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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삼성전자의 노사갈등 문제에 대하여

marxpino 2026. 4. 29. 01:42

오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강의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여기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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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노사갈등에 대해 최근 살펴본 몇몇 의견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최근 영업이익에 가장 많이 기여한 집단이 어떤 집단인가를 논하면서 이재용이 가장 많은 기여를 했다, 아니다, 삼전 노동자들이 가장 많은 기여를 했다고 서로 주장하는 것을 봤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준거해야 할 철학자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 정의론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누구나 자신이 기여한 것에 비례하여 자신의 몫을 가져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따라서 같은 기여를 한 사람들이 다른 몫을 받거나 다른 기여를 한 사람들이 같은 몫을 받는다면 싸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보면, 분배정의는 비례적 평등이지 절대적 평등일 수 없다.

 

이 점을 지적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당히 훌륭하지만, 그가 만일 기여에 따른 비례적 분배가 옳다고 말한 것으로 끝냈다면, 그는 자신의 명성만큼 훌륭한 철학자일 수 없었을 것이다.그의 이론적 역량이 눈부시게 빛나는 대목은 위와 같은 점을 기술하며 모든 문제가 비례적 평등의 원리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 이후 오히려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아포리아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계급이 기여도에 따른 비례적 평등의 원칙에는 동의한다. 그것은 쟁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쟁점은 다른 곳에 있다. 모든 계급은 비례적 평등의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그 비례를 결정할 기여도의 측정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싸운다.

 

데모스(빈민 다중)는 자유를, 부자는 부나 혈통을, 귀족은 덕을 그 기준으로 삼자고 주장하며 싸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기준을 둘러싼 싸움은 사실상 해결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는 동일한 잣대에 따른 계산의 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잣대들 사이의 갈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통약가능성(commensurability)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인 것이다. commensurability라는 단어의 한 가운데에 나와 있는 mensur...라는 부분은 measure의 변형이다. measure는 측정 또는 척도(잣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com-mensur-ability는 공통의 잣대를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대로 incommensurability는통약불가능성을 뜻한다.

 

그런데 정확히 데모스와 부자/귀족은 잣대 자체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계급투쟁이다. 

 

최근 삼성전자에서도 이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이재용은 자신이 투여한 자본과 경영의 덕을 잣대로 내세우고 있다. 삼전 노동자들은 자신의 기술과 노동을 잣대로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더해 삼전의 주주들은 자신의 투자금을 잣대로 내세우고 있다. 그에 더해 삼전과 직접 관련 없는 시민들도 삼전이 몰락하면 자신들도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기에 이 문제와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이 아니며 따라서 자신들의 고유한 잣대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정말 다양한 잣대들의 경합인 것이다. 

 

여기서 어떤 좌파는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잣대(노동의 양)를 내세우며 노동자 편을 들 것이다. 반면 어떤 우파는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잣대(자본 투여의 양)을 내세우며 자본가나 주식투자자들의 편을 들 것이다. 또 다른 분파들(주주나 시민 등)도 자신만의 잣대를 내세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서로 상이한 잣대이자 통약불가능한, 비교불가능한 잣대들 사이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 어느 쪽도 절대적으로 정당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모든 당사자들은 일정한 타협(negotiation)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그 타협의 다른 이름이 바로 중용이다. 중간 값 또는 타협 값.

 

내가 알기로 데리다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바로 타협에 있다. 이중구속 속에서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정치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정치는 싸움이며 그 싸움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타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다. 

 

자신의 잣대만이 유일한 잣대라고 주장하는 순간 정치는 전쟁으로, 내전으로 돌변한다. 물론, 때로 그것은 필요하다. 극한적인 상황이 온다면. 그러나 그 파국의 가능성을 피할 줄 아는 것도 필요하며, 이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실천적 지혜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프로네시스, 실천적 지혜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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