것이 그들의 유물론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념은 비단 공산주의자들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념(idea)이란 이상(ideal)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의 이념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몇 가지가 있다.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진, 선, 미, 정의, 자유, 평등과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소유, 민족, 공화, 시장(모든 상품의 완벽한 분배를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시장)과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런데 바디우는 유일하게 공산주의라는 이념만이 이념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과학, 예술, 사랑은 논외로 하고) 정치에 있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정의, 자유, 평등과 같은 것은 모두 공산주의라는 이념 아래에 포섭될 수 있는 하위 범주, 하위 이념이라고 말하고, 소유, 민족, 시장과 같은 것들은 가짜 이념이라고, 시뮬라크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연장선상에서 바디우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아닌 다른 그 모든 이념(특히 시뮬라크르)는 공히 주체를 종속시키는 것, 주체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 타율적이 되게 만드는 것인 반면,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주체를 절대적으로 자율적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산주의라는 이념만이 주체를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의 공산주의적 주체는 절대적 견지에서 봤을 때 하나의 주체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절대적 주체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 대목에서 연관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주체화의 문제인데, 도대체 종속 없는 주체화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디우가 자신의 스승/주인(master)라고 공공연하게 내세우는 라캉의 경우나 그의 또 다른 스승인 알튀세르에게 ‘종속 없는 주체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모든 주체화는 대타자에 대한 종속을 통과한다. 왜냐하면 이 두 스승은 모두 “강제된 선택(forced choice)”을 하나의 필수적인 계기로 주체화 과정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의한 호명이라는 것도 그 종속과 주체화의 변증법을 분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바디우가 말할 때, 그것은 어떻게 절대적 자율화로서의 주체화가 될 수 있는가, 다른 이념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라는 이념도 주인 기표(master signifier)에 의한 호명이 아닌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바디우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에 대해 논할 때 그것은 매우 모호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행하는 대문자 주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이라는 것은 단지 역사적 조건들 속으로의 진리의 투사의 특수성이라는 차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공산주의 또한 종속을 핵심적 계기로 포함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우리가 명확히 인정하면 우리는 몇몇 질문들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곧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다른 이념들과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것은 어떤 구분되는 자신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의 긍정적 측면은 무엇이고 그것의 부정적 측면 또는 그것의 위험한 측면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공산주의가 선험적으로 특권화된 진리의 자리에 서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두 번째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세계 변혁이 자기 변혁이자 자기 변혁이 세계 변혁이기 때문에) 자기변혁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들의 변혁, 개인들이 서로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들 또는 관개체성의 변혁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바디우가 이것을 사고하기 위해 도입하는 것은 바로 “실존의 강렬함(the intensity of existence)”이라는 관념이며, 더 나아가 그는 그것을 독특성(singularity)과 사실(facts)의 차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바디우의 정의에 따르면, 독특성은 그 실존의 강렬함이 최대치인 장소로서 실재적인 것을 의미하고, 사실이란 그 실존의 강렬함이 최대치가 아닌 장소로서 상징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시 독특성은 더 강한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것과 상대적으로 더 약한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구분되고, 이 가운데 더 강한 강렬함을 가지고 있는 독특성만이 사건이 된다고 말한다(여기서 강렬함의 최대치가 어떻게 더 강하거나 더 약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필자의 판단으로 그것은 무한집합이 여전히 크기를 가지며 어떤 무한집합이 다른 무한집합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물론 이러한 강렬함에 대한 바디우의 논의는 한편으로 들뢰즈가 말하는 “강렬도”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것만이 여기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함축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신도들의 믿음의 강렬함은 공동체적 결집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봉기라는 사건 속에서 출현하는 강렬함은 오히려 이러한 종교적 결집력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설명하면서 거기서 주체들이 하나의 분할불가능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대문자 주체의 성육신(신적 육체) 안으로 그들이 합체됨으로써라고 이야기한다. 바디우 자신은 이것을 명시적으로 논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지만, 이 지점에서 그러한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어떤 모델을 특권화하고 있는가 우리는 물을 수 있고, 여기서 우리에게 떠오르는 것은 바로 교회라는 모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앞에서 그가 비국가로 전화되는 국가라는 모델을 논했을 때, 그것이 레닌에게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레닌의 것과는 다른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바디우가 생각하는 교회는 제도화된 교회나 배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 다시 말해서 제도적 교회의 부정이자 제도적 교회가 기반하고 있는 본래적 정신으로서의 교회, 부정적이고 정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생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는 종래에 맑스주의가 실현시키려 했지만 역사적으로 실패한 모델들(곧 군대와 국가)과 그것이 갖는 차별점 때문이다. 발리바르 자신이 이 점을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그의 비판은 암묵적으로 프로이트가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행한 집단적 동일시에 대한 분석에 준거하고 있다. 거기에서 프로이트는 집단적 동일시를 통한 공동체 형성의 두 가지 거대한 사례로 군대와 교회를 들고 있다. 군대는 군대의 지휘관 또는 지도자를 통해서 동일시 효과가 발생한다면, 교회는 보이지 않는 신을 그 이상(자아이상)의 자리에 놓는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이 두 가지 모델은 역사적으로 서로 침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교회야말로 전사/투사/밀리턴트라는 말을 발명까진 아니라고 해도 광범위하게 수용했었다), 지도자를 통한 동일시를 현실적으로 생략하지 못한다(사제, 목사 등). 특히 바디우 자신이 개인숭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 쟁점은 바디우에게 매우 곤란한 것이 될 수 있다(따라서 그의 침묵이 설명된다).

 

결국 발리바르는 바디우가 거꾸로 선 슈미트라고 비판한다. 슈미트는 『의회주의 정치의 위기』라는 책에서 “민족주의의 에너지는 계급갈등의 신화보다 더 크다”라고 말했는데, 바디우는 이를 거꾸로 뒤집어 놓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곧 그에게 “공산주의의 신화는 민족주의의 신화보다 더 크다, 더 강렬하다”고 여겨질 뿐이다. 왜냐하면 바디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미움이 아닌 사랑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사랑 없는 미움, 미움 없는 사랑이 있을까? 사랑과 미움은 서로를 전제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양가성의 효과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기 위해 도입한 기준으로서의 ‘친구와 적의 구분’을 바디우 또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친구에 대한 사랑은 곧 적에 대한 미움과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에서 프로이트 자신이 말하듯이 유대기독교적 전통은 내외적으로 수없이 많은 증오의 실천과 폭력을 자행해 왔다.

 

바디우가 개인숭배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수많은 이름 없는 대중들의 행동을 고유명사를 가진 일자를 통해 대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의 대표 개념이 슈미트의 대표 개념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점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슈미트적 정치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도시키고 있을 뿐이다. 슈미트나 바디우의 대표 개념은 대중 안에서 모든 거리를 일소하고 그들을 분할불가능한 하나로 만든다. 반면 발리바르의 대표 개념은 대중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거리로서 정의되어진다. 대표는 따라서 브레히트적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를 정치 안으로 도입하는 필수적인 기제이다.

 

그렇다면 발리바르는 바디우적 공산주의의 상에 대해 어떤 대안적 상을 제시하는가? 발리바르는 공산주의적 정치 또는 공산주의자의 새로운 형상을 모색하기 위해 맑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데, 단 거기에 나타난 공산주의자의 형상에 수정을 가하고 그것을 확장적으로 재정식화한다는 조건 하에서이다. 문제가 되는 맑스의 정식화는 ‘공산주의자들은 기존의 당들과 분리된 자기만의 당을 만들지 않고 기존의 노동자 당들 안에서 가장 단호한 분파로서 활동한다’는 테제를 가리킨다.

 

발리바르는 우선 이러한 테제가 단지 당(또는 정당정치)에만 적용되는 사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다양한 조직들(노조와 평의회 등)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사정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맑스의 테제를 확장한다. 둘째, 발리바르는 공산주의자들이 기존의 조직들 안에서 가장 단호한 분파로서 남아야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조직들에 대해 끊임없이 내부로부터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그 조직들이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자기 정당성을 항상 문제시할 뿐 아니라, 그 조직들이 타 조직과 맺는 관계들(동맹뿐만 아니라 대립의 관계들)까지 문제시하는 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공산주의자는 조직자라기보다는 조직의 활동에 충실하게 참여하면서도 그 조직들을 탈구축하는 탈조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이러한 ‘탈조직’의 일을 효과적인 방식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사실 자신의 조직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조직들(국가적 수준의 조직들까지 포함하여)의 안팎을 넘나드는 자, 곧 여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공산주의자가 세 가지를 바꿀 수 있는 역량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우선 그는 장소를 바꿀 줄 알아야 하고, 언어를 바꿀 줄 알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꿀 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목청껏 떠들고 다니는 자가 아니다. 공산주의자는 이러저러한 조직들의 경계들을 넘나들면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이한 언어들을 서로에게 번역해주는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 당연히 공산주의자는 (맑스 자신이 말했듯이) 다른 조직들로부터 분리된 자기들만의 조직을 갖지 않으며 하나의 조직에만 속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심지어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히려 그는 복수의 조직들을 넘나들면서 서로의 갈등을 정확히 분석하고 서로의 언어적 차이들을 번역함으로써 갈등 속에서 연대를 생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새로운 공산주의자의 형상은 친구와 적의 상상적 구분, 슈미트적 구분을 따라 정치를 사고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친구와 적의 구분을 해체하는 자이다. 갈등을 단순히 억압하거나 부인하거나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갈등적 구분선을 끊임없이 (데리다적 의미에서) 탈구축(deconstruct)함으로써 말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산주의의 새로운 형상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을 두 이론가에게서 찾는다. 하나는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를 논한 프레드릭 제임슨으로, 발리바르는 새로운 공산주의자가 정확히 사라지는 매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철학자를 “자신의 개입 속에서 소멸하는 자”로 규정한 알튀세르인데, 발리바르는 이러한 규정을 단지 철학자나 공산주의 철학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 일반의 정의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가 늘 말했듯이, 자신의 개입 속에서 소멸하거나 사라진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개입이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효과적이라는 것은 인정받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알튀세르는 항상 이러한 인정욕망을 천박하다고 여겼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 혁명의 영웅들이 개인숭배되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개입이 완전히 효과적이진 못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우리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공산주의자들은 자기의 이름을 바꾼 채로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있다고. 수없이 많은 헌신적인 인권운동가들, 대중조직, 노조, 정당, 시민단체에서 실천하는 활동가들, 학교에서 활동하는 교육자들, 학생들 등등, 그 모든 자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지칭하지 않는) 새로운 공산주의자들을 본다. 바디우는 공산주의가 드물다고 말한다. 발리바르는 반대로 공산주의가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다만 바디우가 “공산주의라는 이념” 컨퍼런스에서처럼 자기가 공산주의자라고 열심히 떠드는 곳에서만 공산주의자를 발견하려고 들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그에게 드물어 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Badiou, Alain. The Communist Hypothesis. Trans. D. Macey & S. Corcoran. Verso: London. 2010.

------. Meta-Politics. Trans. J. Barker. Verso: London. 2005.

------. Being and Event. Trans. O. Feltham. Continuum: London. 2007.

Balibar, Etienne. « Les Questions du Communisme ». Exposé présenté le 15 octobre 2011 au Colloque international « Communism, A New Beginning ? », organisé par les éditions Verso à Cooper Union, New York. Version française adaptée et corrigée.

------. « Remarques de circonstance sur le communisme ». Actuel Marx. n° 48, septembre 2010, numéro spécial « Communisme ».

Posted by marxp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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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2019. 6. 1. 23:45

 

 

이 글들은 내가 2019년 1월부터 6월까지 웹진 <관행 중국>에 기고한 칼럼을 모아 놓은 것이다. 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홍콩 인류학 연구자 장정아 선생님과 매번 글의 편집을 위해 애써주신 손승희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1. 중국의 마오와 프랑스의 마오?

 

최근 미국의 버소(Verso) 출판사는 온라인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어떤 중국 철학자와 가졌던 마오쩌둥에 대한 대담을 소개하면서 바디우 자신의 발언에서 따온 「마오는 거의 무한한 방식으로 사유한다(Mao Thinks in an Almost Infinite Way)」라는 구절을 제목으로 붙여줬다. 원래 이 대담은 얼마쯤 전 바디우가 중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행해졌던 것인데, 나중에 그가 녹취록을 다시 찾아봤을 때에는 중국 철학자의 이름이 기록에서 누락되어 있었고 바디우 자신의 기억에서도 이미 지워져 있었다고 한다.

 

버소 출판사 측 편집자(아마도 중국계 미국인쯤으로 추정되는)는 바디우가 최근 뉴욕에서 중국 철학자의 역할을 중국인 배우에게 맡기고 대담을 다시 진행했다고 전하면서도, 우리는 이 대담을 통해 서양 철학자의 “오리엔탈리즘”을 엿볼 수 있다는 다소 시니컬한 논평을 덧붙였다. 마오의 문화 대혁명이 역사적으로 실패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그 취지를 여전히 일정하게 옹호하는 바디우의 입장이 동양에 대한 모종의 신비화에 기초한 것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얼마간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우선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환상을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 동양인 자신이 서양인의 눈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현상을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마오의 문화혁명을 단순히 치명적인 실패로서만 바라보는 시야가 서양에서는 오히려 일반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렇게 바디우의 견해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서양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 좌파 철학자들의 마오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 간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일 수 있다. 이 관점들은 때로 갈등적이며 심지어 경우에 따라 양립 불가능하기도 하다.

 

얼마간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들은 마오의 사상에 상당히 경도되었었다. 특히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라는 맑스주의 철학자와 그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활동하던 다수의 청년 좌파 철학자들이 그러했는데, 여기에는 바디우 자신뿐만 아니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등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특히 바디우가 특이한 점은 60년대에 그가 보여줬던 마오에 대한 열광적 동의를 (내용상 어떤 변화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공공연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예컨대 발리바르와 같은 경우 마오에 대한 평가가 다소 복잡하다. 중국의 인민해방전쟁기의 마오는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유보 없는 긍정은 아니다), 문화혁명 시기의 마오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마오가 발리바르 안에서도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우리는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 또한 오늘날 문화혁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진 않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지식인과 무지대중 간의 지적 차이를 완전히 거부하고 모든 사람은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주장을 펼칠 때 나름대로 그는 어떤 마오주의를 계속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들 청년 좌파 철학자들(피에르 마슈레, 레지스 드브레, 자크-알랭 밀레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은 1964년 말에 창설되었다가 68년 5월 이후 해산된 <맑스-레닌주의 저널(Cahiers marxistes-léninistes)>의 가장 젊은 필진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로 스승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 저널의 점점 더 뚜렷해지는 친-중국화의 경향성을 만들어냈다.

 

알튀세르 자신은 무엇보다 마오의 ‘모순론’에서 많은 이론적 영감을 이끌어 냈으며, 변증법을 헤겔의 종말목적론적이고 관념론적인 논리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그의 첫 번째 저서인 <맑스를 위하여>에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비록 알튀세르는 마오의 문화혁명에 대해서는 공공연한 발언은 자제했지만, 그는 <맑스-레닌주의 저널> 14호에 익명으로 「문화혁명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거기에서 문화혁명을 맑스와 레닌이 구상했던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을 최초로 실행에 옮겼던 “유례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즉 문화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단지 권력 장악이나 소유관계 및 생산관계의 변혁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이데올로기의 혁명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며, 이에 미달할 경우 자본주의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행해진 전대미문의 시도였다는 것이다.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라고 이해될 수 있지만, 사실 알튀세르는 이 글을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며, 이후 문화혁명에 대해서도 다시 논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이한 입장의 결들이 보여주는 차이점들은 그만큼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방식들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런 쟁점들을 그 자체로 살펴보는 일이 분명 필요할 것이다. 프랑스의 마오가 중국의 마오와 같은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얼마간 유의미하겠지만, 프랑스의 마오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프랑스의 마오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과연 중국의 마오는 하나일까).

 

바디우가 자신의 대담에서 “공산주의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한 근본적 경험은 문화혁명이지, 소비에트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마오는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대중 행동이라는 수단을 통해 상황을 혁명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를 향하게 만들려 시도했던 자”였으며, “국가가 공산주의적 해결책이 아니라 단지 그 혁명을 위한 새로운 콘텍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유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였을까? 왜 그는 자신의 대담에서 갑자기 문화혁명을 파리 코뮌(1871년)의 경험과 연결했던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지 않고 그의 논의를 단순히 “오리엔탈리즘”이라고 기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 연재를 통해서 우리는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 특히 바디우만이 아니라 발리바르의 마오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의도는 마오 또는 마오의 사상을 부활 또는 환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흔적으로서의 마오의 유령을 불러내고 그에게 말을 걸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우리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생각할 때 그의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함이다. 유령은 그것을 우리 곁에서 쫓아내려고 할 때에 더욱 더 끈질기게, 더욱 더 부정적인 방식으로(왜냐하면 더욱 더 무의식적이기에), 더욱 더 폭력적으로 복귀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유령을 애도한다는 것, 유령과 함께 산다는 것은 유령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이며, 그가 하나의 실체나 동일성으로 남아 있지 않고 수 없는 흔적들로 산종(disseminate)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2. 알튀세르가 마오에게서 발견한 것

 

최근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하나인 에티엔 발리바르에 따르면, 1917~1968년의 기간에 유럽 공산주의 진영은 두 개의 거대한 노선으로 분할되어 논쟁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계급 대 계급’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면 다른 하나는 ‘인민전선(popular front)’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계급 대 계급’ 노선은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두 계급간의 대결은 점차 격화되어 필연적으로 내전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이 싸움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로 귀결된다는 관념에 기초한 노선을 말한다. 물론 현재 자본주의 사회 내에는 두 계급에 정확히 속하지 않는 중간적 계급들이 있지만, 이들은 계급투쟁이 발전함에 따라 점차 분해되어 프롤레타리아트 안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노선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가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죄르지 루카치(특히 <역사와 계급의식>)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 계급에서 자기 자신의 조건에 대해 의식적인 대자적 계급으로 이행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열어내는 역사의 주체가 될 것이라고 바라봤다(맑스 자신에게서 이런 입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는 <공산주의자 선언Communist Manifesto>이다).

 

다른 한편, ‘인민전선’ 노선은 모순들의 복수성과 복잡성에 대해 사유하면서 자본주의 사회 내에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순만이 아니라 다양한 다른 모순들이 있으며 따라서 이질적인 세력들의 연합으로서의 인민전선을 형성함으로써만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유효하게 조직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에 대표적인 이론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안토니오 그람시인데, 특히 그는 저발전된 이태리 남부의 문제(‘서발턴’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여기에서 유래한다)를 부각시키면서 모순들의 복잡성과 불균등성을 사유하고자 시도했으며, 자본주의의 경제적 상황이 자동적으로 혁명으로 귀결되지 않는다고 바라봤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 해법을 다시 사유했으며, 모순들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인민전선의 형태를 특권화 했던 것이다(맑스 자신에게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는 발전을 거듭할수록 복잡해진다는 사유가 담겨 있는 다수의 텍스트가 있는데, 무엇보다 <자본> 1권이 공산주의로의 혁명적 이행을 메시아주의적인 방식으로 논하는 32장 이후에 갑자기 식민지 문제를 논하는 33장을 추가하며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눈여겨 봐야하며, 또한 중간에 착취의 엔지니어러로서의 공장감독관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자본주의가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도 시사했다는 점을 봐야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대립하는 이 두 가지 노선 가운데 ‘계급 대 계급’ 노선의 계보에 속하는 후대의 이론가가 이태리의 마리오 트론티라고 볼 수 있다면, ‘인민전선’ 노선의 계보에 속하는 후대의 이론가가 알튀세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1968년 저서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되어 있는 “모순과 과잉결정”이라는 장에서 그람시를 자신의 이론적 선구자로 상찬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의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개념은 그람시가 봤던 모순들의 복잡성을 사유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그람시의 입장이 모순들의 복잡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그 모순들의 접합이 왜 전체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람시에게서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어떻게 ‘최종심급’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는 그람시를 대신할 수 있는 인민전선의 이론가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때 알튀세르가 찾아낸 것이 바로 또 다른 인민전선의 이론가이자 그러한 노선에 입각하여 혁명을 성공시킨 실천가로서의 마오쩌뚱이다. 알튀세르는 마오의 텍스트들 가운데 유일하게 <모순론>에만 관심을 기울였는데(예를 들어 그는 <실천론>을 서구의 실용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영향 받은 텍스트로 저평가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맑스주의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완전히 혁신된 상이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오의 <모순론>을 읽어보면, 마오는 모순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해서만 주목하는 것의 과오를 지적하면서 모순의 특수성과 상대성에 주의를 기울이자고 주장하면서, 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은 발전과정에 많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중국의 자산계급민주주의혁명 과정에는 중국사회의 피압박계급과 제국주의 사이의 모순, 인민대중과 봉건제도 사이의 모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 사이의 모순, 농민 및 도시의 소자산계급과 자산계급 사이의 모순, 각각의 반동적 지배집단 사이의 모순 등이 있어 그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모순들의 복잡성에 대한 이런 인식에 기반하여 그가 개념화하는 것이 바로 기본모순, 주요 모순 및 부차적 모순, 모순의 주요 측면 및 부차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마오는 이때 기본모순 자체는 하나의 사회구성체 내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지만, 주요 모순은 기본 모순이 아니며, 게다가 주요 모순은 부차적 모순과 구체적인 정세 속에서 자리를 바꾸는 전위(displacement)의 운동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중국과 같은 반식민지국가에서는 주요 모순과 부차적 모순의 관계가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제국주의가 이러한 나라에 침략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때 제국주의와 이러한 나라 사이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 되고, 이러한 나라의 내부 각 계급 간의 모든 모순(봉건제도와 인민대중 간의 주요 모순을 포함하여)은 모두 일시적으로 부차적, 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다시 상황이 변화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제국주의가 무력을 통한 억압을 꾀하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적 수단을 통한 온건한 억압을 행하는 경우, “반식민지국의 지배계급은 제국주의에 투항하고 양자는 동맹을 맺어 인민대중을 공동으로 억압”하는바, (제국주의와 동맹한) 지배계급과 인민대중 간의 내부 모순이 오히려 주요 모순의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알튀세르는 바로 이런 마오의 <모순론>에서 기본모순이라는 ‘최종심급’의 상과 주요모순 및 부차적 모순의 ‘과잉결정’의 상을 발견했고, 경제주의에 대해 급진적인 비판을 가하면서도 다원주의라는 역편향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냈던 것이다. 알튀세르는 경제적 환원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최종심급과 지배적 심급을 구분하고(이 둘을 일치시키면 환원주의에 빠진다), 또한 모든 사회구성체는 지배관계를 갖는 구조(structure à dominance)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 마오가 이미 다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오는 “어떠한 발전과정에 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중의 하나는 반드시 지도적,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요 모순이며 다른 것들은 부차적, 종속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마오의 논의를 좀더 정밀하게 가공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여전히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을 유지할 수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으며, 그람시와 마오 사이에서 마오를 택한 알튀세르의 선택이 또 다른 곤란들을 가져온 것은 아닌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3. 바디우와 중국의 문화대혁명

 

앞선 칼럼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알랭 바디우는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 가운데 하나로, 68혁명 당시 마오주의 좌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열렬히 옹호했던 사람이다. 다른 제자들(특히 우리가 앞으로 이어질 다른 칼럼들에서 살펴보게 될 에티엔 발리바르)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또는 그렇게 돌아섰지만, 바디우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지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런 바디우의 특이한 입장은 그의 독특한 진리 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책 <윤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하나의 진리)라고 부른다.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하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예컨대 중국 문화대혁명과 프랑스 68년 5월이라는 두 개의 서로 얽혀진 사건에의 충실성을 사고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1966년에서 1976년 사이의 프랑스 마오주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렇게 바디우는 중국 문화대혁명과 프랑스의 68혁명을 진리적 사건이라고 보며, 그 사건들에 대한 충실성(fidélité)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 사건들이 이후 역사 속에서 어떤 실패를 경험했든지 간에 그것들이 당시 정치 상황 내에 어떤 “내재적 단절”을 가져온 한에서 여전히 배반되어선 안 되는 것으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바디우에게 진리란 기존의 체계 및 그 체계를 다소간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지식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백을 명명하는 ‘사건’으로 발발하며, 그런 사건이 일단 발발하면 그것은 진리과정의 담지자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해 보존되어야 한다.

 

좀 더 차근차근 설명해보자. 바디우는 수학의 집합론을 가지고 존재론을 해석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중 하나인 <존재와 사건>에서 바디우는 존재론이야말로 철학의 본령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고 존재론은 오히려 수학의 영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론의 법칙들을 연구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수학(특히 집합론)이며, 철학은 오히려 이러한 존재론적 필연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른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철학이 연구해야 할 이 다른 것, 그것이 바로 ‘사건’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우발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20세기 초에 발전된 제르멜로-프랭켈의 집합론에선 이런 사건 개념이 어떤 자리도 부여받지 못한다. 제르멜로와 프랭켈은 자신들의 집합론의 논리적 필연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론 구성의 출발점에서부터 하나의 근본적인 배제를 행할 수밖에 없었다. 곧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분으로 가지고 있는 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그것이다. 만일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분으로, 즉 자신의 원소로 가지고 있는 집합이 존재한다고 말하게 되면, 집합론 전체가 해결 불가능한 모순에 부딪혀 무너져 버리고 만다(이는 ‘러셀의 패러독스’라고 알려져 있는 것 때문인데, 지면상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자). 사실 보통 우리가 대하는 집합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원소로 가질 수 없다. 예컨대, 산이라는 집합 안에 백두산, 한라산 등은 들어갈 수 있지만, 단적으로 ‘산’이라는 원소가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디우에 따르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원소로 갖는 집합이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Non-Red라는 집합은 빨갛지 않은 것들의 집합이다. 빨갛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Non-Red라는 집합 자체도 빨갛지 않기 때문에 그 집합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Non-Red라는 집합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원소로 갖는 집합인 것이다. 바디우는 바로 자기 자신의 이름을 원소로 갖는 이런 집합이 역사 속에서 출현할 때, 그것이 바로 진리 사건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집합론의 필연성 내에 은폐되어 있는 ‘공백’을 명명함으로써 그 필연성을 무너뜨리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정상적 집합들은 모두 상황의 상태(État de situation)를 이룬다고 말하는데, 현재의 상황이 어떤 필연성에 의해 조직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원소로 갖는 비정상적인 집합은 그런 상황의 필연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여기서 상태라는 말로 번역된 État는 중의적인 말로 그것은 ‘국가’로도 번역될 수 있다. 바디우는 이런 말을 통해, 국가는 하나의 정상적 집합으로서, 그 안에 어떤 필연적 논리 속에서 자신들의 부분들을 포괄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모든 정상적 집합이 그렇듯이, 그것은 배제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자신의 질서에 부합하지 않은 것들은 그 집합에 포함될 수 없는 것이다. 국가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자신의 질서에 따르지 않는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국가는 수립된다. 반대로 비정상적인, 자신의 이름을 원소로 갖는 집합은 오히려 배제된 것들의 집합이다. 앞에서 우리가 Non-Red라는 집합의 예를 든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Red에서 배제된 것들의 집합인 것이다. 이런 배제된 것들이 하나의 집합으로 역사 속에 출현할 때, 정치에서 그것은 혁명적 사건으로 출현한다.

 

이제 우리는 바디우가 어떤 의미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그리고 프랑스의 68혁명)을 진리 사건이라고 보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마오쩌뚱의 문화대혁명은 당의 국가화(관료제화)를 중단시키고 당을 그 외부로부터 공격하기 위해 행한 혁명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배제되었던자들이 하나의 집합으로 출현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오의 유명한 슬로건인 “모든 반역은 정당하다”(造反有理)라는 말에 따라 문화대혁명에 가담했던 많은 청년들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혁명의 적으로 배제되었던 전-부르주아지의 자식들이었다. 마오는 이들을 동원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상태, 즉 당시의 국가를 해체하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에게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파리코뮌, 러시아혁명, 중국의 인민해방전쟁 등과 함께 국가를 해체하고 사멸시키려고 시도했던 혁명적 사건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 칼럼에서 논했던 마오에 대한 인터뷰(버소)에서 바디우는 이렇게 말한다. “공산주의적 정치 추구의 근본적인 경험은 문화혁명이지 소비에트 국가가 아닙니다. 오늘날 러시아와 중국은 모두 자본주의 국가이며, 그와 같은 것으로서 그것들은 정치사상과 관련해서 나에게 어떤 흥미도 주지 못합니다. 당분간 마오는 사회주의 국가 내에서 대중행동에 의해, 상황을 혁명적인 방식으로 공산주의 쪽으로 맞추어 나가려고 시도했던 그 최후의 위대한 역사적 실험과 연계된 고유명사입니다. 마오는 국가란 공산주의적 해결책이 아니라 그 혁명의 새로운 콘텍스트일 뿐이라는 것을 사유했던 첫 번째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바디우의 이런 견해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사유하기에 충분한 것인지 비판적으로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마오의 “혁명적” 시도는 왜 처참하게 실패 했을까에 대해서 말이다. 바디우는 문화대혁명의 실패는 인정하지만, 이 실패에 대한 설명은 제공치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문화대혁명을 단순히 마오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려고 했던 폭력적인 시도였다고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적어도 그 점에 대해 바디우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있다.

 

 

4. 좌파 포퓰리즘, 인민전선의 새 이름?

 

2014년에 작고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정치철학자로 정확히 프랑스 철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 철학이 오직 프랑스에만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라클라우와 오랜 기간 동반자로 함께 작업한 벨기에 출신의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실제로 젊었을 때 알튀세르의 세미나에 참여했으며, 라클라우 자신도 알튀세르를 탐독하고 그의 몇몇 개념들(과잉결정,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단적 상속자라고 볼만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이승원 역, 문학세계사, 2019년)가 번역됨에 따라 라클라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포퓰리스트 이성에 대하여>(On Populist Reason)라는 저서도 국내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아마 조만간 국내에도 번역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칼럼에서 우리가 포퓰리즘에 대한 라클라우의 논의에 주목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그의 논의가, 우리가 두 번째 칼럼에서 다룬 ‘인민전선’ 전술의 최근의 이론적 발전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의 논의의 큰 윤곽이 세 번째 칼럼에서 우리가 다룬 바디우의 이론과 몇몇 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수렴하고, 또 매우 중요한 지점에서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자의 수렴과 발산은 우리 자신의 정치를 사유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쟁점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두 번째 칼럼에서 이미 말했듯이, 유럽 공산주의 진영이 20세기에 서로 갈라져 싸웠던 가장 큰 쟁점은 ‘계급 대 계급’ 노선인가, ‘인민전선’ 노선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두 노선이 처음으로 가시적인 방식으로 서로 부딪혔던 것은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 세력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둘러싸고였다. 당시 소련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코민테른은 처음에는 ‘계급 대 계급’ 노선을 채택했지만, 이후 이 노선이 처참하게 실패함에 따라 인민전선 노선으로 급선회한 바 있었다. 이런 노선 전환은 매우 복잡했던 독일에서의 상황과 관련된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1918년에 행한 독일혁명이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집권 세력이 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손에 스파르타쿠스단 지도자인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즉결 처형된 사건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적개심을 극단화했다. 또한 나치 세력이 발흥하고 있었을 당시 독일이 맞이한 경제 위기는 매우 심각한 것이어서, 곧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로자의 붕괴론은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준거가 되어주었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낙관 속에서 독일 인민이 조만간 자신들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여기면서, 심지어 나치세력과의 공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정부를 흔들기 위한 파업을 조직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도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곧 인민이 나치의 거짓을 깨닫고 곧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코민테른은 결국 계급 대 계급 노선을 포기하고 인민전선을 주장한 디미트로프 테제를 채택하게 된다. 인민전선(popular front)은 다양한 조직에 소속된 노동자 및 농민 세력을 통일시킨다는 통일전선(united front)에 대립하는 것으로, 그것은 소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일부 부르주아지까지 전선으로 광범위하게 묶어내야지만 파시즘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사고에 기반한 전술이었다.

 

이런 인민전선 노선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정치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오였으며, 그것은 바로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국공합작뿐만 아니라, 국공합작 이후 대장정 시기 중국 ‘인민’의 생성을 도모한 그의 성공적인 실천으로 나타났다. 라클라우는 <포퓰리스트 이성에 대하여>에서 마오의 대장정 시기의 투쟁에 대한 짧지만 매우 중요한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하나의 극단적 예로 마오쩌뚱의 ‘대장정’을 들어보자. 여기에 위에서 묘사한 의미의 ‘포퓰리즘’이 있다. 즉, 복수의 적대적 상황들에서 ‘인민’을 역사적 행위자로 구성하려는 시도가 있다. 마오쩌뚱은 심지어 ‘인민 내부의 모순’에 관해 말하고 그래서 고전적 맑스주의 이론에 파문이었던 실체, ‘인민’이 등장한다. (…) ‘인민’은, 순수한 계급 행위자들(생산관계 내의 정확한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의 속성으로 간주되는 동질적 본성을 갖기는커녕, 복수의 단절 지점들의 [등가적] 연결로 인식된다.”(On Populist Reason, Verso, p. 122) 여기서 우리는 라클라우가 마오의 인민전선 노선을 좌파 포퓰리즘의 명확한 사례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라클라우가 말하는 ‘좌파 포퓰리즘’이란 바로 인민전선 노선의 새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매우 놀라운 방식으로, 포퓰리즘을 설명하는 라클라우의 이론적 논의의 틀은 바디우의 것과 몇 가지 점에서 수렴하는 양상을 보인다. 우선 라클라우가 이질적 세력들로부터 등가적 사슬을 만들어내는 실천으로서의 포퓰리즘을 주장할 때, 그런 이질적 세력들이란 바로 기존의 권력(헤게모니) 안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자들, 다시 말해서 배제된 다양한 세력들을 지칭하며, 이들이 자신들의 이질성들을 하나의 등가적 표면 위에 등록하는 데에 성공할 때에 비로소 효과적인 대항-헤게모니적 정치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바디우가 배제된 다양한 자들이 하나의 집합(즉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집합)으로 출현할 때 그것이 바로 진리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바디우는 상황상태(국가) 안에 있는 ‘공백’을 명명하는 것이 진리 사건의 정치라고 주장하면서, 이때 이런 공백이란 하지만 단순한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 다양성”(즉 무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것들이 그 안으로 모두 들어올 수 있는 공이라는 의미에서)을 뜻한다고 말하는 것은 라클라우가 이질적인 세력들의 등가적 접속을 사고하는 것과 상당히 가깝다. 게다가 라클라우와 바디우는 또 다른 면에서도 수렴하는데, 그들이 공히 인민(등가적 사슬 또는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집합으로서)을 생성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라클라우와 바디우가 수렴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에서 발산한다. 라클라우는 인민의 이름을 공동체적 충만성(이런 충만성이 종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가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을 의미화 하는 이름이어야 한다고 보는 반면, 바디우는 인민의 이름은 결코 충만성의 이름이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공백을 명명하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바디우는 공동체적 충만성을 명명하려는 행위는 반드시 진리의 도착으로서의 시뮬라크르(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나치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비록 라클라우가 현정세에서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는 포퓰리즘을 생산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라클라우의 논의가 민족 공동체 또는 더 나아가 초민족적 공동체(supranational community)로서의 유럽 등에 준거하는 공동체주의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바디우에게 제기해야 할 질문은 그가 공백을 명명해야한다고 말하면서 국제주의를 강조할 때 그것을 어떻게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와 화해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최근 에티엔 발리바르는 포퓰리즘의 문제설정을 일정하게 인정하면서도 포퓰리즘이 아니라 대항-포퓰리즘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는데, 그가 말하는 대항-포퓰리즘은 좌파 포퓰리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의 핵심적인 요소로서의 지도자 숭배와 모종의 (민족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준거를 거부하는 것이다.

 

 

5. 반폭력의 정치로서 혁명을 사유하기

 

알튀세르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는 1990년대부터 폭력이라는 문제를 다시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심도 깊게 진행해 왔다. 폭력을 제거하거나 적어도 제어하려는 전통적인 모델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가 국가에 의한 폭력적 수단들의 독점을 통해 사회로부터 폭력을 제거하려는 ‘폭력 독점’(monopoly of violence)의 모델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지배계급(또는 그들을 대변하는 국가)의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혁명적 폭력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대항폭력’(counter-violence) 모델이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배의 수단으로서든 그런 지배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든 간에 모든 폭력은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비폭력’(non-violence) 모델이다. 맑스주의는 통상 두 번째 모델, 즉 대항폭력 모델을 특권화해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주지하다시피 첫 번째 모델은 토마스 홉스에 의해, 그리고 세 번째 모델은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특권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맑스주의 내에 대항폭력 모델과는 개념적으로 구분될 수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폭력 독점 모델이나 비폭력 모델로 환원될 수 없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한 정치가 경향적으로 구성되어 왔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반폭력 모델(anti-violence)이라고 부른다. 반폭력의 정치는 폭력에 맞선 투쟁의 정치로서, 지배계급의 압도적인 폭력에 저항함에 있어서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하지만(따라서 비폭력 모델은 채택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폭력적 수단의 활용은 극단적 폭력을 제한하거나 감축하여 (전쟁이 아닌) 정치 그 자체가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핵심으로 한다.

 

맑스 자신의 경우를 먼저 살펴볼 것 같으면, 맑스는 <공산주의자 선언>(1847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 속에서 점점 자신을 정치적으로 통일시켜나가 결국 부르주아지와 계급 대 계급의 최후결전을 치르고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으리라는 폭력혁명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이 잔인하게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맑스는 더 이상 이런 전망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으며, 런던 도서관에 파묻혀 이후 근 20년을 작업하여 <자본> 1권(1867년)을 출판하게 된다.

 

<자본>에서 맑스는 예전과 달리 역사의 방향에 관한 세 가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게 된다. 하나는 <자본>의 32장에 제시되어 있는 생각인데, 이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이미 나왔던 메시아적 종말론 테마의 반복으로, 혁명을 수탈자들의 수탈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본>의 33장에 제시되어 있는 생각인데(혁명을 논하는 32장이 마지막 장이 아니라 그 뒤에 33장이 추가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거기에서 맑스는 중심의 자본주의 국가 내의 모순들이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통해 완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자본>에 나와 있는 공장 감독관 제도에 대한 그의 분석이다. 여기서 그는 공장 감독관이 국가의 편에서 파견된 ‘착취의 엔지니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공장 감독관은 아동노동 착취를 비롯한 자본가들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초과착취를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파악하면서, 계급적대에 관해 자신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일정하게 수정한다. 과거에 맑스는 계급적대를 화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누가 이기든 간에) 계급 대 계급의 폭력적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여겼지만, 이제 <자본>에서는 계급적대를 화해 불가능한 것이 아닌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보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 (여론 등을 활용하고 다른 시민 세력들과 연대하여) 자본가 계급의 극단적 폭력을 제어하면서 자본주의를 좀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분명히 <자본>에서 혁명에 대한 사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은 역사가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경로로서만 고려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부르주아지의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가 폭력적 혁명의 정치의 곁에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나란히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맑스가 바로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지만, 얼마 안 있어 발발한 1871년의 파리 코뮌으로 인해서 그 망설임이 강제로 중단되었다고 말한다. 맑스는 파리 코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 있다고 보면서 봉기 이전에는 봉기에 반대했지만, 대중들이 실제로 봉기에 나서자 찬성 입장으로 돌아서서 파리 코뮌에 실천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동참하게 된다(비극적이게도 맑스의 애초의 예상은 틀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맑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맑스주의에서 또 다른 반폭력의 정치의 거대한 사례는 레닌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데, 레닌은 혁명 그 자체를 하나의 반폭력의 정치로 만들어낸 최초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2인터내셔널은 반전 입장을 취하고 있던 많은 좌파 정치인들이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주의와 찬전으로 돌아서면서 돌이킬 수 없이 붕괴하게 되었다. 끝까지 반전의 입장을 고수했던 극소수의 사람들(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은 짐머발트 회의(이른바 제2.5인터내셔널)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지만, 유일하게 레닌만이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연구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탐독하면서 레닌은 전쟁이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통찰을 얻어냈으며, 따라서 전쟁 초기에는 대중들이 애국주의에 고무되어 전쟁에 찬성할 것이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전투 속에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되면 결국 근본적인 불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예상하고, 볼셰비키 조직원들로 하여금 제국주의 군대에 스스로 지원하게 만들었다. 이 조직원들은 처음에는 전쟁에 나온 다른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하면서 그들과의 유대감을 발전시키다가 전쟁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쌓여나가기 시작하면 그 불만을 정치적으로 조직해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만들어진 대중조직은 단순한 노동자 소비에트가 아니라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였으며, 재향 군인들은 이 평의회 조직의 거대한 한 축을 구성했다. 레닌은 바로 이런 정치적 개입을 통해 러시아를 혁명적으로 패배하게 만듦으로써, 사실상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폭력 그 자체를 멈출 수 있었다(실제로 2월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망명 중이었던 레닌은 독일 정부를 찾아가, 만일 자신을 러시아 한복판으로 들여보내만 주면 혁명을 일으켜서 러시아를 전쟁에서 빼내고 이 전쟁을 멈추게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독일 정부로부터 그 유명한 ‘밀봉열차’를 받아내서 러시아로 멈추지 않고 들어가 10월 혁명을 성공시킨다).

 

반폭력의 정치의 또 다른 사례는 바로 대장정의 마오에게서 발견된다. 마오 또한 국공합작이 깨진 이후 중국 공산당이 처해 있던 거대한 열세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제시된, ‘방어전이 늘 공격전보다 용이하다’는 테제를 독특하게 해석하여 중국 상황에 적용시켰으며, 중국 공산당원들이 인민대중 속으로 숨어들어가도록 만드는 전략을 구사했다. 공산당원들은 이렇게 대중 속으로 도망침으로써 그 속에서 전세의 역전을 도모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그들은 주민대중을 정치적으로 자신들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고, 또한 다양한 소규모 게릴라전을 수행함으로써 전쟁에 필요한 무기 및 전쟁기술들을 확보하여 마침내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불가능해 보였던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지는 이 놀라운 대역전극은 지배계급의 압도적 폭력에 대해 맞서 싸우기 위해 무대의 중앙을 단번에 장악하는 전술(예컨대 파리 코뮌의 전술)을 구사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들 속으로 숨어들어가 정치와 방어전쟁을 결합하는 길을 마오가 찾아낼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반폭력의 정치로서 혁명을 사유하고 또 성공시켰던 레닌과 마오의 정치는 혁명 성공 이후 오히려 홉스적인 폭력 독점의 모델로 도착되고 말았을까? 우리는 다음 칼럼에서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6. 어떻게 혁명을 문명화할 것인가?

 

지난 번 칼럼에서 우리는 대항폭력 노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반폭력의 정치 모델, 곧 폭력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정치로서의 반폭력의 정치 모델에 대해 논하면서,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몇 탁월한 사례들을 검토했다. 특히 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1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극단적 폭력을 멈출 수 있는 효과적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실로 유일한 정치가이자 이론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폭력을 단순하게 거부하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노선은 (오늘날 유행하는 이러저러한 비폭력론이 취하는 형태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비타협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극단적 폭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길을 찾는 데에 실패했다. 왜냐하면 간디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성취된 이후 인도 내의 종교적 갈등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터져 나오자, 갈등을 단지 일시적으로 유예시킬 수나 있었던 단식(간디 자신의 목숨을 건 단식) 외에 그 어떤 유효한 개입의 수단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비폭력 노선은 간디 사후 인도 내 종교 분파 간 대학살의 참극이 일어나는 일을 전혀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맑스주의의 이런 반폭력의 정치는 혁명 이후 폭력 독점의 홉스적 모델로 변질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는가? 이 문제는 사실상 모든 사회주의 혁명이 경험했던 문제로, 단순히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몇몇 지도자들의 개인적 오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맑스주의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봐야 한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은 단번에 가공된 것이 아니다. 그 용어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1848년 혁명에 대한 분석(<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였는데, 맑스는 그것을 공산주의자들이 채택할 수 있는 여러 전술들 가운데 하나의 전술로 제안했으며, 그 내용을 이루었던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이야말로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투쟁임을 보여줌으로써 중간계급으로서의 농민들을 부르주아지의 편에서 분리하여 자신들의 동맹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1848년 혁명은 실패했으며, 그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은 (맑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의 착수와 더불어) 맑스의 텍스트에서 완전히 실종되었다가 20여년이 흐른 뒤 1871년의 파리코뮌에 대한 분석(<프랑스 내전>)에 이르러서야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때 그 관념은 단순히 적절한 정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취할 수 있는 가능한 하나의 전술이 아니라 모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취해야할 이행의 보편적 형태라는 성격을 부여받았으며, 그 내용의 핵심은 노동자 계급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가공할 모순이 이미 이런 프롤레타리아 독재 관념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모순으로 인해 맑스가 노동자 계급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논하는 바로 그 텍스트에서 하나의 문제에 대해 완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그 텍스트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안에서의 공산당의 역할에 대한 어떤 논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통치’와 공산당의 ‘지도’라는 관념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다양한 이질적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는 노동대중을 통일시켜 하나의 단일한 통치 계급으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그 조직화의 중심으로서의 공산당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맑스에게 수십만 대중들의 희생으로 끝난 파리 코뮌의 처참한 실패는 바로 이 점을 보여주는 듯이 여겨졌을 것이다. 지배 계급의 압도적인 폭력과 대결함에 있어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자기 통치는 무장해제까지는 아닐지라도 매우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의 일주일”이라고 불리는 파리 코뮌 진압 이후 맑스와 엥겔스가 곧바로 전위당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 것은 이 때문이고, 이런 그들의 노력은 1875년 독일 사회민주당 창립으로 귀결된 바 있다.

 

하지만 맑스 자신을 포함하여, 맑스주의는 이 이론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는 커녕, 파리 코뮌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등 모든 사회주의 혁명을 결정적으로 홉스적 폭력 독점 모델로 변질시킨 것이 바로 이 모순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 모순은 정확히 혁명의 방어를 둘러싼 딜레마로 정식화될 수 있다. 혁명은 노동대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들고 그들의 자기 통치의 역량을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러나 혁명을 부르주아지나 또 다른 반혁명세력들(외국의 군대를 포함하여)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노동대중을 군대로 조직해야만 하며, 따라서 그들을 규율화해야만 한다. 문으로 내보낸 근대 자본주의의 핵심으로서의 규율권력(미셸 푸코)이 다시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항혁명을 불러오지 않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면, 권력장악으로서의 혁명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늘 자신을 더 극단적인 혁명 또는 “초-혁명”(Ultra-Revolution)으로 전환시킬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혁명의 도착(perversion)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전시 공산주의 시기 레닌은 클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당 내외부에서 터져 나온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공산당 내에서의 ‘분파형성권’(right to tendency)을 금지하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결국 스탈린에 이르게 되면 당의 일괴암적 통일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숙청의 정치로 귀결되고 만다. 우리는 또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유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마오는 중국 공산당의 기술관료주의화를 비판하기 위해 ‘요새를 포격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중들을 동원하여 반역을 조직했지만, 점점 상황이 통제 불가능하게 되자, 계급투쟁이 당을 관통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이런 계급투쟁의 최종적인 해결장소는 여전히 당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혁명을 봉합할 수밖에 없었다. 당이 진리의 장소로 나타나야 한다는 맑스주의의 뿌리 깊은 사고를 마오 또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76년에 있었던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 대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 문제를 둘러싼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알튀세르는 이 개념을 폐기하려는 당의 주류적 입장에 맞서 투쟁했으며, 그의 제자인 발리바르도 알튀세르와 대동소이한 입장을 택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그러나 1977년 11월에 이탈리아 공산당 기관지 <선언>(Il manifesto)이 주최한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의 권력과 저항”이라는 콜로키움 이후 사정은 크게 변했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종전 입장을 되풀이하는 글을 그 콜로키움에서 발표하고 몇몇 인터뷰를 행한 반면, 발리바르는 1978년 초에 작성한 글(<국가, 당, 이행>)에서 자신의 스승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면서 사실상 1976년 논쟁 당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폐기에 찬성했던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와 수렴하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물론 풀란차스의 입장이 당의 주류적 입장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발리바르의 이론적 작업의 축들 가운데 하나는 마오의 “조반유리”를 스피노자의 “오히려 인식하라”라는 슬로건과 결합함으로써 어떻게 혁명을 문명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사유하는 작업이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작업에 있어서 그는 혁명의 지배적인 상 자체를 전환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가 갖고 있는 혁명의 상은 사실상 프랑스 대혁명의 모델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이 반드시 이런 권력장악의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권력장악으로서의 혁명, 특히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통일된 계급의 독재로서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혁명 방어의 딜레마를 좀처럼 극복할 수 없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체론(mixed regime)을 급진화하면서 마키아벨리(Nicollo Machiavelli)는 고대 로마 공화국의 사례에 준거하여, 혁명은 한 계급의 독재로 귀결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삼 계급(군주, 귀족, 인민)이 서로를 견제하고 갈등하면서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장구한 과정의 조직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갈등적 민주주의’(conflictual democracy)의 모델을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마키아벨리의 모델을 어떻게 현재화할 것인가? 우리가 혁명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혁명이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세력관계 그 자체의 제거로서의 권력 장악이 아니라, 세력관계의 상이한 조직화다. 지배자들의 폭력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는 피지배자들의 대항폭력까지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상호 도착을 제어하는 혁명 문명화의 길을 우리가 발명할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좌파 정치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원(단국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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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xp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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