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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표절에 대한 짧은 소회

marxpino 2021. 7. 23. 12:13

이 글은 『문화과학』 84호(2015년 겨울)에 실렸던 글입니다. 앞서 공개한 <예술의 비판기능과 유희기능의 종합을 위한 성찰: 알튀세르와 블랑쇼를 중심으로>(2019)와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논의나 인용은 출판된 판본에 준거해 주시길 바랍니다.


 

표절에 대한 짧은 소회

 

최 원 

 

20여 년 전에 문학과 약간의 인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후 문학으로부터 줄곧 멀어지기만 해온 내가 문학계에서 벌어진 신경숙 작가의 표절을 둘러싼 논쟁에 말을 보탠다는 것은 솔직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게다가 나는 신경숙 작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하다시피하고, 당연히 이번에 논란이 된 작품을 비롯하여 신작가의 어떤 작품도 읽어본 적이 없다. 또한 나는 문학계 내에 형성되어 있는 작가 시스템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이 없으며 그나마 알고 있는 것도 지난 『문화과학』 지에 실렸던 동료 편집위원들의 글과 외부의 다른 글 몇 편을 통해 얻게 된 정보가 거의 전부이다. 따라서 이 글은 신경숙 작가의 표절 여부를 가리는 데에 기여하는 글이 될 수도 없고, 신경숙 작가의 예술적 성취를 평가하는 글은 더더욱 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현재 한국 문학계에 형성되어 있는 이른바 ‘문학권력’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글도 될 수가 없다. 이 글은 오히려 이러한 일련의 주제들에 대해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 몇 가지를 밝히는 글이 될 것인데,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는 실은 내가 그간 어떤 ‘불편함’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표절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리고 아마도 이와 관련된 권력이라는 문제에 대해.

표절이라는 문제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그것이 어떤 ‘소유(property)’ 또는 ‘소유권(ownership)’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데에서 비롯된다. 표절을 문제 삼아 비판을 하는 쪽에서는 대부분 ‘누구에게 그 작품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한 소유권이 있는가?’라는 질문 및 ‘표절은 타인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도둑질이다’라는 (사법적이지는 않더라도) 매우 규범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자신의 담론을 조직하게 된다. 또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도 그 작품에 대한 소유권이 작가에게 온전하게, 배타적으로, 그리고 적법하게 속해 있다고 말하면서, 표절이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우연의 일치’이거나 ‘의도적이지는 않은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비판을 피해가려고 한다. 이를테면 ‘실수로 들고 나온 물건’이었다고 말하면서 한번 범죄 의도를 증명해보라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반대편에서는 그 의도를 증명하기 위해 증거가 될 만한 머리카락 한 올을 찾아 범죄현장을 다시 샅샅이 뒤지거나 결국 제풀에 지쳐 증명을 포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의도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더러, 마음만 먹으면 어떤 억지도 통하는 모호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절 문제가 하지만 비단 문학에서만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곧바로 떠오르는 에피소드는 1960년대에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두 제자 사이에서 일어났던 큰 소란이다. 1964~65년에 알튀세르는 몇몇 제자의 요청으로 맑스의 『자본에 대한 공동세미나를 조직했다(이 세미나의 결과물이 바로 『『자본』을 읽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거기에는 발리바르, 마슈레, 레뇨, 뒤루, 밀레르, 랑시에르 등이 참여했다. 여름 방학 내내 진행한 맑스의 원전 독해를 마치고 새 학기가 시작되어 논문발표와 토론을 조직해야 했는데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기꺼이 첫 번째 발표를 맡아 주었고, 그의 논문은 다른 참가자들을 지적으로 자극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세미나를 이어나갈 수 있는 뛰어난 단서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장차 라캉(Jacques Lacan)의 사위이자 후계자가 될—밀레르(Jacques-Alain Miller)가 여름휴가에서 돌아와 랑시에르의 논문 등사본을 읽고 나서 그가 예전에 발명(했다고 주장)하고 발표하기도 했던 ‘환유적 인과성’(또는 부재하는 원인)이라는 개념을 랑시에르가 ‘도용’한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하면서 생겨났다.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이런 비난으로 몹시 괴로워했다. 개념이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내 생각이었지만 밀레르는 도무지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젊음의 호기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 게다가 밀레르는 그해에 이렇게 엄숙하게 말하면서 라캉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라캉을 연구하려는 게 아니라 라캉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밀레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개념에 대한 발명과 소유권을 인정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해는 아주 안 좋게 끝났다. 어떤 논리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밀레르가 자신의 ‘환유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도용했다고 비난한 사람은 랑시에르가 아니라 내가 되고 말았다. 랑시에르는 다행히도 이 끔찍한 사건에서 옆으로 밀려났다. 『『자본』을 읽자』에서 이 일화의 흔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 표현(‘환유적 인과성’)을 쓸 때면 나는 주를 달아 그 개념을 밀레르한테 빌려왔다고 밝힌다. 그러나 곧 나는 그 말을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말로 바꾸게 됐으며, 그것은 아무도 쓰지 않았던 표현이었으니만큼 바로 내 것이었다. 다 웃기는 얘기다! {주1/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이매진, 2008년, 277쪽(강조는 인용자—이 책에서 인용 시 고유명사의 발음 등 약간의 수정이 있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밀레르의 ‘환유적 인과성’ 개념이 사실 라캉의 ‘가르침’에서 가져온 것이며 밀레르 자신도 이를 인정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라캉도 이러한 환유 개념을 자신이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개념을 야콥슨(Roman Jakobson)에게서 가져왔으니 말이다. 물론 라캉은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다소간 수정하기는 했지만, 그는 야콥슨을 인용하지도 않았고 출처를 밝히지도 않았으며, 이 때문에 나중에 그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라플랑슈(Jean Laplanche)의 폭로로 표절시비에 휩싸이게 된다(물론 라캉은 이런 비판에 대해 눈도 깜빡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서로 환유 개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거나 또는 이미 새겨져 있는 상대편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그 속으로 엉뚱하게 자신마저 끌고 들어가고 있던 상황에 대해 알튀세르가 한 말은 단 한 마디였다. ‘다 웃기는 얘기’라는 것이다. 자신의 개념을 훔쳐갔다고 고발하는 것도, 그 혐의를 피하기 위해 표현을 조금 바꾸고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모두 다 똑같이 ‘웃기는 얘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개념이란, 알튀세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개념을 가져다 쓰는 것과 문장을 가져다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장이 문학작품의 작가에게 생명과도 같다면, 개념은 철학자(또는 이론가)에게 마찬가지로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철학자가 자신의 개념에 대해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면, 작가는 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이어지는 부분에서 알튀세르는 중세에는 과학이 저자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었지 문학 작품은 저자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오늘날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과학은 저자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은 반면 문학 작품은 저자의 이름이 중요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문학에서 저자의 ‘소유권’이 인정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자본주의적인 ‘사적 소유’의 발달이라는 문제, 그리고 문학 작품의 상품화라는 문제와 동떨어져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또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지난날 지식인들을 열광케 했던 ‘저자의 죽음’을 둘러싼 구조주의자들(바르트와 푸코)의 비판적 논의들은 지금 우리의 논란에서 어떤 자리를 부여받고 있는 것일까?

혹여 내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친애하는 동료 편집위원들을 비롯하여) 신경숙 작가와 그를 비호하는 『창작과 비평』 사를 비판하는 진영을 애써 뜯어 말리거나 심지어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되진 않길 바란다. 오히려 나는 그들의 정당한 비판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기 위해서 조금 더 숙고해봐야 할 것은 없는가 하는 (어쩌면 조금 분수 넘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예술작품 일부 또는 전체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작금의 표절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의 문제의식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시간을 증여하기: 제1권 위조 화폐』에서 ‘주체의 경제’는 언제나 자신이 타자에게 주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할 것에 대한 예상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따라서 ‘자본(capital)’이야말로 모든 주체화의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곧 모든 주체는 축적 내지 소유의 자본화에 대한 예상을 통해 구성된다. 반대로 이와 대립되어 있는 선물(gift)은 주체의 모든 예상을 빗나가며 결과적으로 주체의 경제를 탈구축하는 계산 불가능한 대항논리를 따라간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점을 철저히 적용할 경우, 우리의 일상적인 교환행위는 물론이요, 우리가 통상 ‘선물’이라고 파악하는 것도 모두 ‘주체의 경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선물에 대한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경우에조차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선물로서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이미 모종의 나르시시즘적인 만족의 잉여가치를 거기에서 추출해낼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의 선물은 즉시 하나의 비-선물, 하나의 교환물로 변질될 것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남아 있는 유일한 선물의 가능성은 ‘과도한 망각’ 또는 ‘망각적 과도함’ 속에 놓여있다. 증여의 사실을 잊기. 그것을 의식 안에서뿐만 아니라 무의식 안에서조차 잊기. {주2/ Jacques Derrida, Given Time: I. Counterfeit Money, trans. Peggy Kamuf,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p. 101-102.}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문학이든 철학이든 간에) 글을 쓴다는 행위는 언제나 대립된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중구속의 운동 속에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글을 쓰는 자신을 ‘저자’로, ‘주인’으로 설립하고, 글을 쓰는 행위에서 어떤 모종의 잉여가치(그것이 돈의 형태를 취하든 명예의 형태를 취하든 간에)를 뽑아내기 위해, 그 잉여가치를 통해 자신의 글을 자본화하기 위해서만 자신의 글을 증여하는 글쓰기의 방향이 있다면, 반대로 선물의 계산 불가능한 논리(또는 대항-논리) 속에서 자신을 망각하는 글쓰기, 자신을 ‘저자’로 설립하지도 않으며 자기의 글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글쓰기의 방향이 있다. 물론 어떠한 글쓰기도 이 이중구속을 결정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두 가지 태도를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글쓰기를 다시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 윤리적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은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구토』에서 로캉탱(Roquentin)의 입을 빌려 자신을 망각하는 글쓰기, 스스로 자신이 쓴 글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글쓰기에 대해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도 결국 이러한 ‘선물로서의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아마도 알튀세르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에도.

 

그렇지만 ‘개념의 도용’이라는 이 우스꽝스런 문제는 내가 깊이 관심을 갖고 있던 원칙적이고도 고통스러운 문제였던 익명성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의 익명성을 통해 이런 비존재를 정당화시키고 싶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때 나는 한 유명한 비평가에 대해 하이네가 말한 것을 꿈꾸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명성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나는 푸코가 ‘저자’라는 아주 근대적인 개념에 대해 비판을 하고 나서, 마치 내가 어두운 감방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푸코 역시 감옥에 갇힌 자들을 위한 투쟁 활동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푸코의 깊은 겸허함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나를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다름 아니라 내가 내 이름에 대한 모든 선전에 대항해 맹렬한 반대를 끊임없이 펼쳤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고등사범의 오래된 아파트에 박힌 채 거의 외출하지 않아 야만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외면상의 이러한 야만스런 은둔을 고수한 것은 그 속에서 내 운명, 게다가 마음의 평화까지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익명성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 책을 독자들 손에 맡기는 지금 역시, 역설적인 방법을 통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익명성 속으로 결정적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주3/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78~279쪽(강조는 알튀세르).}

알려져 있다시피, 알튀세르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가 출판된 후 곧바로 출판된 책을 모조리 회수하여 태워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었고 이 때문에 우울증을 앓았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저자로 설립하지 않고 익명성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결국 ‘대중 속으로’ 사라진다는 의미, 대중과 함께 사유하며 함께 투쟁하며 스스로 소멸한다는 의미, “사라지는 매개자(a vanishing mediator)”가 된다는 의미이다. {주4/ 이 표현 자체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이 처음 사용한 것인데, 발리바르는 이 표현을 ‘공산주의자’의 정의 그 자체로 만든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원, 「공산주의라는 쟁점: 바디우와 발리바르」, 『문화과학』 79호 (2014년 가을) 참조.}

그런데 만일 글쓰기가 이와 같은 두 가지 방향, 곧 주체화의 방향 또는 주체를 ‘저자’로 설립하는 방향과 오히려 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익명성’ 속으로 사라지는 방향의 이중구속 안에서 항상 싸워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면, 표절이라는 문제 또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표절 또한 자신을 내세우고 유명하게 만들고 상품화시키고 그렇게 스스로 자본이 되기 위한 표절이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자본과 권력에 맞서 대중과 함께 싸우면서 (나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싸우기 위한, 그렇게 싸우는 대중 속에서 스스로 소멸하기 위한 표절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때문에, 예컨대 1970년대에 나온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표절작이라고 고발하는 태도를 끝내 이해할 수 없다(이후 김지하가 어떤 실망스러운 변화를 겪었던 간에 말이다). 그 시가 아주 결정적인 모티브를 다른 사람(폴 엘뤼아르)에게서 가져왔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나는 김지하가 스스로를 저자로 설립하고자 그런 ‘표절’을 했을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또는 적어도 그것이 주된 것이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와서 김지하에게 그렇게 표절시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김지하를 ‘저자’로서, ‘주체’로서 설립하는 일이 아닐까? 그를 ‘저자’로서 먼저 설립하고, 그 다음에 그를 ‘표절-저자’로 고발하기 위해(마치 어떤 이를 처벌하기 위해 그의 법적 지위를 먼저 회복시켜주는 것과도 같이).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나는 또한 신경숙 작가의 표절을 둘러싼 논쟁이 처음부터 표절 그 자체에 대한 논쟁, 또는 심지어 ‘표절할 의도를 가졌었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문제는 어떤 표절인가, 스스로를 자본화하고 권력화하는 표절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지우거나 망각하는 표절인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동료 편집위원들(그리고 또 다른 이들)이 처음부터 이 문제를 명확히 ‘문학권력’의 문제로 파악했던 것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창작과 비평』(그리고 아마도 다른 몇몇 문예지들)은 지금 스스로를 권력화하고 자본화하기 위해, 그렇게 스스로를 ‘주체’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대중들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익명성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그렇게 자신의 주체성을 탈구축(deconstruct)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 어쩌면 이 대목에서 『창작과 비평』은 자신이 그간 권력과 싸워온 과거의 경력을 내세워 자신의 현재를 변호하고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 ‘선물’의 증여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모두 ‘교환행위’를 가리기 위한 가면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권력과 싸우고 있다고 여길 때조차 스스로가 지금 권력과 싸우고 있는지, 아니면 스스로 권력이 되고 있는지(되어 왔는지) 한 번쯤 다시 자문해볼 일이다. 실은 이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권력과 싸우고 있는 모든 이가 늘 물어야할 어떤 불편한 질문일 것이다. 대항권력 또한 분명 하나의 ‘권력’인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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