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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구축과 구조주의 사이에서

marxpino 2021. 6. 12. 08:57

이 논문은 <시대와 철학> 2021년 여름호에 출판될 예정입니다. 편집 이전 본이므로 인용이나 논의는 출판 본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탈구축과 구조주의 사이에서

-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의 소쉬르 비판을 중심으로 -

 

최원(단국대)

 

Jacques Derrida

 

 

1. 들어가며

 

1929년 스위스 다보스(Davos) 철학대회에서 벌어진 카시러(Ernst Cassirer)와의 논쟁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취했던 입장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이른바 대륙철학(continental philosophy)은 현상학적일 뿐 아니라 감성학적/미학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며, (칸트적 용어법에 따르자면) ‘개념’에 대한 ‘직관’의 선차성, ‘자발성’에 대한 ‘수용성’의 선차성을 내세웠던 만큼 그것이 과학에 대한 거부감을 자체에 내장하고 있던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주1/ 이 논쟁에 대해선 Michael Friedman, A Parting of the Ways: Carnap, Cassirer, and Heidegger, Chicago: Open Court, 2000와 Andrew Cutrofello, Continental Philosophy: A Contemporary Introduction, New York: Routledge, 2005를 참조하라.}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1940년대부터 이에 대립하는(그렇지만 영미 분석철학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몇몇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60년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서는 지적 세력관계의 역전을 이루어냈다. 바로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와 캉길렘(Georges Canguillem)에서 시작되는 현대 프랑스 인식론의 전통, 그리고 구조주의라 불리는 거대한 사상운동이 그것이다. 이 양자는 상호침투하면서 언어학(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트루베츠코이Nikolai Trubetzkoy, 야콥슨Roman Jakobson), 인류학(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정신분석학(라캉Jacques Lacan), 맑스주의 역사과학(알튀세르Louis Althusser), 고고학(푸코Michel Foucault) 등의 분야에서 눈부신 사유의 혁신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다양한 인간과학의 영역을 망라하는 구조주의적 사유 안에는 상호 이질적인 경향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단번에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대체로 공유하고 있던 몇 가지 핵심적인 입장들을 꼽아 본다면 우리는 아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먼저 이들은 공히 주체의 철학(현상학은 이 전통에 속한다)을 비판하고 주체를 ‘구성하는’ 위치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옮겨놓음으로써 주체의 근본적인 타율성을 주장했다(이는 통상적으로 오해되듯이 주체라는 범주를 단순히 기각하거나 부정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할 대상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는 점을 유념하자). 둘째, 이들은 요소에 대한 관계의 우위를 주장하고, 더 나아가 요소(“원자”)의 실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반-실체론적(anti-substantialist) 관계론을 수립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이들은 공히 기원에 대한 질문 자체를 거부했으며, 따라서 이 질문을 중심으로 가공되는 그 모든 발생론(genesis)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주2/ 소쉬르는 언어의 기원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라캉은 무의식의 기원을 생물학적 존재의 어떤 맹아적 요소에서 찾고자 하는 시도 일체를 비판하고, 알튀세르는 전체저작에 걸쳐 기원-종말의 목적론과 발생론을 비판하며, 푸코는 기원적 합리성으로부터 인식이 연속적으로 발전해온 사상사가 아니라 인식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상이한 에피스테메의 불연속적이고 돌연한 출현을 분석하는 고고학을 자신의 연구 영역이라 규정한다.}

이 세 가지 입장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데리다는 특이하게도 이 가운데 앞의 두 입장은 대체로 받아들이면서도 세 번째 입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주3/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Jacques Derrida, De la grammatologi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67, p. 67, 앞으로 이 책에서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시한다)에서 구조주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입장에 대해서 일정한 수용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주체에 대해 “에크리튀르는 주체라는 범주 하에서는 결코 사유될 수 없다”(100)고 말하고, 요소와 관계에 대해선, “낡은 구조로부터 전복의 전략적이고 경제적인 그 모든 자원들을 빌려오면서, 그 자원들을 구조적으로, 즉 요소들과 원자들을 고립추출하지 못한 채 빌려오면서, 탈구축의 기획은 항상 어떤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작업(travail)에 의해 이끌려간다”(39, 강조는 인용자)고 말한다.} 사실 기원 및 발생에 대한 질문은 18·19세기 언어학을 지배하고 있던 중심 질문으로, 구조주의 언어학은 이 질문을 거부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정초할 수 있었다. {주4/ 구조주의 언어학자인 벵베니스트(Emil Benveniste)는 덱스(Pierre Daix)와 나눈 대담에서 19세기 언어학이 언어의 기원 또는 탄생 문제에 집착했다면, 이제 언어학자들은 그 문제가 과학적 현실성이 전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에밀 벵베니스트, 「구조주의와 언어학」, 『일반언어학의 여러 문제 2』, 김현권 역,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26~27쪽.} 따라서 데리다가 이 질문을 『그라마톨로지』에서 다시 자신의 논의에 도입했을 때 그것은 우리를 놀라움과 충격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데리다가 기원 및 발생에 대한 질문을 재도입한 것은,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그 관념들에 대한 구조주의적 비판을 단순히 거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전혀 불충분한 것임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탈구축과 구조주의 간의 쟁점이 바로 이 질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한에서, 우리는 데리다의 비판 뿐 아니라 구조주의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 이에 대한 가능한 답변을 생각해 보고 양자의 수렴과 발산을 따져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다수의 구조주의 학자를 다루지만, 특히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를 상세히 논하면서 그들의 연구가 로고스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삼는다. 이 가운데 탈구축과 구조주의 간의 논쟁과 관련해서 우리가 좀 더 집중해야 할 것은 소쉬르에 대한 논의가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데리다가 문제로 삼은 것은 주로 그의 인류학적 연구의 구체적 내용에 한정돼 있다면, 소쉬르의 경우엔 비판의 사정거리가 그의 언어학적 연구의 내용 뿐 아니라 기원에 관한 구조주의적 사유 그 자체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먼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 대한 데리다의 탈구축적 비판을 살펴본 후, 이 비판을 소쉬르 뿐 아니라 몇몇 다른 구조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성찰해봄으로써 양자 간의 쟁점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어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2.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 대한 탈구축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로고스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을 지적하면서 “[진리의 의미작용에 관련된] 이런 로고스 속에서 소리와의 기원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는 결코 단절된 적이 없다”(21, 강조는 데리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는 서양철학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보편적인 영혼의 상태(따라서 진리적인 것)를 재현하는 것은 목소리이며, 에크리튀르는 기껏해야 그런 목소리를 2차적으로 재현하는 “재현의 재현”이라고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파생의 위계질서 또는 순서 속에서 “목소리는 기의(signifié)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22). 목소리를 통해 나오는 음성언어는 문자언어와 달리 화자의 눈앞에서 즉시 사라지기에 그는 마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영혼 속의 의미)와 그것의 재현 사이의 거리가 무화되는 듯한 자기-현전의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목소리는 기표의 절대적 지워짐처럼 자기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서 스스로를 듣는다(s’entend)―이것이 필시 의식이라 부르는 것이리라.”(33, 강조는 데리다) 

그런데 여기서 데리다는 로고스중심주의 및 음성중심주의로 귀결되는 이런 사유는 단지 기호에 대한 어떤 특정한 관점(말하자면 어떤 형이상학적 관점)을 취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라는 의념(notion) 자체가 갖는 문제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매우 발본적인 주장을 펼친다.

목소리를 영혼에, 또는 사유를 기의된 의미(sens signifié)에 불가분 통일시키는 것과 관련해서 보자면 … 모든 기표는, 그리고 무엇보다 씌어진 기표는 파생되는 것이리라. 그것은 항상 기술적(technique)이고 재현적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구성적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런 파생은 ‘기표’라는 의념의 기원 자체다. 기호라는 의념은 항상 그 자체로 기의와 기표의 구분을 함축한다. 이것이 소쉬르에 따라 극한에서 단 하나의 동일한 종이의 양면으로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따라서 기호라는 의념은 음성중심주의이기도 한 이 로고스중심주의의 전통 속에 남아 있다.(22~23, 강조는 인용자) 

왜 데리다는 단지 기의와 기표를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미 기표(문자로 된 기표만이 아닌 모든 기표)를 파생된 것으로 간주하는 로고스중심주의와 음성중심주의에 빠지게 됨을 뜻한다고 보는 것일까?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힌트를 1968년에 데리다가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기호의 물질적 측면(signans)과 기호의 내용적 측면(signatum) 사이의 엄격한 … 구분의 유지 … 는 기의의 개념을 그 자체로 사유와의 단순한 현전 속에서, 언어와는 독립적으로, 즉 기표들의 체계와는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열어놓습니다.”{주5/ 자크 데리다,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 쥴리아 크리스테바와의 대담」, 『입장들』, 박성창 역, 솔, 1992, 42쪽, 강조는 인용자.} 다시 말해서 기호라는 의념에 핵심적인 기의와 기표의 구분이라는 것은 기의가 기표 없이도 그 자체로 규정될 수 있으며, 단지 사후적으로 기표와 결합하거나 기표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파생의 논리를 이미 도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주6/ 사실 데리다가 기표와 기의 사이의 구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최초의 이론가는 아니다. 구조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라캉은 이미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 혹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1957)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확히 기표와 기의 사이에 소쉬르가 상정하는 금지선(barre)을 이론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면서 기표가 기의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하고(신사용·숙녀용 화장실의 예), 그렇게 해서 정신분석학적인 억압을 “기의 없는 기표”의 억압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 라캉에게는 초월적 기의가 아니라 초월적 기표가 있다고까지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라캉, 『에크리』, 홍준기 외 역, 새물결, 2019, 589~631쪽을 보라. 물론 이는 라캉과 데리다가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사유했다는 뜻은 아니다. 데리다의 독창성은 이를 기호라는 의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현전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시켜냈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라캉과 데리다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라캉에게 의미는 기표의 수준도 아니고, 그 보다 더 하위의 수준, 의미와 아무 관계없는 음소 또는 오히려 문자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응축과 대체로서의 “은유”의 형성에 의해서만 궁극적으로 생산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라캉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에 대해서는 그의 1971년 인터뷰인 「입장들: 장-루이 우드빈(Jean-Louis Houdebine)과 기 스카르페타(Guy Scarpetta)와의 대담」, 『입장들』, 113쪽 이하를 참조하고 특히 라캉의 팔루스-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에 대해서는 “La facteur de la vérité”(1975), The Postcard, trans. Alan Bass, Chicago: Chicago University Press, 1987, pp. 411-96을 참조하라. 그러나 우리는 라캉이 스무 번째 세미나인 『앙코르』에서 자신의 팔루스-로고스중심주의를 결정적으로 포기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Lacan, Encore (Le Séminaire Livre XX, 1972-1973), Paris: Éditions du Seuil, 1975. 이 모든 쟁점들에서 라캉이 취한 입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졸저 『라캉 또는 알튀세르』, 난장, 2016을 보라.}

이 때문에 데리다는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논의에서 “하이데거적 상황이 지닌 애매성”(36), 즉 현전의 형이상학 및 로고스중심주의를 위반하고 벗어나는 하이데거의 움직임이 동시에 그 안에 다시 붙들리고 마는 애매성에 대해 논할 때에도, 우리가 그 위반의 측면을 식별할 수 있는 표지는 그가 “존재의 의미”를 어떤 “기의”로 보지 않았다는 점, 그에게 존재란 “기호의 운동을 벗어나”(37)는 것이라고 봤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존재란 로고스에 의해서만 역사로 생산될 수 있으며 그 바깥에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하이데거의 집요함,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이 모든 것이 분명히 지시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기표의 운동을 벗어날 수 없으며 최종심에서 기표와 기의의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37, 강조는 인용자) 

데리다에게 기표와 기의의 “이런 기이한 비-차이”(37)를 부정하고 그 양자를 절대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어떤 “초월적 기의”, 즉 기의들의 기의로서의 “최초의 기의(primum signatum)”(33)를 암묵적으로 상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초월적 기의의 상정이야말로 데리다가 구조주의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과학 담론에서 구조, 기호, 유희」라는 글에서 데리다는 “어떤 중심도 갖지 않는 구조란 생각할 수도 없는 것 그 자체를 오늘날 여전히 대표”하는데, 여기서 “중심은 총체성의 중심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은 총체성에 속하지 않기에, 총체성은 자신의 중심을 다른 곳에 갖는다”고 말하면서 구조주의가 은밀하게 가정하는 기원적이고 초월적인 중심을 비판한다.{주7/ Derrida, “La structure, le signe et le jeu dans le discours des sciences humaines”,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Éditions du Seuil, 1967, p. 410, 강조는 데리다.} 이 중심이 바로 초월적 기의의 자리이며, 이 초월적 기의의 부재 속에서만 의미작용의 유희는 진정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때부터 중심은 없다고, 중심은 어떤 현전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중심은 자연적 장소를 갖지 않는다고, 중심은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기호들의 대체들이 그 속에서 무한하게 유희되는 하나의 기능, 일종의 비-장소라고 필시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해야 했다. 이는 언어가 보편적 문제설정의 장을 침범하는 순간이다. 중심 또는 기원의 부재 속에서 모든 것이―이 단어에 동의한다면―담론, 즉 중심적, 기원적, 또는 초월적 기의가 절대적으로 차이들의 체계 바깥에 결코 현전하지 않는 체계가 되는 순간이다. 초월적 기의의 부재는 의미작용의 장과 유희를 무한하게 확장한다.{주8/ Derrida, op. cit., p. 411, 강조는 인용자.}

그런데 기표와 기의를 완전히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초월적 기의에서 기의들이 파생되고, 이 기의들로부터 음성적 기표들이, 그리고 다시 이 음성적 기표들로부터 문자적 기표들(에크리튀르)이 파생된다는 위계적 사고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음성언어의 표기로서의 에크리튀르만을 (기호체계의 자격을 갖는) 에크리튀르로 인정하고 다른 종류의 에크리튀르는 그로부터 광범위하게 배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소쉬르에게서 기표와 기의의 섞임을 금지하는 것은, 데리다에 따르면, 바로 일반언어학의 제1원칙인 “기호의 자의성”이다. 소쉬르는 자신의 강의에서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기호와 상징을 구분해주는 기준으로 삼았다. “상징은 결코 완전히 자의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특성으로 한다.” {주9/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 최승언 역, 민음사, 1994, 86쪽.} 가령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는 아이콘은 기호가 아니라 상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아이콘이 어떤 프로그램을 가동시킬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콘은 자신이 지시하는 대상과 어떤 닮음의 관계를 맺는다. 기호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과라는 기표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처럼 붉거나 새콤달콤하지 않다. 기표와 기의 사이엔 어떤 공통점도 없는 것이다. 이런 공통점을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지는 말들, 예컨대 의성어조차도 상이한 언어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형성된다. 미국의 호수에 돌을 던지면 “첨벙”이 아니라 “스플래쉬(splash)”라고 소리가 난다. 그러나 바로 일견 자명해 보이는 이런 기호의 자의성의 원칙, 기호를 상징과 구분해주는 이 원칙이야말로, 데리다에 따르면, 우리로 하여금 에크리튀르를 협소한 의미의 에크리튀르, 곧 음성언어의 재현으로서의 에크리튀르로 간주하게 만들고 다른 종류의 에크리튀르들을 광범위하게 배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제한[에크리튀르의 종류의 제한]은 소쉬르가 보기에 근본적으로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의념에 의해 정당화된다. 에크리튀르는 기호들의 체계로 규정되기 때문에, “상징적(symbolique)” 에크리튀르, 형상적 에크리튀르는 없다. 상징문자(graphisme)가 자연적 형상화의 관계, 그리고 의미되는(signifié) 것이 아니라 재현되고 그려지는 것에 대한 어떤 닮음(ressemblance)의 관계를 보존하는 한에서 에크리튀르는 없다. 그림문자적(pictographique) 에크리튀르나 자연적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은 따라서 소쉬르에게 모순적일 것이다. 그림문자, 표의문자 등의 개념들이 지닌 이제 인정되는 취약함, 그리고 그림문자, 상형문자, 표음문자라 불리는 에크리튀르들 간의 경계들의 불확실성에 대해 생각한다면, 우리는 소쉬르적 제한의 경솔함을 헤아릴 뿐 아니라, 일반언어학이―종종 심리학을 매개로―형이상학으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자의성 개념 주변에 모여 있는 일군의 개념 전체를 포기해야 할 필요성을 헤아리게 된다. (49, 강조는 데리다) 

그렇지만 기호의 자의성 개념 주변에 모여 있는 일군의 개념 전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아마도 자의성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우리가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호의 자의성은 적어도 인간 언어에 있어서만큼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확인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 개념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기호의 자의성 개념은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탈구축되어야 한다. 바로 그 개념을 가능하게 만드는 차연(différance)의 운동을 드러냄으로써. 

데리다에 따르면, 기호의 자의성, 다시 말해서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 있어서의 동기의 부재는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생성되어온”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언어적인 기표를 포함한 모든 흔적은 의미를 생산함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는 반복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될 수 있으며, 그런 반복은 오직 어떤 흔적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의미가 있고 사후적으로 그것의 흔적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흔적을 통해서만 의미는 의미로 생산될 수 있다. 의미를 갖는, 따라서 의도를 갖는 흔적은 언제나 기원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데리다는 “진실을 말하자면, 비동기화된 흔적은 없다”(69)고 말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흔적은 의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타자이기 때문에 언제나 시간 속에서 자신이 부착되어 있던 의미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운동, 곧 “흔적의 비동기화(immotivation)”의 운동에 연루될 수밖에 없다. 이 흔적의 비동기화의 운동을 통해서만 기호의 자의성이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상징으로부터 기호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자, 의미와 흔적 사이의 시간적-공간적 차이화로서의 차연의 운동이다. 

이 때문에 “기호”가 “상징”의 단계를 넘어설 때 “비동기화”의 운동은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 이행한다. 소쉬르가 “상징”이라고 부르는 것, 기호학이―적어도 잠정적으로 그가 말하듯이―관심을 두지 않는 것 안에는 비동기화가 아직 없다고 말하는 게 허락된다면 그것은 “이처럼(comme tel)”의 의미로, “이처럼”의 어떤 규정된 구조에 따라서다. 비동기화된 흔적의 일반 구조는 타자와의 관계의 구조, 시간화의 운동, 에크리튀르로서의 언어를, 동일한 가능성 안에서, 그리고 추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그것들을 분리할 수 없이, 교통하게 만든다. 어떤 “자연”에 준거함 없이, 흔적의 비동기화는 항상 생성되어왔다. 진실을 말하자면, 비동기화된 흔적은 없다. 흔적은 무한정하게 자기 자신의 비동기화-되기(devenir-immotivée)이다. 소쉬르가 하지 않은 말이지만 소쉬르적 언어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할 것이다. 상징도 없고 기호도 없지만, 상징의 기호-되기가 있다.(69, 강조는 인용자)

데리다는 이런 상징의 비동기화에 대해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소쉬르보다 훨씬 더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한다. 퍼스는 한편으로 소쉬르적 기호의 자의성을 특징으로 갖는 상징체계는 자의적이지 않은 “아이콘, 아이콘과 기호의 성격을 띤 혼합된 기호”(70)로서 비상징 체계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일견 모순되게) “모든 상징은 상징으로부터만 나온다(Omne symbolum de symbolo)”고 말하는데, 이는 퍼스가 상징에 핵심적인 것이 바로 상징의 비동기화 운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징은 항상 다른 상징들을 비동기화시키면서 그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개념들”(퍼스는 혼합된 성격의 정신적 기호의 “상징 부분symbol parts”을 개념들이라 불렀다)을 포함하는 사유를 통해 형성된다. 상징은 상징으로부터만 나오기에, 우리는 이 상징들의 연쇄를 아무리 추적해 들어가도 계속해서 무한히 상징들만을 만나며, 더 이상 상징이 아닌 어떤 것, 즉 상징에 의해 상징되기만 하는 어떤 순수한 피상징체의 현전과 결코 만날 수 없다. 이렇게 기표를 갖지 않는 최초의 기의와 같은 것은 없다는 사유를 했던 한에서 데리다는 퍼스가 “초월적 기의의 탈구축”의 방향으로 아주 멀리까지 나아간다고 평가한다(71). 데리다는 퍼스에게 기호체계란 참조의 무한정성(l’indéfinité du renvoi)을 가질 때에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의미작용의 운동을 출범시키는 것은 그 운동의 중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물 자체는 하나의 기호다.”(72, 강조는 데리다)라고 말한다. 즉 사물의 발현(manifestation)은 그것이 이미 기호가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사물 자체는 항상 이미 직관적 명증의 단순성에서 벗어난 재현체/표상체(representamen)”(72)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데리다는 상징의 기호-되기 또는 상징의 비동기화라는 차연의 운동이 그 어떤 언어학적 구분(기의/기표, 랑그/파롤, 공시/통시 등)에도 앞선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에크리튀르를 음성언어의 재현으로 제한하는 시각을 비판하고 그 모든 흔적, 곧 그림문자, 상형문자는 물론 음성언어에 사용되는 기표 뿐 아니라 인간언어를 넘어서는 DNA나 기계어 등을 포괄하는 일체의 흔적을 가리키는 광의의 에크리튀르를 지시하기 위해 “원-에크리튀르(archi-écriture)”(83)라는 개념을 제안하고, 그것에 대한 연구로서 그라마톨로지는 언어학을 자신의 국지적인 영역으로 포함한다고 말한다. 소쉬르는 언어학이 기호학의 일부라고 말했지만, 데리다는 언어학이 그라마톨로지의 일부라고 고쳐 말하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기원(arche)과 발생에 대한 질문을 전-구조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도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 아니라, 바로 거기서 우리는 데리다적 의미에서의 그라마톨로지의 정의(définition) 그 자체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유희의 출발에서부터 상징의 비동기화-되기 안에 있다. 이 되기에 관련해서 보면 통시적인 것과 공시적인 것의 대립 역시 파생된 것이다. 그것은 적절하게 그라마톨로지를 지휘할 수 없을 것이다. 흔적의 비동기화는 이제 상태가 아니라 작업(opération)으로, 주어진 구조가 아니라 활동적인 운동, 탈-동기화(dé-motivation)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호의 자의성”에 대한 과학, 흔적의 비동기화에 대한 과학, 파롤에 앞서 있고 파롤 안에 있는 에크리튀르에 대한 과학으로서 그라마톨로지는 그리하여 가장 광범위한 장을 포괄할 것이며, 이 장 안에서 언어학은 추상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공간을 그려야 할 것이다 […] (74){주10/ 물론 데리다는 얼마 안 있어서 여기서 사용한 “과학”이라는 용어에 X자를 침으로써 그것을 말소할 것이다. 왜냐하면 흔적은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83). 그것은 과학이 연구할 수 있는 어떤 현전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 모든 현전하는 대상의 비현전적 조건을 이룰 뿐이다. 그라마톨로지는 후설(Edmund Husserl)이 말하는 “과학들의 과학”은 아니다.}

아마도 이런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 구조주의는 기원과 발생에 대한 질문(구조의 기원은 무엇이며 구조는 어떻게 발생했는가)을 제대로 사유하고 비판했다기보다는 단지 억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원적 의미는 늘 그것의 타자인 흔적을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으며, 또한 이 흔적의 비동기화의 운동(의미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운동)에 의해 변형되거나 취소될 수 있다. 기원은 항상 이미 차연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기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기원만이 있을 수 있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흔적은 단지 기원의 사라짐일 뿐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흔적은 … 기원은 심지어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 기원은 오직 기원의 기원이 되는 비-기원에 의해서, 흔적에 의해서 거꾸로만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90, 강조는 인용자)  

하지만 이런 데리다의 사유가 기원을 비판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일까? 구조주의는 기원과 발생에 대한 질문을 단지 억압했을 뿐인가? 우리는 다음 절에서 이 점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3. 기원-발생의 탈구축인가, 아니면 기원 없는 돌발인가?

데리다는 소쉬르의 기호의 자의성 개념이 은밀하게 기대고 있는 음성중심주의와 현전의 형이상학을 탈구축하기 위해 소쉬르에게 또 다른 소쉬르를, “기호의 자의성”을 주장하는 소쉬르에게 “언어적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차이”를 주장하는 소쉬르를 대립시켜야 한다고 말한다(77). 하지만 데리다는 소쉬르가 말한 이 “차이”에 대해 “차이는 결코 그 자체 안에 있지 않으며 정의상 감각적인 충만함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의 필연성은 랑그의 자연적으로 음성적인 본질을 주장하는 것과 모순된다”(77)라고만 아주 간략히 말하면서 곧바로 음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논의를 몰아간다. 이는 데리다가 소쉬르의 차이 개념을 자신의 차연 개념 하에 포섭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곧 차연의 활동적 운동이 기호의 자의성을 설명해준다는 바로 그 사유 하에. 

그러나 소쉬르의 차이 개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감각적인 것은 아니므로 음성과는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기호를 “실체”가 아닌 “형태”로 파악하는 반-실체론적인 관계론의 견지에서 사유하고 있다는 점 아닌가?{주11/ 소쉬르, 같은 책, 135쪽.}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그러므로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가 포착하는 것은 미리 주어진 개념이 아니라, 체계에서 우러나는 가치이다. 가치가 개념에 해당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암시하는 바는, 개념이 순전히 이화적(異化的)이라는 것, 즉 그 내용에 의해 적극적으로 정의되지 않고, 체계 내의 다른 사항들과의 관계에 의해 소극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개념의 가장 정확한 특징은, 다른 어떤 개념도 아닌 것이 바로 그 개념이라는 데 있다.{주12/  소쉬르, 같은 책, 139쪽, 강조는 인용자.}

소쉬르의 차이는 어떤 적극적 내용을 갖는 실체적인 것들 간의 차이가 아니다. 요소들로서의 기호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갖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이화적 관계 속에 들어감으로써 그 관계로부터(“체계에서 우러나는”) 어떤 가치를 부여받게 되며, 오직 그렇게 과개체적인(transindividual) 방식으로만 개체적인 가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소쉬르에게는 바로 이 점이야말로 기표와 기의 사이의 결합의 자의성을 설명해주는 것인데, 왜냐하면 어떤 기표가 어떤 발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다른 기표들과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가에 따라 상이한 기의와 결합하게 되어 가치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나의 동일한 기표 요소도 상이한 관계 속에선 상이한 방식으로 기능하며 이 때문에 기표와 기의 간의 결합에는 실체적 필연성이 있을 수 없다. “언어에는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한 후 소쉬르는 “언어에서 모든 것이 소극적이라는 말은 기표와 기의를 각각 분리해서 취급할 때만 해당되는 말”이라면서, “바로 이 가치 체계가 각 기호의 내부에서 음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 사이에 실제적인 연결 관계를 구성해 주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는 각각 별도로 취급하면 순전히 이화적이고 소극적이지만, 이들의 결합은 하나의 적극적 현상이다.”라고 말한다.{주13/ 소쉬르, 같은 책, 143쪽.} 다시 말해서, 기의든 기표든 간에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실체적인 것, 곧 현전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들의 결합은 적극적인 현상으로서의 현전적인 기호 효과를 생산한다. 

이렇게 놓고 보자면, 소쉬르가 말하는 차이의 논리는 차연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데리다가 주장하듯이 파생의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데리다가 말하듯이 기호의 자의성에 “토대를 제공”해주는 것이 “언어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차이”이며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여기에는 여전히 두 가지 상이한 설명 방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른바 상징 속에서 어떤 동기를 가지고 결합되어 있던 기표와 기의가 여전히 서로에 대해 지니고 있는 타자성으로 인해 차연의 운동 속에서 서로 분리되는 상징의 비동기화를 필연적으로 겪게 되며 이로 인해 기호의 자의성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이는 분명 기원을 탈구축하는 방식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발생론적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쉬르는 어떤 기표가 어떤 기의와 결합되는가 하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가치 체계, 어떤 관계, 따라서 어떤 구조 속으로 들어서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문제이며, 이 때문에 상이한 구조 속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그 결합이 이루어지는 기호의 자의성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이 경우 우리는 그 설명 방식이 구조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쟁점과 관련해서 우리의 사유를 자극할 수 있는 논의가 있는데, 그것은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보다 1년 앞서 출판된 푸코의 『말과 사물』(1966)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텍스트에서 푸코는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일어난 에피스테메의 변화에 대해 논하면서 16세기 르네상스를 지배했던 에피스테메가 닮음(ressemblance)이었다면 17세기부터 시작되는 고전주의 시대를 지배했던 에피스테메는 재현(représentation)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두 에피스테메의 차이를 언어 또는 기호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면서,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기호는 근본적으로 3원론적으로 파악되었던 반면, 17세기 고전주의 시대에 기호는 근본적으로 2원론적으로 파악되었다고 말한다. 르네상스 시기의 기호체계를 이루는 항들은 기표, 기의, 그리고 상황(conjoncture, τυγχάνον)인데, 여기서 상황이란 기표와 기의를 연결시켜주는 매개로서 당시에 그것은 바로 “닮음”이라고 간주되었다. “[16세기에] 어떤 형태가 기호를 그것의 독특한 기호 가치 속에서 구성하는가? ― 그것은 바로 닮음이다. 기호는 자신이 가리키는 것과 닮은 한에서(즉 유사성을 갖는 한에서) 의미한다.”{주14/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역, 민음사, 2012, 61~62쪽 (이 텍스트에서 인용시 번역은 모두 수정되었다).} 이는 소쉬르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당시 언어는 자의성을 특징으로 갖는 기호라기보다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표와 기의 간의 닮음을 통한 연결은 단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말과 사물 사이의 닮음을 통해 세계 전체로 확장되고 그 속에서 말과 사물은 한데 뒤섞여 “세계의 산문”을 형성한다. “16세기의 순수하고 역사적인 자신의 존재 속에서 언어는 자의적인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 안에 놓여 있고 동시에 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왜냐하면 사물들 그 자체가 언어처럼 자신들의 수수께끼를 감추고 드러내기 때문이고, 말이 사물처럼 인간에게는 해독해야할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주15/ 푸코, 같은 책, 70쪽}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푸코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에크리튀르가 특권화되었던 시대라는 것이다. “모든 방식으로, 언어와 사물들의 이 같은 얽힘은 그것들의 공통된 공간 안에서 에크리튀르의 절대적 특권을 가정한다. / 이 특권이 르네상스 시대 전체를 지배했다.”{주16/ 푸코, 같은 책, 75쪽} 왜 에크리튀르가 특권화되었을까?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신이 세계에 놓아둔 것은 씌어진 말들”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줄 때 그는 단지 신이 놓아둔 “그 가시적이고 말 없는 표지를 읽었”을 뿐이며, 율법도 석판에 새겨졌다. 16세기의 비의적 지식, 무엇보다도 카발라는 이런 시원적으로 자연적인 에크리튀르의 힘을 복원하려고 시도했다. 

물론 이런 사정은 17세기에 고전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모두 변한다. 기표와 기의를 연결시켜주는 세 번째 항으로서의 닮음의 상황은 부정되고 “에크리튀르의 우위는 유보”되며 “사물과 말이 분리”된다. “눈은 … 보기만 하고, 귀는 듣기만 하”게 된 것이다.{주17/ 푸코, 같은 책, 81쪽} 푸코는 기호의 이항적 이론은 17세기의 재현의 일반 이론과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면서, “소쉬르가 일반기호학의 기획을 발견하면서 기호에 ‘심리학적’(개념과 이미지의 연결)으로 보일 수 있는 정의를 주었던 것도 마찬가지로 필연적이었다. 사실 그는 기호의 이항적 본성을 사유하기 위해 거기서 고전주의적 조건을 재발견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주18/ 푸코, 같은 책, 114~15쪽}

이렇게 놓고 본다면, 우리는 데리다(그리고 사물 자체는 이미 하나의 기호 또는 하나의 재현체/표상체라고 보는 퍼스)는 16세기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 안에서 언어와 에크리튀르를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16세기적 언어 이해는, 푸코에 따르면, 고전주의가 시작되면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19세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을 통해 일종의 “대항담론”으로서 복귀하기 때문이다. 횔덜린(Friedrichi Hölderlin),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아르토(Antonin Artaud) 등은 “16세기 이래 잊혀진 순수한 존재 속에 있는 언어”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만 다른 모든 언어로부터 자신들의 언어를 분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주18/ 푸코, 같은 책, 82쪽}

물론 데리다가 16세기의 에피스테메에 전적으로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데리다를 따라 16세기의 언어관에서 17세기의 언어관으로의 이행을 상징의 비동기화를 통해 기호의 자의성이 수립되는 역사적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우리는 여기서도 다른 설명 방식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17세기의 재현의 에피스테메의 구조 속으로 말들과 사물들이 진입하면서 단지 언어이론 뿐만 아니라(포르-루아얄port-royal이 기점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말들과 사물들에 대해 맺는 실천적 관계 자체가 변하게 되었으며, 기표와 기의의 연결이 대규모로 자의적이 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푸코(적어도 『말과 사물』의 푸코)에게서 이런 이행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유사한 시기에 알튀세르가 그 설명의 기본적인 원리를 제공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을 기억할 수 있다. 유고작으로 출판된 「D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는 알튀세르가 1966년에 디아트킨René Diatkine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다)에서 어떤 구조의 시작(예컨대 무의식적 구조의 시작)을 사유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서 그는 “발생”과 “돌발(surgissement)”을 대립시킨 바 있다.{주20/ Louis Althusser, “Letter to D”, Writings on Psychoanalysis, trans. Jeffrey Mehlma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 pp. 33-77.} 발생이 근본적으로 결과를 원인의 자리에 가져다 놓으면서 기원을 발견하려고 하는 목적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면, 돌발은 몇몇 요소들이 우발적으로 마주침으로서 어떤 구조가 출현하는 것을 사유하고자 하는 반목적론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자본』을 읽자』(1965)에서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발생했는가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 이러저러한 요소들이 어떤 종별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본주의적 “사회효과”를 생산하는지에 대한 분석이라고 주장했다.{주21/ Louis Althusser and É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trans. Ben Brewster, London: Verso, 1979, pp. 64-69.} 여기에 추가로 그는 「D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이 종별적으로 자본주의적 관계의 출현을 설명하면서 돌발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요소들(예컨대 축적된 부, 대규모의 노동대중의 존재, 과학기술 따위)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이미 이런저런 방식으로 존재했으나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기능한 것이 아니라 전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기능했을 뿐이다. 이 요소들이 어떤 역사적 계기에 우발적인 방식으로 함께 마주쳤을 때 비로소 자본주의적 관계가 돌발했으며 그 관계 속으로 들어섬으로써만 그것들은 비로소 자본주의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작”에 대한 이런 설명은 나중에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후기 알튀세르의 논의로 이어지는데, 이에 따르면 이런 돌발은 선행하는 원인이 없는 결과로 사유되어야 한다.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구조적 인과성”은 기원 없는 돌발이라는 사건을 통해 작동한다.{주22/ 스피노자의 내재적 인과성, 과개체성에 대한 논의를 알튀세르가 물려받는 방식에 대해서는 졸고, 「미완의 스피노자」, 서동욱·진태원 편, 『스피노자의 귀환』, 민음사, 2017, 453~56쪽을 참조하라.}

즉 그것은, 한계 속에서 또 한계에 의해서 극단에 이르도록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든 기도는 전례 없는 것, 선행원인이 없는 것, “본질은 이미 존재해 온 것이다”(Wesen ist gewesen ist)라는 이 명제가 해당하지 않는 것, “이미 존재해 온 것”인 이 본질이 없는 것, 그 본질 속에서 “이미 존재해 온 것”을 구성하는 선행소여(先行小輿)가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근본적인 새로움은 “…의 원인”, “…의 과거”, “…의 본질”, “…에 대한 선행소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모든 것일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은 하나의 결과(résultat)일 수밖에 없다. 모든 극단의 철학과 한계의 철학이 오직 결과의 철학으로 귀착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로이트라면 사후성(事後性, l’après coup)에 대해 말했을 것이고, 맑스라면 “요소들의 결합(combinaison)”의 사실적 결과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결과, 그리고 그 출현 및 실존의 비존재론적인 조건들 뿐이다). 원인 없는 결과, […] 즉 우연한 기회로부터 태어나는, 우발적이기 때문에 원인이 없는 결과 말이다. {주23/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서관모·백승욱 편역, 새길, 1996, 186~87쪽, 강조는 알튀세르.}

그렇다면 우리는 유사한 방식으로 르네상스로부터 고전주의 시대로의 이행을 돌발로서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사실 이 이행은 다름 아닌 17세기에 시작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4. 나가며

하지만, 다시 한 번, 우리는 이 두 가지 설명방식, 데리다의 기원-발생의 탈구축과 돌발에 대한 구조주의적이자 내재주의적인 이론화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만 하는가? 이것들 사이엔 아마도 환원 불가능한 이단점이 있을 테지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하는지는 적어도 나에게 분명치 않다. 어떤 초월성이든 그것은 자신을 반복하기 위한 경험적이고 물질적인 흔적을 필수적인 보충물로 요구하게 되며, 이 보충물이 자신을 대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오배(誤配) 또는 산종의 운동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초월성은 의사-초월적(quasi-transcendental)인 것이라는 점을 논증하는 데리다의 탈구축의 사유는 초월성을 단순히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것의 (불)가능성의 조건을 분석함으로써 초월성을 역사화했다는 점에서 매우 혁신적인 사유의 장을 열어냈다. 이는 분명 다양한 넓은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자들이 구조들의 역사를 사고하고 분석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데리다가 모든 것을 에크리튀르와 차연의 운동으로 어쩌면 너무 환원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주24/ 여기서는 이런 환원의 한 가지 예만 들어보자. 「프로이트와 에크리튀르의 무대」에서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Nachträglichkeit(데리다는 “지연작용”이라 옮기지만 정신분석학은 통상 “사후성après-coup”이라 옮기는)를 차연의 개념 하에 포섭하려고 시도하면서, 기억이 형성되는 일반적 과정, 곧 외적·내적 자극에 대한 정상적 방어과정에서 에너지가 뉴론들의 연쇄를 통해 릴레이 되는 지연작용에 집중한다(Derrida, “Freud et la scène de l’écritur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p. 293~340). 그러나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직접 읽어보면, 프로이트는 뒤에 오는 사건이 앞에 온 사건을 규정하는 인과순서의 전도를 가리키기 위해 사후성(Nachträglichkeit)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를 기억이 아니라 오로지 병리적 방어과정으로서의 망각(amnesia), 즉 억압에만 관련시키고, “오직 성적 관념들만이 억압에 종속된다”는 점을 명시한다. 데리다의 논의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 자체를 에크리튀르로 환원하고 사실상 그것의 종별성을 지운다. Sigmund Freud, Project for a Scientific Psychology, in 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Psychological Works of Sigmund Freud, vol. I, ed. James Strachey, London: The Hoarth Press and the Institute of Psycho-Analysis, 1966(특히 p. 352)을 보라.} 분명한 것은 탈구축과 구조주의 사이의 긴장은 우리가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켜 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지적 자원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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