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오피스

<헤어질 결심>을 라캉이라면 어떻게 분석했을까? 본문

非평

<헤어질 결심>을 라캉이라면 어떻게 분석했을까?

marxpino 2024. 4. 3. 01:51

* 인터넷 문서의 한계로 고대 그리스어의 소문자 파이는 여기서는 j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라캉적 관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에 대한 몇몇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라캉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라캉과 영화라는 주제를 다루는 일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라캉은 영화에 대해 거의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후기 세미나 어디에선가 오시나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1976)에 대해 ‘이 영화는 일본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화였다’는 짧은 언급을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것이 전부다. 아마도 사람들이 라캉을 영화와 자꾸 관련시키는 것은 라캉 자신이 아니라 지젝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지젝은 라캉이 아니다. 우리는 라캉 자신의 관점을 알아보고 그 관점에서 영화를 논해보고자 한다.

영화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그것은 활동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영화 = 이미지(사진 또는 그림) + 운동(시간)’이다. 이 가운데 먼저 그림의 차원, 회화의 차원을 잠깐 살펴보자. 사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회화 또한 욕망의 문제에 접근하는 하나의 예술적 방식이다. 이는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에 대해 라캉이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세미나 11)에서 논한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화가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이 누가 그림을 잘 그리나 내기를 했다. 제욱시스는 포도 그림을 그려 새들로 하여금 그것을 먹으려고 달려들게 만들었다. 자신의 그림에 대해 우쭐해하며 파라시오스에게 그가 그린 그림도 보여 달라고 하자 파라시오스는 자신의 그림이 있는 곳으로 제욱시스를 데려갔는데 그의 그림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제욱시스는 그림을 보려고 베일을 걷어내려 했지만, 놀랍게도 그 베일이 바로 그림이었다. 그리하여 승부가 났다. 파라시오스의 승리였다. 제욱시스는 단지 새들을 사로잡는 상상적 포획의 힘을 가진 이미지를 그릴 수 있었지만,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가 자신이 그린 베일 너머의 것을 욕망하게 만들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욕망은 이렇게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 너머에 있는 실재(the real)에 대한 것이다. 라캉은 이런 실재의 자리에 팔루스(j, 소문자 파이)의 가치를 취하는, 주체가 잃어버린 기표가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환상의 핵심 구조는 그 상실된 기표, 즉 팔루스가 반드시 베일에 가려져 모종의 실루엣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만일 베일 없이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된다면 오히려 그것은 흉물스러운 것, 끔찍한 것, 외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고 만다. 라캉의 환상공식은 $◇a인데, 여기서 $는 어떤 기표를 상실함으로써 의식적인 자아와 무의식의 주체로 분열된 주체를 의미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a는 이 주체 안에서 욕망을 야기하는 대상-원인을 의미한다(가운데 삽입되어 있는 ◇는 양자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표시하고, 환상공식 속에서 그것은 욕망의 관계를 뜻한다). 기표의 상실로 인해 생겨나는 ‘공백’이 바로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공백 속으로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들어오게 되면 주체는 그 대상을 욕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 환상 공식은 ‘ $ ◇a … the real(j)’로 확장될 수 있다. 여기서 a는 구체적인 대상이 그 공백 속으로 들어섬에 따라 하나의 불투명한 이미지로 변하고, 자신의 뒤에 있는 실재를 가리는 스크린(가림막)의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주체를 실재로부터 보호하는 스크린이자, 주체를 매혹시키는 무언가를 감춘 눈부신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회화가 아니지만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팔루스는 베일 또는 스크린에 가려져 있을 때에만 욕망을 작동시킨다는 점 말이다.

회화가 이렇게 욕망을 표현하거나 욕망을 통해 작동하지만, 여전히 회화는 시간을 도입하기 매우 어려운 장르다. 이 때문에 시간의 차원을 추가하는 영화야말로 우리는 욕망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데에 훨씬 더 적합한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욕망은 나중에 설명할 것처럼 환유, 즉 시간 속에서의 전위(displacement)의 운동을 보여주는 것을 본질적인 특징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극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차원을 갖지만 기술적 차원에서 보면 영화만큼 자유자재로 시간을 다루지는 못한다. 영화는 플래시백 기법을 좀 더 자유롭고 기동적인 방식으로 구사할 수 있다. 또 극한에서 우리는 몇 년 전에 나왔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테넷>(2020)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이 영화는 양자 물리학의 어떤 관념을 영화적으로 재현하려고 시도하면서 아예 시간을 거꾸로 되감는 혁신적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이런 혁신이 곧바로 높은 예술적 성취도를 의미하는 것까진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잠정적으로 우리는 라캉의 관점에서 (모든 영화까진 아니라 해도) 대체로 영화란 무엇보다 욕망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스크린, 곧 욕망의 스크린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를 정신분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작가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심지어 프로이트조차 때때로 작품의 분석을 작가나 예술가의 무의식에 대한 분석으로 귀결시켰다. 그러나 라캉은 작가의 무의식이 감동적이고 위대한 작품에서만 드러난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예술적 성취도가 떨어지는 작품에서도 우리는 작가의 무의식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준 높은 예술작품을 다룰 때 라캉은 그것이 왜 우리를 감동시키는가에 대해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드라마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드라마가 극중 인물들의 운동을 통해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것,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해 맺는 은밀한 관계를 드러내고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드라마의 작가가 아니라 드라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가 중요하며, 그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욕망의 다양한 포지션이 문제인 것이다.

더불어서 라캉은 드라마의 인물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드라마의 인물은 작가가 다양한 욕망의 포지션(때로는 대립되는)을 결합시키거나 대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드라마의 어떤 인물들은 정신분석학이 분류하는 몇몇 구조(신경증, 정신증, 도착증 등) 가운데 하나만을 전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복수의 구조의 병존이나 교대 등을 전시함으로써 욕망에 대한 질문과 사유를 관객들에게 촉구한다.

 

<그림 1>

 

주지하다시피, 라캉은 욕망의 변증법을 도식화해서 보여주기 위해 ‘욕망의 그래프’를 만들었다(그림 1). 완성된 그래프에는 두 개의 층이 있으며, 1층은 욕구(needs)에 따른 요구(demand)의 수준, 그리고 2층은 욕망(desire)의 수준을 보여준다. 이 두 수준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욕구/요구의 수준은 전적으로 생물학적 본능의 차원(식욕, 수면욕 따위)에서 규정된다면, 욕망은 바로 이 본능의 차원 너머로 떠오르는, 고유하게 인간적인 새로운 지평을 의미한다.

먼저 1층에서 일어나는 일을 간략히 살펴보자. 1층은 아이가 언어의 장 안으로 진입하는 단계이자 스스로 기표를 생산하여 어떤 요구를 하게 되는 단계다. 무엇보다 아이는 어머니로 대표되는 대타자의 말(기표사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라캉은 이런 해석이 언제나 회고(retroaction)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I am hungry.(나는 배가 고프다.)” 여기서 첫 번째 기표인 I를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은 화자를 가리키는 ‘나는’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같은 소리를 가지고 있는 ‘eye(눈)’를 의미할 수도 있고, 또 IMF의 첫 번째 글자인 알파벳 I를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첫 번째 기표(‘아이’)를 듣는 순간 그 기표의 의미를 확정하지 못하고 심지어 두 번째 기표를 듣고 나서도 그것을 하지 못한다(왜냐하면 그 두 기표는 I am 대신 IMF의 첫 두 글자를 뜻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hungry라는 말까지 들은 다음에야 앞으로 다시 돌아와 문장 내 각각의 기표가 가지고 있는 기의를 확정할 수 있게 된다.

이때 문장 끝에 있는 ‘hungry’라는 기표는 라캉이 ‘누빔점’이라고 부르는 역할을 해준다. 누빔점은 프랑스어로는 point de capiton(뿌앙 드 까삐똥)인데 이 말은 일상용어로, 가죽 소파에 달아놓은 단추 따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단추는 단지 예쁘게 보이라고 달아놓은 것이 아니다. 이 단추가 없으면 가죽 커버와 그 안에 있는 쿠션이 서로 미끄러져 마구 움직이게 되고 결국 모양이 엉망으로 변하기 때문에 단추로 고정시켜 놓는 것이다. 라캉은 이 점에 착안해 기표와 기의가 서로 미끄러지는 것을 멈추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기표를 누빔점이라고 불렀다. 주체가 기표 사슬을 해석하는 것은 기표들을 쫓아가면서 그 의미들을 찾아내어 차례차례 결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누빔점의 역할을 하는 기표로부터 출발해 앞서 왔던 기표들 쪽으로 되돌아가 각 기표의 기의를 파악하는 회고적인 방식으로만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체가 처음으로 기표사슬(주로 어머니의 말)을 해석할 수 있게 되고 언어의 장 안으로 진입하게 되면, 그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된 빗금 쳐진 주체( $ )가 된다. 이때 주체의 무의식의 중핵을 이루는 것은 바로 그가 잃어버린 기표, 즉 팔루스의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잃어버린 기표다. 지면 관계 상 이런 상실이 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가를 이 글에서 설명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라캉은 이를 -j , 즉 마이너스 팔루스로 표시한다는 점이 우리에겐 중요하다.

하지만 주체가 언어의 장에 진입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욕구와 요구의 수준(1층)에 있을 뿐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기표(-j)를 되찾고자 하는 운동은 오직 욕망의 수준에서 시작될 수 있을 뿐인데, 욕망의 변증법은 대타자가 젖을 준다든지, 따뜻하게 보살펴 준다든지 함으로써 주체의 생물학적 욕구에 따른 요구를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욕망하는 존재로 나타날 때 시작된다.

라캉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 이는 주체가 대타자를 욕망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흔히 오해하듯이 대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주체 자신도 욕망한다는 뜻도 아니다. 정확히 그것은 주체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서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길, 즉 사랑받기를 욕망한다. 폴 마르쿠스 감독의 영화 <브레이크업: 이별 후에>(1998)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과거에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회고한다. 식사 후 남자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여자가 계속 불만스러워 하며 투덜댄다. 남자가 ‘나는 그래도 설거지라도 하잖아, 다른 남자들은 설거지도 하지 않아’라고 말하자, 여자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당신이 설거지를 하길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당신이 설거지를 하길 원하기를 원해!’ 남자는 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 때문에 결국 헤어지게 되지만, 여기서 우리는 여자가 욕구와 욕망의 수준을 완벽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자가 설거지를 하길 원하는 것은 욕구의 수준이라고 한다면, 설거지를 하길 원하기를 원하는 수준, 즉 자신을 사랑해서 남자가 설거지를 하길 바라는 수준은 욕망의 수준이다.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즉 원하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주체의 욕망의 구조인 것이다.

대타자의 욕망이 문제가 되자마자, 이미 만들어졌던 누빔점이 다시 해체되는 놀라운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대타자의 말의 의미가 확정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하는 대타자의 무의식적 욕망이 그 의미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져 도망가기 때문이다. 대타자가 ‘I am hungry’라고 말한 후에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보자. ‘Hungry for knowledge!(나는 지식에 굶주려 있다!)’ 처음에 주체는 대타자가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 한다고 여겼는데, 또 다른 기표들이 도착하면서 그 의미는 이제 무엇인가를 배우고 싶다는 것으로 뒤바뀐다. 이미 형성된 누빔점이 부서지고 또 다른 누빔점이 만들어지는 식으로 대타자의 욕망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 즉 전위(dis-place)되는 것을 가리켜 라캉은 그것을 환유(metonymy)라고 불렀다. 라캉에 따르면 환유는 욕망의 본질적 구조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이런 누빔점의 환유적 해체를 가장 훌륭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맥베스는 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된 후 자신이 살고 있는 던시내인 성으로 반군이 진격해오자 두려워져 애초에 자신이 왕이 될 거라 예언했던 세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묻는다. 세 마녀는 맥베스에게 ‘버냄 숲이 던시내인 성으로 오기 전까지는 맥베스는 안전하다’고 예언한다. 맥베스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버냄 숲이 던시내인 성으로 올 리가 없으니 자신이 안전하다고 철썩 같이 믿고 돌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반군이 버냄 숲에서 야영을 하고 그 다음날 숲의 나뭇가지 등으로 위장한 채 던시내인 성으로 몰려온다. 보초를 서던 병사가 맥베스에게 외친다. ‘버냄 숲이 오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작품에 등장시키는 저 세 마녀는 나이어린 소녀, 중년의 여자, 노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들을 통해 시간 속에서 환유적 누빔점이 형성되고 해체됨에 따라 왕이 되고자 하는 맥베스의 욕망이 어떻게 좌절하게 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우리가 앞서 본 욕망의 그래프의 1층과 2층 사이 중간 지점의 오른 편에 보면 소문자 d가 적혀 있는데, 이는 바로 욕망(desire)을 의미한다. 1층이 보여주는 욕구의 지평 너머로 욕망의 지평이 떠오르게 되고 이를 통해 2층 전체가 구축되기 시작한다. 다른 한편, d의 바로 맞은편에는 환상공식( $ ◇a)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체가 대상 a를 욕망하는 것이 바로 환상인데, 앞서 말했듯이 a의 뒤에는 실재(잃어버린 기표로서 -j)가 있다.

이제 ‘I am hungry.’ 뒤에 따라오는 것이 ‘Hungry for knowledge!’가 아니라 ‘Hungry for justice!(나는 정의에 굶주려 있다!)’, ‘Hungry for dignity!(나는 품위/존엄에 굶주려 있다!)’일 수도 있고, 또 다른 한편 ‘Hungry for sex!(나는 섹스에 굶주려 있다!)’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이는 우리 논의의 핵심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욕망의 그래프의 2층 최상단 오른쪽에 보면 $ ◇D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라캉의 충동공식이다. 즉 주체가 자신의 요구(demand의 D)에 대해 어떤 특이한 관계를 맺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충동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가 무엇일까? 라캉은 『에크리』에 실려 있는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이라는 글에서 충동을 규정하면서, 요구에서 주체가 사라지고, 더 나아가 요구 자체까지도 요구로부터 사라질 때 그것이 충동이라고 말한다. 주체가 D로부터 사라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가 D와 등치되거나 D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D와 마주보고 그 바깥으로부터 그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구로부터 요구가 사라진다는 말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데, 사실은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생각해봄으로써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아이에게 어머니가 젖을 충분히 많이 물려서 아이의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고, 심지어 너무 많이 먹인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인데, 아이가 계속해서 젖을 달라 보채면서 요구를 한다. 그렇다면 이 요구는 더 이상 생물학적 욕구에 따른 요구라고 볼 수가 없다. 요구에서 생물학적 욕구에 따른 요구가 사라질 때 남는 것, 그것이 바로 충동이다.

라캉에 따르면, 충동은 이렇게 욕구/요구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은 윤리적인 것, 특히 칸트적 의미에서 윤리적인 것의 차원에 속한다. 칸트는 주지하다시피 자의(Willkür, arbitrary will)와 자유(Freiheit, freedom)를 구분한다. 자의가 욕구(즉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자신의 생존 및 생명 본능에 따라 자기 멋대로 사는 것)에 관련되는 것이라면, 자유는 오히려 그런 욕구로부터 주체가 스스로 단절할 수 있는 능력에 관련된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빵을 훔치지 않고,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언제나 윤리적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자유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칸트에게서 자유는 도덕법과 대립되기는커녕 도덕법과 등치된다. 법이 곧 자유인 것이다.

이는 물론 욕구에 따른 삶을 전혀 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 욕구에 따라 살다가도 어떤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직면할 수 있으며, 이때 우리는 욕구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데스데모나와 논쟁하며 자기가 세상을 가질 수 있다면 자기는 불륜도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하던 에밀리아가 외려 데스데모나가 죽은 후에는 자신에게 큰 비난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카시오의 집에 떨어뜨려 놓고 왔다고 폭로할 때, 그녀는 분명 윤리적 주체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욕망의 그래프를 보자. 우리는 이미 거기 기입되어 있는 환상공식의 대상 a 뒤에는 상실된 팔루스(-j)가 베일에 가려진 채 어른거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환상공식은 보다시피 두 수준 사이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충동공식의 수준(2층 최상단의 $ ◇D), 그리고 욕구와 요구의 s(A)의 수준(1층) 사이에 있다. 여기서 s(A)는 대타자가 말하는 기표의 기의라는 뜻이다(소문자 s는 기의를 뜻한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라캉은 환상공식이 이 두 수준 사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된다고 말한다. ‘I am hungry’가 ‘Hungry for justice!, Hungry for dignity!’ 쪽으로, 즉 도덕법 쪽으로 기울 수도 있지만(충동의 수준), 반대로 ‘Hungry for sex!’ 쪽으로 기울 수도 있다(생식욕구의 수준). 욕망은 충동의 수준으로 올라갈 때 순수화되고, 욕구의 수준으로 내려올 때 불순해진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헤어질 결심>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론적인 논의를 정리한 것 같다. 이 영화는 무엇에 대한 영화인가? 우리는 이 영화가 무엇보다도 기표에 대한 영화라고 본다. 사실 박찬욱 감독은 이를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출발하는데, 일종의 싱거운 말장난을 영화 앞쪽에 위치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원전 완전 안전.”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 말을 한 것은 장해준의 아내인 안정안이다. 안정안이라는 이름 안에는 ‘안정’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보인다. 나중에 우리는 이 이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송서래는 왜 매혹적인가? 물론 송서래 역할을 맡은 탕웨이라는 배우가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탕웨이가 연기한 어떤 다른 인물보다 송서래라는 인물이 훨씬 더 매혹적이라는 점은 별도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사실 송서래가 매혹적인 것은 바로 이 인물 자체가 기표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어떤 의미(기의)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표로, 기표의 기표성이 도드라지는 인물로 나타난다. 탕웨이라는 배우가 이 매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외모(이미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며 한국말에 능숙치 못한 배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송서래를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기표들은 끊임없이 기의와 미끄러지면서 좀처럼 누벼지지 않는데, 바로 거기에서 그녀가 가진 매혹의 깊이(이미지 뒤에 있는 깊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송서래가 남편의 시신을 확인하러 온 장면을 보자.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봐.’ 여기서 ‘마침내’라는 말은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결국’이라고 말할 만한 곳에서 그녀는 ‘마침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마침내’에는 기다림의 끝에, 온갖 고초 끝에, 온갖 장애물을 헤치고 바라던 바가 이루어졌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심지어 ‘마침내 그는 숨을 거두었다’라는 말까지도 그는 마침내 그 모든 우여곡절과 고난을 뒤로하고 영면하게 되었다, 영원히 쉴 수 있게 되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그렇다면 이 마침내는 누구의 바램인가? 송서래가 기다리던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뉘앙스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확실한가? 이는 단순히 송서래가 중국에서 왔고 한국말이 서툴러서 단어 선택을 잘못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바로 대타자인 송서래의 기표와 그로부터 미끄러져 벗어나는 그녀의 욕망이 문제인 것이다.

또 다른 장면도 보자. 취조실에서 남편의 시신 사진을 보고 송서래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던 대로 운명하셨습니다. 운명 … 맞나?’ 그러고 나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이 한국어 단어를 잘 모를 때는 웃게 된다고 덧붙이면서. 그런데 저 문장은 보다시피 주어가 없다. 원하던 대로… 하지만 누가 원하는 것일까? 남편이 원하던 대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송서래 자신이 원하던 대로일 수도 있다. 환유적 미끄러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백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취조실 장면에 바로 이어지는 것이 장해준과 그의 부인 안정안의 섹스 장면이다. 동시에 송서래가 자신의 집에서 보고 있는 TV 드라마 장면이 번갈아 나오는데, 거기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이 대사는 이 영화에 세 번 나온다. 먼저 TV 드라마 주인공이 말하고, 송서래가 그것을 따라 연습하고, 마지막으로 영화의 뒷부분에서 송서래가 두 번째 남편을 죽이고 장해준 형사가 찾아와, ‘이럴려고 오포에 왔습니까?’ 하고 물을 때,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반복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송서래의 매력은 바로 그녀가 기의 없는 기표, 또는 기의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심지어 영화 후반에 그녀가 입었던 옷도 두 가지 색 사이에서 미끄러진다. 녹색과 파란색. 보는 사람에 따라 조명에 따라 다른 색깔로 변한다. 송서래의 매력이 바로 그녀의 기표성에 있다는 것은 후반부에 나오는 장해준의 혼잣말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그는 송서래가 사극, 역사 드라마를 보고 말을 배워서 말투가 고풍스러운 것인가 궁금해 한다.

고풍스러운 것, 이것은 이 영화에서 아주 핵심적인 주제다. 그것은 품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송서래는 사찰에서 장해준과 데이트를 하면서 장해준이 왜 좋은지에 대해, 품위가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그러자 장해준이 묻는다. 경찰치고는 품위가 있다는 건가요? 한국인치고는? 남자치고는? 그때 송서래가 답한다. ‘현대인치고는.’ 고풍스러움은 곧 품위다.

그런데 이 데이트를 즐기고 나서, 영화가 변하기 시작한다. 장해준은 우연한 계기에 어떤 단서를 발견하고 송서래가 실제론 첫 번째 남편을 죽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단서를 찾아내고 장해준은 송서래에게 찾아와서 말한다.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나는 자부심 있는 경찰관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그가 말하는 품위와 자부심과 같은 것들은 장해준이라는 인물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바로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 상에서 그는 송서래를 대상 a로서 욕망하고 그녀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 그의 환상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송서래가 사실은 살인자임이 드러나고, 그리하여 송서래는 자신의 욕구/필요에 따라 살인을 저지른 자로서 s(A)의 수준으로 내려간다. 반면 장해준은 필사적으로 충동의 수준에 매달리고자 안간힘을 쓴다. 품위, 법, 법규(code)로서의 충동, $ ◇D의 수준에. 그리고 이로 인해 장해준의 환상공식 안으로 모종의 불균형이 도입되는 것이다. 안개 없는 호미산으로 송서래가 장해준을 불러냈을 때 장해준은 자신도 헤어져 있는 동안 매일 그녀에 대한 생각을 했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그들이 경찰과 피의자의 관계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고 말하며 행동하지 못하고 마비된다. 키스를 하는 쪽도 송서래이고, 그는 자신을 떠나는 그녀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가 근대 비극의 시작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어떤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는 점을 조금씩 눈치 챌 수 있다. 장해준은 햄릿의 위치에 가있고, 송서래는 오필리아의 위치에 가있다(물론 변주되고 있고 특히 송서래에 의한 오필리아의 변주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나중에 논할 것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를 논하기에 앞서서 거트루드를 먼저 보자. 햄릿은 아버지가 죽은 뒤 두 달 만에 어머니인 거트루드가 삼촌과 결혼하자 이렇게 한탄한다. ‘아아, 참으로 더럽혀진 육체여, 차라리 녹아버려 이슬이 되거나. 전능하신 신은 왜 자살을 금하는 율법을 정해 자살도 못하도록 하셨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채 두 달도 안 되었는데 … 그토록 훌륭하신 아버지는 지금 왕과 비교하면 태양과 암흑이지.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에게 매달려 사랑을 갈구했지. 아, 그런데 한 달도 못 되어…. 오, 생각하기도 싫구나.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인가!’

여섯 번째 세미나인 『욕망과 그 해석』(Desire and Its Interpretation)에서 라캉은, 햄릿이 나중에 어머니와 독대했을 때 그가 처음에 애원했던 것은 그녀가 제발 $ ◇D, 즉 충동의 수준으로 다시 올라와 달라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지금 거트루드는 그냥 대놓고 드러나 있는 팔루스, 생물학적 생식 욕구에 다름 아닌 존재, 라캉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한 사람이 떠나자 다른 한 사람이 들어가는 벌어져 있는 성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s(A)의 수준, ‘Hungry for sex!’의 수준으로 내려와 있는 것이다. ‘어머니 나이쯤 되면 정욕도 사그라져 분별심에 복종하기 마련인데, 꽃을 본 나비처럼 어찌 물불을 가리지 못하며 여기서 이리로 옮긴단 말입니까. 어머니와 함께 이불속에서 자는 그 인간은 살인자, 악당, 선왕의 발가락 때만도 못한 놈, 왕위와 왕국을 가로채어 슬쩍 주머니에 집어넣는 날도둑, 누더기를 걸친 가짜 왕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햄릿은 어머니에게 법, 법규, 충동의 수준으로 다시 올라와 달라고 애원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그냥 클라우디우스의 침실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어머니로 인해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경험하면서, 오필리아에 대한 햄릿의 태도도 변하게 된다. 라캉은 오필리아는 곧 팔루스라고 말한다. 라캉은 부아자크(Boisacq)라는 학자의 <그리스어 어원사전>을 참조해서 오필리아(Ophelia)라는 이름을 추적해 들아간다. 그 이름과 유사한 ‘ophelio’라는 말은 호메로스의 작품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 말은 ‘부풀어 오르게 만들다, 커지게 만들다, 어떤 것이 두꺼워지게 만들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동사형태 중 하나는 부아자크에 따르면 ‘ophallos’다. 어원상으로도 ‘오필리아 = 팔루스’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라캉은 이런 어원을 꼭 참조치 않아도 극의 구조상으로 그녀가 팔루스임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팔루스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가, 아니면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 있는가이다. 라캉에 따르면, 바로 이 차이 때문에 오필리아에 대한 햄릿의 태도는 드라마 상에서 3단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첫 번째 단계는 아직 햄릿이 오필리아를 욕망하고 있는 때이고, 이는 $ ◇a로 공식화 될 수 있다. 즉 이때 햄릿은 오필리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여성을 불신하게 되면서 햄릿의 태도가 변하게 된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의 햄릿의 태도를 특징짓는 공식은 $ ◇a가 아니라 $ ◇j이다. 대상 a의 베일에 가려져 실루엣으로 등장해야 하는 팔루스가 직접 햄릿의 눈앞에 덩그러니 나와 있는 셈이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오필리아는 노출된 팔루스, 즉 생명의 기관, 생물학적 기능으로 나타나고, 바로 이 때문에 햄릿은 그녀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임신할 수 있는 능력으로 환원된 존재, ‘죄인들을 낳는 번식자(breeder of sinners)’ 취급을 한다. 라캉에 따르면 햄릿은 바로 이를 계기로 신경증(neurosis)이 아니라 도착증(perversion)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데, 그는 오필리아에게 과도한 온갖 모욕을 퍼부으며 공격을 가하는 가학증자(sadist)의 태도를 보여준다.

라캉에 따르면 도착증과 신경증의 차이는 환상공식 $ ◇a에서 $ 쪽에 초점이 가있는가(신경증), 아니면 a 쪽에 초점이 가있는가(도착증)에 달려있다. 나중에 라캉이 쓰게 되는 「사드와 함께 칸트를」에서는 도착증의 구조를 규정하기 위해 아예 환상공식을 뒤집어서 a◇ $ 로 정의한다. 여기서 주체는 a의 자리를 차지하며, $의 자리에 와있는 대타자를 고문하는 도구로서의 ‘영원한 대상’(더 이상 주체가 아닌 대상, 고통을 주기 위해 찌르는 바늘)으로 변한다. 이런 의미에서 도착증자는 시간 바깥(영원성)에 나가 있는 반면, 신경증자는 시간 속에 있으며 무엇보다 시간이 중요하다. 곧 신경증자에게 언제나 문제는 진실의 수준이 아니라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인 것이다.

이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한데, 베일에 가려진 팔루스는 그것이 있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없고, 늘 보일 듯 말듯 한 실루엣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정확히 나타나는 순간을 포착하기가 영 쉽지 않아진다. 햄릿이 행동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거사를 미루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햄릿은 ‘왕은 몸(body)을 가지고 있지만 몸은 왕과 함께 있지 않아. 왕은 사물(thing)이야 … 없음의 사물(a thing of nothing)’이라고 말하는데, 라캉은 이 대사에서 왕을 팔루스로 바꿔서 읽어보라고 말한다. 라캉에 따르면, 신경증 가운데 강박은 계속 완벽한 준비를 하기 위해 진실의 순간을 지속적으로 미루는 반면, 히스테리는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이 순간이 너무 일찍 도착해서 경험한 실패를 계속 반복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라캉은 허구적 인물로서의 햄릿이 이 모든 구조들을 다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강박과 히스테리는 물론 도착까지도.

하지만 다시 변화가 오고 세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오필리아는 그녀가 죽었을 때 비로소 다시 햄릿을 위한 욕망의 대상으로 복구되기 때문이다. 바로 묘지 장면이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오필리아의 무덤 바닥에서 자신이야말로 오필리아를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말하며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와 뒤엉켜 주먹다짐을 한다. ‘나는 오필리아를 사랑했다. 오빠가 4만 명이나 되어 몽땅 합친대도 내 사랑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너 따위가 오필리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송서래에 대한 장해준의 태도 변화 또한 3단계로 진행되며, 햄릿의 것과 거의 평행한 구조를 보여준다. 오필리아와 마찬가지로 송서래가 곧 팔루스라는 점은 장해준이 호미산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한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처음에 좋아한 것이 그녀의 꼿꼿한 자세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알다시피 꼿꼿함은 도덕성, 법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팔루스의 어떤 특징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장해준도 햄릿처럼 신경증의 특징도 보여주고, 환상에 불균형이 생겨난 후에는 도착증의 특징을 보이면서 송서래에 대한 과도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된다. 고급 초밥 대신 식은 핫도그를 하나 던져주고,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범인으로 확신하면서 모든 수사를 그 결론에 맞추어 밀고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장해준이 환상에서 벗어나 도착적이 되는 2단계는, 송서래가 욕망의 그래프의 두 수준 사이에서 욕구의 수준으로 전락하여 있고, 장해준은 충동, 법, 법규, 품위의 수준에 매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마침내, 단일한, 송서래의 ‘헤어질 결심’이 나오게 된다. 즉 (오필리아처럼) 자기 자신을 죽이고 사라짐으로써 스스로를 다시 장해준의 욕망의 대상으로 복구시키고야 말겠다는 치명적인 결심 말이다. ‘난 해준 씨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서 오포에 갔나 봐요.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자고 내 생각만 해요.’ 햄릿과 장해준은 모두 자신의 대상 a의 자리에 있던 여성이 죽은 후에야 애도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욕구의 수준에서 분리해서 다시 충동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송서래의 이런 헤어질 결심은 안정안의 헤어질 결심과 명확하게 대조 된다. 사실 송서래가 아니라 안정안이야말로 <햄릿>의 거트루드의 화신이다. 늘 이름처럼 안정을 추구하는 안정안이야말로 순수한 욕구, 성적 생식, 탐욕/폭식(voracity)의 수준으로 내려가 있다. 남성 갱년기 우울증에 좋다는 자라를 들고 내연남 이주임과 함께 떠나는 그녀의 헤어질 결심이 보여주는 것이 정확히 그것이다. 그녀가 이과출신이라는 것도, 또 섹스가 건강에 좋다는 따위의 대사를 하는 것도 바로 그녀가 위치해 있는 수준이 바로 욕구의 수준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반면 송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자신을 욕구의 수준에서 분리하고 욕망의 수준으로 상승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생명본능이 아니라 죽음충동의 선을 따라서.

앞서 말했듯이, 송서래는 오필리아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놀라운 변주다. 이것이 바로 박찬욱 감독의 천재적인 예술적 개입이 아닌가 싶은데, 왜냐하면 송서래는 이 영화에서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 등장할 뿐 아니라, 동시에 범죄를 저지르는 주체, 결심과 행위의 주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범죄를 저지르고 그 죄를 스스로 목숨을 던져 갚는다. 이런 면에서 송서래는 고대 비극의 영웅(행위의 주체)과 근대 비극의 인물(오필리아라는 대상)의 응축으로 나타나고, 아마도 이것이 <헤어질 결심>을 고대 비극도 근대 비극도 아닌 포스트-근대적 비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이디푸스 왕은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것이 범죄인지 모른 채로 저지르고, 자신의 죄를 알게 된 후에는 스스로 눈을 브로치로 찌름으로써 죄 값을 치른다(행위가 앎보다 앞서는 고대적 주체). 햄릿의 경우, 범죄는 자신의 삼촌에 의해 저질러지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유령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그가 행동으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정확히 처음부터 ‘알고 있는 주체’로 출발하기 때문이다(앎이 행위보다 앞서는 근대적 주체).

송서래의 경우는 매우 독특하다. 비록 오필리아는 자살을 하지만 그것은 ‘헤어질 결심’이 아니라 미쳐서 저지른 실수와도 같은 것인 반면, 송서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으면서 더욱 더 치밀한 계획 하에 주도면밀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자이고, 동시에 자신의 죄를 목숨으로 갚아 내는 자이자, 바로 그 죄 갚음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다시 숭고한 대상 a의 지위로 올려놓는 데에 성공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고대와 근대의 비극적 행위의 주체는 대체로 남자였지만, 이제 그것은 여자의 몫이 된다. 아마도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안티고네일 것이다. 송서래는 어찌 보면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 않는’ 주체로서의 안티고네와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오필리아의 응축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송서래의 오필리아적 차원은 (남녀관계의 총체적 결렬을 초래하는 안티고네와 달리) 남녀 간의 욕망의 관계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질문을 여전히 우리에게 제기할 수 있게 허락하는 것 같다.

왜 <헤어질 결심>은 감동적인가? 라캉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이 영화가 욕망의 구조의 다양한 변주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해 윤리적 질문을 던지도록 촉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우리는 이 질문을 페미니즘과 관련시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안정안의 페미니즘이 있다면, 또한 우리는 송서래의 페미니즘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여성의 모든 욕구를 정당화하려는 페미니즘인가, 아니면 부성법이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진 이후 여성과 남성이 모두 따라야 할 새로운 법과 윤리를 발견하고 정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시도하는 욕망과 충동의 페미니즘인가? 그 속에서 여성과 남성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우리는 아직 안개 속에 있지만, 이 영화를 계기로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제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참고문헌

라캉, 자크. 2008.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세미나 11], 맹정현·이수련 옮김, 새물결.

______. 2019. 『에크리』, 홍준기·이종영·조형준·김대진 옮김, 새물결.

Lacan, Jacques. 2019. Desire and Its Interpretation [세미나 6], Ed. Jacques-Alain Miller, Trans. Bruce Fink, Medford: Polity Pres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