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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오피스
이 글은 약 20년 전에 쓴 것이지만, 출판되지는 않은 글입니다. 비트겐슈타인 초기와 후기 사이에는 큰 단절이 있습니다. 이 글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 대해 쓴 글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바디우는 초기 비트겐슈타인을 좋아한 듯합니다만, 저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이더군요. 이런 저의 관점은 라캉에 대한 또 다른 글에서도 엿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물론 저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는 입장입니다). 어쨌든 카벨을 따라 오스틴과 비트겐슈타인 간의 쟁점을 살펴 봅니다. 즐독 되시길. 카벨의 관점에서 본 오스틴과 비트겐슈타인 최 원 1. 들어가며『이성의 주장들(Claims of Reason)』에서 스탠리 카벨(Stanley Cavell)은 존 랭셔 오스틴(..
* 인터넷 문서의 한계로 고대 그리스어의 소문자 파이는 여기서는 j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라캉적 관점에서 박찬욱 감독의 (2022)에 대한 몇몇 생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라캉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라캉과 영화라는 주제를 다루는 일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라캉은 영화에 대해 거의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후기 세미나 어디에선가 오시나 나기사 감독의 (1976)에 대해 ‘이 영화는 일본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화였다’는 짧은 언급을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것이 전부다. 아마도 사람들이 라캉을 영화와 자꾸 관련시키는 것은 라캉 자신이 아니라 지젝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지젝은 라캉이 아니다. 우리는 라캉 자신의 관점을 알아보고 그 관점에서 영화를 ..
* 20년 전, 뉴 스쿨 대학 석사시절 때 썼던 에세이다. 학술지에 출판된 적은 없다. 헤겔은 정신(Spirit)에 도달하기 이전, 의식이 통과하게 되는 그 모든 형상들은 정신 그 자신의 추상적인 자기-분석을 구성할 뿐이라고 말한다. ‘실제’ 역사는 정신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헤겔은 정신의 그 긴 여행의 출발점에 ‘허구’의 분석, 즉 소포클레스의 문학작품 『안티고네』의 분석을 위치시킨다. 따라서, 앞서의 진술 속에서 ‘실제’(“실제 역사...”)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는 바는 통상적인 이해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역사는 의식이나 자아(the Self)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를 지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정신은 정확히 자아와 세계가 더 이상 그렇게 대립된..
에서 버틀러는 종종 정신분석에 대해 오해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라캉에 대한 오독은 문제가 많다. 이는 특히 지난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이성애와 동성애 사이에 근본적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오히려 라캉이 더 잘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버틀러가 라캉을 오독했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젠더 형성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 자체를 기각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상세한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들어가기 앞서서 중요한 개념 구분을 할 필요가 있다. 라캉은 성별들의 구조적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 두 가지 축을 도입한다. 하나는 사랑의 요구의 축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축이다. 여기서 사랑의 요구의 축이란 타자가 자기를 욕망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따라서 사랑의 요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욕..
단국대에서 5년 정도 주디스 버틀러를 강의해 왔고 이번 학기에도 강의했다. 여기 강의 노트 일부를 공유한다. 버틀러의 2부 5장은 게일 루빈에 대한 (양가적인, 즉 비판을 통한 긍정의, 탈구축적인) 논의다. 게일 루빈은 이라는 저서에서 성해방의 관점에서 매우 스캔달적인 주장들을 펼치면서, 심지어 범죄적으로 보이는 성욕(예컨대 소아성애자의 성욕) 까지도 긍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는 80년대 초에 있었던 이른바 sex war의 양진영, 즉 sex positive(섹스는 좋은 것인데, 법 또는 권력이 그것을 억압한다)와 sex negative(섹스는 그 자체로 나쁘고 폭력적이다) 가운데 sex positive의 진영에 속한다. 버틀러는 이 입장을 비판하면서 법 이전적인 성욕, 법을 파괴함으로써 해방시..
2022년 10월에 출판된 저널 (vol. 32, no. 4)에 실린 Pablo Vila, Matthew T. Ford & Edward Avery-Natale의 논문 "Althusserian Interpellations: Intellectual Trajectory and New Avenues"에는 십 년 전에 제가 동일한 저널에 출판했던 "Inception or Interpellation? The Slovenian School, Butler, and Althusser"(vol. 25, no. 1)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저로서는 영광스럽고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문의 첫 문단만 여기 인용해 봅니다(본격적인 논의는 좀 뒤에 나옵니다). A few years ago, Won Choi (20..
한국프랑스철학회의 여러 철학자들과 함께 공저한 푸코에 대한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푸코와 들뢰즈에 대해 썼습니다만, 좋은 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니 푸코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면 한 권 씩 구매하셔서 읽어보실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링크로 가시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알라딘: 푸코와 철학자들 (aladin.co.kr)
이 글은 발리바르가 2022년 10월 1일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발표한 글의 초역입니다. 현정세에서 너무나 읽어볼 필요가 있는 글이고 또 개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옮겼지만, 초역이니만큼 오역이 있을 수 있다는 점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아마 발리바르가 영어로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영어가 조금 이상한 부분이 몇몇 군데 있습니다. 그래서 번역자가 조금 개입을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 있었음을 말씀 드립니다. 본래의 영문본은 다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Étienne Balibar | Uncovering Lines of Escape: Towards a Concept of Concrete Utopia in the Age of Catastrophes – Utopia 13/13 (columbi..