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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평

영화 <크래쉬>를 보고....

marxpino 2014. 3. 11. 04:14

오래 전에 미국에 있을 때 썼던 글이지만, 어제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 나누다 생각이 나서 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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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래쉬>를 보고....

 

얼마 전에 영화 <크래쉬crash>를 디비디로 봤다. 출시된지는 한 참 된 듯한데, 장사가 썩 잘 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한 쪽 구석에 서너 개만 거의 숨겨져 있다시피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은 아카데미 수상작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동안 바빠서 비디오 가게에 가보지 않고 있다가 시기를 놓쳤고 나중에는 혼자 '아직 안 나온 모양이지'하면서 멍청하게 계속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비디오 가게도 아닌 다른 곳을 지나다 우연히 <크래쉬> 디비디가 굴러다니는 것을 봤다. 아니 이럴루가! 결국 며칠 있다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와 봤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이 영화를 보고 난 내 전체적인 느낌은 아주 좋은 편은 아니다. 싫었던 측면과 좋았던 측면이 있는데, 우선 싫었던 측면부터 말해보자. 이 영화는 인종주의 문제에 대한 영화로 알려져 있는데, 뭐 그것이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어떻게 보면 가족 혹은 가족주의인 듯하다. 차라리 '어떻게 이토록 숨 막히는 인종전쟁 속에서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주의에 열광하는 보수적인 아카데미가 이 영화에 작품상을 준 것은 어떻게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영화 속에 그려지고 있는 가족들은 모두 하나 같이 갈등 없고 서로를 사랑하는, 가족의 이데아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이 보이는 가족들이다. 심지어 인종문제로 인해 가족 내에 어떤 갈등이 도입되었을 때조차 그것은 외부로부터 도입된 어떤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족 그 자체를 문제로 삼게 만들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 시련을 통해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찾도록 만든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종주의가 뼛속 깊숙히까지 물들어 있는 경찰(맷 딜런)이 갑자기 인종주의자가 아닌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정확히 그가 프로스태이트 캔서로 투병중인 아버지를 밤에 돌보고, 의료보험회사 흑인 여성 직원을 상대로 싸우며 자기 아버지를 도와달라고 사뭇 감동적인 연설을 늘어놓을 때였다(이 일이 없었다면 그가 그 전날 흑인 남성의 와이프라는 이유로 성희롱을 한 백인 여성을 나중에 목숨 걸고 구하는 용기가 영화 속에서 당체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가족이 함께 상점을 경영하는) "페르지안" 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실탄 대신 공포탄을 쏘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범죄를 저지르는 일로부터 보호하거나, 또 다른 가족의 아버지(열쇠 기술자)의 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실탄 대신 공포탄이 날아오게 만든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애초에 공포탄을 구입한 것이 의도된 것이었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이 영화에서 끝까지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는데 바로 이 결정 불가능한 틈바구니야 말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인종전쟁의 위험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와이프에 대한 사랑으로 결국 용기를 내고 경찰에 맞서는 흑인 프로듀서, 또 흑인들을 봐주는 거짓말들 보다는 진정한 '공평함'과 '진실'을 추구하다가 쓰리 스트라이크의 위험에 처한 동생 문제가 걸리자 타협했지만 결국 평소에 가족(혹은 그 확대된 버전으로서의 인종)보다는 '공평함'을 추구한 원죄로 말미암아 동생을 죽이게 되는 어떤 흑인 경찰(나중에 그의 어머니가 동생의 죽음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장면이 묘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까지...이 모두가 가족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둘러싸고 회전하고 있다. 이 영화의 이러한 가족주의가 영화를 인종주의에 대한 진정한 인식으로 전진하는 것을 상당히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 나는 이 영화를 다소간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는 지점을 봤는데, 그것은 '인종주의라는 관념 자체가 어떻게 보면 스테레오 타입이 아니냐'는 이 영화의 문제의식으로 인한 것이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사실 우리 모두는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인종주의는 단지 그러한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백인 뿐 아니라 유색인종들도) 활용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부정적인 방향과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잠재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결국 인종 뿐만 아니라 인종주의라는 것도 없으며 우리는 모두 휴먼이라는 식으로 갈 수 있는데 이를 열심히 부채질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가족주의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이 영화에 없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나를 조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위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 인종주의 및 인종주의를 막기 위한 사회적인 장치들은 마치 자동차의 "철판과 유리"와도 같아서 사람들을 서로로부터 분리시켜놓을 뿐이다. 인종주의뿐만 아니라 그것을 막으려는 사회적 노력까지도 모두 사람들 간의 접촉, 즉 교통을 가로막음으로써 끝내는 더욱 더 비극적인 결말(서로간의 크래쉬)을 가져오고 만다. 사실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종문제를 둘러싼 비극의 본질이다.

 

영화 제목부터가 자동차 사고를 표현하는 크래쉬이지만, 자동차는 이 영화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핵심적인 메타포로 나타난다. 자동차 안은 정확히 서로로부터 격리된 모든 개인들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혹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러한 사적 공간으로의 타자의 침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백인들의 차를 강도질 하는 흑인 부랑아들이 하나의 예라면, 인종 간 결혼을 한 부부의 차를 세우고 횡포를 부리는 백인 경찰관들이 또 다른 예다. 이러한 '자동차 안으로의 침입'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는 결국 인종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신참 경찰이 흑인 부랑아를 자기 차에 태웠다가 좁아진 타자와의 거리가 가져다주는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엉뚱한 이유로 살해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폭력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또한 그 동일한 접촉 속에서 보려고 한다. 예를 들면, 흑인 부랑아들이 흑인 프로듀서의 차를 훔치려고 시도했다가 피지컬한 콘택트가 일어나고, 어떤 반전이 일어나 주체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부분, 또 인신매매를 하는 한국인의 차를 훔쳐서 팔아먹으려고 했다가 그 차에 있던 아시아 계 사람들을 구해주는 부분이 그것이다. 즉 어렵겠지만, 그리고 아마도 어떤 의도치 않은 끔찍한 결과들이 이어질 수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사태의 '변화'는 '크래쉬' 내지 어떤 '침투'를 통해, 어떤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정치적 정당성)'라는 것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변화'다. 그래서 우리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가 도대체 인종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종들 간의 격리를 실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종차별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인지가 불확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도 미국에 사는 터라 그와 관련된 경험을 했는데, 슈퍼 마켓에서 물건을 몇 가지 집어들고 계산대에 갔다가 생긴 일이다. 계산대에 있던 사람은 흑인 여성이었고, 돈을 건내려고 하다가 서로 손이 닿을 뻔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손을 잽싸게 피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흑인이라서 손을 피했다고 생각하고 나를 향해 마구 욕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상대편이 흑인일 때는 여성이건 남성이건 간에 접촉을 피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떤 경우엔 또 상황이 뒤집어 질 수도 있는 노릇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상대편도 나도 서로가 가진 폴리티컬리 코렉트한 규칙들과 상대하고 있을 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한 규칙들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위생처리 함으로써 무균질의 인종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깨기 위해서, 누가 갑자기 모험주의적으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표현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만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인종주의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크래쉬>는 바로 이러한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 문제를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말도 안되는 가족주의와 휴머니즘을 향해 도망치고 이는 (휴머니즘의 양가성 때문에) 더욱 더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나 추상적인 (따라서 이론적인) 인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정치적 대중운동일 것이다. 이를 통한 접촉과 교통만이 <크래쉬>의 주의주의 내지 모험주의와 가족주의로의 보수적인 후퇴(즉 자동차 안으로의 후퇴) 사이의 동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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